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홍수전)

홍수전: 천부하범 사상은 어디서 왔는가?

중은우시 2013. 5. 2. 22:54

글: 김만루(金滿樓)

 

 

 

1837년초의 광주부시(廣州府試)에서 다시 낙방한 후, 24살된 홍수전은 병을 크게 앓는다. 40여일동안 고열이 내리지 않았다. 혼미한 와중에, 홍수전은 기괴한 꿈을 꾼다. 그는 용 한마리, 호랑이 한마리, 수탉 한마리가 방으로 들어오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피리를 불고 북을 친다. 그리고 황의동자들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후 호화로운 가마를 가져와서 그를 태우고 계속 올라간다. 구름으로 들어갔고, 마지막에는 아주 밝은 곳까지 간다. 그곳에서 홍수즌은 키가 크고, 용포를 입은 어른을 만난다. 그는 홍수전이 배를 가른 다음, 더러운 내장을 꺼낸 후 새 것으로 바꾸어주었는데, 상처는 전혀 남지 않고 나았으며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홍수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대, 그 금색수염을 가진 위엄있는 어른은 자신이 그의 부친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인간은 지금 요마의 폐해를 받고 있으니, 너의 임무는 인간세상으로 내려가 요마를 참살하고 인간을 구원하라고 한다. 그의 전투를 돕기 위하여 어른은 그에게 "운중설(雲中雪)"이라는 보검을 내리고, 그의 형인 예수도 돕게 해준다. 현란한 빛 속에서, 홍수전은 보검을 휘두르며, 예수는 빛나는 금인을 받들고, 형제 둘이 삼십삼층 천계를 날아가서 인간세상으로 내려간다.

 

혼미한 와중에 홍수전은 자주 "살요(殺妖)! 살요(殺妖)!"라고 소리질러, 주변에 있던 가족들이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들은 홍수전이 귀신씌웠다고 생각하고, 곧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기괴하게도, 홍수전은 얼마후 건강을 회복한다. 고열이 내린 후, 그는 이전처럼 유가의 경전을 들고 다시 과거시험을 준비한다. 불행하게도 홍수전은 그후 7년동안 시험을 치면 칠수록 성적이 엉망이 되고, 마지막에는 철저히 포기하고, 다시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다.

 

심심하게 지내는 가운데 이경방(李敬芳)이라는 먼 친척이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른다. 그는 홍수전의 서재에서 기괴하게 생긴 소책자를 발견한다. 그래서 호기심에 그것을 가져가서 읽어본다. 책을 돌려줄 때, 이경방은 이것이 "신서(神書)"라고 말한다. 그리고 홍수전에게 극력 추천한다. 반신반의하며 홍수전은 오래 전부터 버려두었던 소책자를 집어든다. 읽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테지만, 한번 읽어보니 깜짝 놀랐다. 그를 7년간이나 괴롭힌 괴이한 꿈이 무슨 뜻인지 확연히 깨달았다. 바로 정답을 찾은 것이다.

 

소책자의 이름은 <권세양언(勸世良言)>이고 작자는 양발(梁發)로 중국인이다. 양발은 원래 인쇄공인데, 그는 영국선교사 로버트 모리슨(馬禮遜)이 <성경>인쇄를 도와주다가 기독교에 귀의한다. 그는 중국본토에서 최초의 중국인 목사가 된다. 양발 목사가 쓴 이 <권세양언>의 주요내용은 성경의 원문 및 그 개인의 이해이다. 쉽게 썼으므로 초보자들이 읽기에 적합했다. 선교를 더욱 잘하기 위하여, 양발 목사와 그의 조수는 자주 광주공원에서 과거시험을 칠 때 길가에서 선비들에게 무료로 나눠준 것이다. 홍수전이 이 책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런 연유때문이다.

 

비록 홍수전은 고열이 나기 전에 <권세양언>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꿈 속에 나타난 이야기는 기독교의 속죄, 세례, 퇴마등과 대체로 비슷하다. 그가 나중에 말한 "천부천형(天父天兄)"은 실은 <성경>의 ''하나님'과 "예수"이다. 후인들은 홍수전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이런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그러나, 여러번 이 야기를 성의있게 인용한 것으로 보아서는 홍수전이 비록 자신을 신격화한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고열이 있을 때 환각속에서 이런 꿈을 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종교의 역량은 무궁하다. 얼마후, 홍수전은 이경방과 <권세양언>에서 언급한 종교의식에 따라 서로 세례를 내린다. 그들은 물을 상대방의 머리 위에 뿌리며 "죄악을 씻어주고,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하소서"라고 묵도한다. 이것은 스스로 입교한 셈이다. 홍수전의 영향으로, 친구인 풍운산(馮雲山)과 당제(堂弟) 홍인간(洪仁玕)도 합류한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은 침례로 바꾼다(부근의 작은 강으로 가서 온 몸을 담근다). 그후 몇달동안 이 3명의 서당선생들은 <권세양언>을 열심히 연구하고 '배상제회'를 창립한다. '상제'의 소환하에, 그들은 사숙에서 공자의 패위를 없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들은 서당의 선생자리를 잃는다. 고향사람들의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눈길 속에서 홍수전등은 스스로 전도를 시작한다.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은 "배상제회"의 첫번째 신도가 된다. 양발이 여러해동안 뿌린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운 것이다.

