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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태평공주는 왜 2번이나 출가(出家)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27.

글: 하당월색(荷塘月色) 

 

당고종 이치의 딸 태평공주는 중국역사상 유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16세때 결혼했다. 그 결혼식장면은 상당히 화려했다. 조명을 위한 횃불은 도로 양쪽의 나무를 태웠다. 그리고 결혼마차가 지나갈 큰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현지 지방정부는 할 수 없이 결혼장소의 담장을 허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여러 딸들 중에서 당고종이 태평공주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태평공주는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비록 용모는 별로였지만, "풍석(豊碩), 방액광이(方額廣頤, 이마가 네모나고 턱이 넓다) ". 그러나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에 적절한 말을 잘 했다. 그래서 부모와 오빠들의 사랑을 받는다. 특히 무측천은 그녀를 더욱 총애한다. 왜냐하면 무측천이 모기에, 이 어린 딸만이 용모라든지 성격이라든지 모두 자신의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지어 자주 이 딸과 정치문제를 몰래 논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반드시 비밀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 아끼는 딸이자 막후의 간부후보인 그녀를 어찌 출가시킬려고 했을까? 이 사건을 얘기하자면 약간은 내막이 있다.

 

태평공주가 처음 출가한 때를 얘기해보자. 그녀의 외할머니가 사망한 후,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무측천은 8살된 공주를 여도사가 되게 하였다. 태평(太平)이라는 이름은 이대 얻은 것이다. 즉 그녀의 도호(道號)이다.

 

이런 출가가 고인의 명복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치대로라면 그리 큰 관계가 없다. 그러나, 당나라ㅏ때는 이런 방식이 아주 유행했었다. 일반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걸핏하면 죽은 사람을 가지고 얘기했다. 왕왕 "효도"를 핑계로 하였다. 기실 이것은 자신의 사리를 도모하는 것이다. 혹은 어떤 정치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나중의 당현종도 이런 수법을 썼다. 그는 예쁜 며느리 양옥환을 손에 넣기 위하여, 모친 두덕비의 명복을 빈다는 명복으로 양옥환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게 한다. 그리고 친히 도호 "태진(太眞)"을 내린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녀를 손에 넣고 만다.

 

그러므로, 출가는 그저 남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형식일 뿐이었다. 어린 공주의 도호인 "태평"이라는 두 글자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첫째, 이치 부부는 하늘이 대당의 태평성세를 보우해주길 바랐고, 더 이상 대당의 '영광'이 고난 즉, 형제상잔, 대살륙등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이 편안하고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 둘째, 당연히 그들은 어린 딸이 평안하게 자라서 성인이 되는 것을 바랐다. 그들은 도관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신봉하고 경외하는 곳만이 딸을 더욱 잘 비호해줄 수 있고, 안전하고 평안한 호신부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전자는 자연히 그들의 정신적인 의탁이나 위자로 보아야 한다. 후자는 즉 두 사람은 형제상잔이 나타나는 것이 딸에게 줄 거대한 상처를 미리 막으려는 정치적인 책략이다. 명의상으로 보면, 태평공주는 출가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녀는 계속 궁중에 거주했다. 부모의 시선을 반걸음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이렇게 하여 태평공주는 어린 나이에, 이중신분과 이중소속이 있게 된다. 몇 마디로 개괄하자면 그녀는 인자하다는 겉옷을 걸친 공주가 된 것이다.

 

다시 그녀의 두번째 출가를 보자. 당시 토번은 전쟁으로 인한 쌍방간의 긴장국면을 완화하기 위하여, 사신을 장안에 보내어 구혼한다. 이전에 그들은 일찌기 당고종의 막내딸이 총애를 받고 있고, 정치적인 지혜가 있다고 들어서 아예 태평공주를 점찍어서 요구했다. 이는 무측천에게 난제를 던졌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이다. 어찌 그런 딸을 멀리 타국으로 시집보내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결혼은 정치문제이다. 직접 대당의 직접적인 이익에 관련된다. 구혼의 목적도 화해를 위한 것이다. 설마 토번인들의 본토에는 미인이 없다는 말이겠는가? 굳이 천리멀리 장안에 있는 턱이 넓은 여자를 원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무형중 이 문제는 차원이 달라졌다. 이를 거절하는 것은 평화를 거절하는 것과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무측천은 다시 옛수법을 쓴다. 딸을 다시 도관에 보낸 것이다. 이번에는 그래도 제대로 형식을 갖추어서 했다.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많은 인력,물력을 동원하여 도관을 짓는다. 태평관(太平觀). 그리고, 토번인들이 오기 전에 태평공주는 이미 태평관의 여도사가 되어 있었다. 설사 토번인들이 아무리 야만스럽다고 하더라도, 이미 홍진에 뜻을 버린 출가인을 어떻게 하자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측천은 공주를 출가시킴으로써, 토번의 정치적 공세를 교묘히 피해갔다.

 

두번의 출가는 모두 거짓이다. 자신의 집안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나, 화친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하물며 공주 본인은 아예 출가할 의향이 없었다. 그저 필요할 때면 형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그후에 환속하는 것은 말 한마디면 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