 

비록 홍수전은 자신의 이론이 기독교에서 왔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스스로 세례한 것은 '입교'라고 볼 수가 없다. 그의 전도수준도 확실히 수준이 떨어졌다. 사실상, 홍수전은 원래 진정한 기독교도가 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저 이렇다. 우연한 요소가 사람의 운명을 뒤바꾸곤 한다. 홍수전은 결국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일은 나효전(ssachar Jacox Roberts. 羅孝全)부터 얘기해야 한다. 나효전은 침례교회의 목사이다.홍수전이 병을 앓던 그 해(1837년), 그는 미국의 테네시주에서 중국으로 와서 또 다른 저명한 선교사 곽사립(Karl Friedrich August Guetzlaff, 郭士立)이 조직한 한회(漢會)에 참가한다. 홍수전등이 스스로 전도할 때, 나효전과 일부 한회 회원은 그들의 활동을 알게 된다.1846년, 이미 귀의한 기독교도가 홍수전을 방문했을 때, 그들에게 광주로 가서 나효전을 만나서 포교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다만 당시 홍수전은 서당교육에 바빠서 그것이 성사되지 못한다. 다음 해, 나효전의 한 조수는 그들에게 서신을 쓴다. 홍수전은 그제서야 홍인간과 함께 광주로 간다. 그리고 나효전의 지도하에 곽사립이 번역한 <성경>신,구 전서를 학습한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홍수전은 나효전에게 그를 위해 정식세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나효전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두 명의 한회 회원을 홍수전의 고향으로 보내어 상황을 조사하게 한다. 준비업무가 모두 완료된 후, 홍수전은 맹세를 준비한다. 세례식을 받을 날짜도 확정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나효전과 홍수전간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홍수전은 세례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 일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홍수전이 세례를 받기 전에 나효전 목사에게 그의 이몽(異夢)을 얘기했고, 홍수전으로부터 스스로 꿈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아들이라고 얘기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사상이고, 기독교도로서의 기본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홍수전의 세례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 홍수전이 세례를 받기 전에 그를 모함에 빠트렸다고 한다. 나효전을 위하여 일하는 중국교도들이 홍수전에 대하여 질투하였고, 그들은 홍수전이 자신들의 일거리를 빼앗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를 함정에 빠트려, 그로 하여금 나효전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달라고 말하게 한다. 그러나 홍수전이 몰랐던 것은 성격이 불같과 아주 경건한 나효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런 경제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홍수전은 죽어도 진정한 기독교도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훙수전이 광주를 떠날 때, 곽사립이 번역한 <성경> 한권을 가져간다. 그는 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미 자형산 지구에서 전도를 수년간 한 풍운산을 찾아간다. 그가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은 풍운산이 이미 그곳에서 어느 정도 전도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헤어진지 3년만에 다시 만나서 함께 홍수전이 가지고 간 <성경>을 연구한다. 한동안의 연구와 학습을 거쳐, 홍수전은 자신의 이해에 따라 집안에서 혁명 '노삼편'을 수정보완한다: <원도구세가(原道救世家)>.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 이것은 향후 태평천국운동의 중요한 이론적 지도서이다.

 

홍수전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 척한 것인지는 몰라도, 배상제회의 종교이론은 기독교의 교의와 차이가 아주 컸다. 그 중 "천부천형"론과 "삼위일위(三位一位)"설의 충돌이 가장 큰 상처를 주었다. 소위 "삼위일위"는 원래, '성부, 성령, 성자'는 삼위일체이며 불가분의 세 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분명히 쓰여 있다. 그러나 혁명이 시작하면서, 홍수전은 스스로 꿈 속에 천부, 천형을 보았고, 자신을 "천부유자(天父幼子, 하나님의 막내아들)"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신령으로 끌어올려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에 대한 극도의 불경이다. 만일 중세기 유럽이었다면 이렇게 말하면 이단으로 불태워 죽였을 것이다.

 

더욱 곤란한 것은 홍수전의 주재하에 천부상제는 다시 몇몇 아들을 추가시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왕 양수청, 남왕 풍운산, 심지어 다시 사위까지 만들어낸다. 서왕 소조귀. 다시 그 후에, 이들의 자식들도 하나님의 손자뻘이 된다. 만일 하늘의 하나남이 알았다면 피를 토할 일이다. 이뿐아니라, 홍수전은 스스로 "부강절(父降節)", "동왕승천절(東王昇天節)", "가강절(哥降節)"등을 만들어 양수청, 소조귀등 개국공신을 기념한다. 성탄절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비록 태평천국과 우호적으로 지내고 싶어했지만, 그들은 홍수전등의 '제멋대로인 행위'에 대하여 우려와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공사인 Sir George Bonham(文翰)은 서신을 보내어 태평천국의 종교가 '위조된 계시'라고 지적한다. 비록 대체로 구약을 기초로 하지만, 이미 미신과 오류 성분이 침투하였다고 하였다. 예수는 말한 바 있다. 어떠한 죄도 사면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만은 사면받을 수 없다. 홍수전은 비록 하나님의 문하로 자처했지만, 이렇게 '홍기를 들고 홍기에 반하는' 이단의 조치는 그들을 가까이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양수청이 걸핏하면 '콰당'하고 땅바닥에 쓰러져서 자신은 '천부'의 하범이라고 얘기하는 황당한 일에 대하여 서방의 인사들은 더더욱 치를 떨었다. 이런 중국특색의 민간미신은 중요한 순간에 무식한 하층민중을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을 사칭하여 성언을 전하는 공연은 하느님을 마음대로 우롱하는 도구로 쓴다는 것이다.

 

1854년, 일부 영국인들은 천경에 의문을 제기한다: "홍수전은 자칭 예수의 동생"이라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동왕 양수청은 그들에 오히려 힐문한다: "너희 외국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신 시간이 길다고 얘기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배는 얼마나 큰지, 수염은 났는지? 수염은 무슨 색인지? 수염은 얼마나 긴지? 시는 쓸 줄아는지 아닌지? 예수 장남이 지금 몇 살인지? 예수가 자녀를 낳았는지 아닌지?...."이 50여개의 아주 구체적인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듣고 영국인들은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교의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홍수전은 기독교의식을 중국식으로 개조한다. 예를 들어, 배상제교의 포교는 홍수전이 중국식의 도사들의 포교방식에 따라 포교원고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운다. 어떤 때는 폭죽을 터트리기도 하여, 분위기를 들뜨고 활발하게 만든다. 나중에 포교에서 변화한 '강도리(講道理)'활동은 더욱 다양했다. 중국특색이 아주 분명했다.

 

청나라때 사람인 진휘언(陳徽言)의 <무창기사>를 보면, 무창점령기간동안, 태평군은 매일 사람을 보내어 열마장(閱馬場)에서 "강도리"활동을 벌인다. 매번 징을 치고 북을 두드려 사람들이 가서 듣도록 했다. 내용은 "천부공덕(天父功德)", "천왕근고(天王勤苦)", "동왕조로(東王操勞)"등이다. 모두 '천왕'을 따라 강산을 차지하여 천국의 복을 누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강도리'는 어떤 때는 서로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진휘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친히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항변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선교는 경전에 어긋나므로 반도라고. 태평군의 연설가는 변론으로 그를 이기지 못하자 화를 내고, '강도리'는 '불강도리'가 되어 그를 '오마분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붙잡아온 다섯 마리의 말은 '분시'의 전문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반나절간 고생했지만 사람을 다섯으로 나누지 못했고, 결국 그 연설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설대를 내려와 한칼에 그 '봉건위도사'의 목을 베었다.

 

배상제회의 교의에서 출발하여, 태평군이 공묘를 불태우고, 유생을 목베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진짜 교도들도 위험했다. 사경천은 <홍수전과 태평천국>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간 후, 최소한 30명의 진정한 천주교도들은 무기를 가진 동등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집에서 불태워지고 시신은 길거리에 내던져졌다. 다행히 살아남은 천주교도는 배상제회의 신도들에게 꽁꽁 묶여서 그들에게 자신의 기도의식을 따르도록 강요받았다.

 

비록 배상제회도 7일을 일주일로 규정했지만, 홍수전은 별도로 태평력(1년이 366일)을 반포한다. <성경>도 홍수전은 마음대로 뜯어고쳤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제9장중 일부 중국예법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은 삭제해버린다. 당연히 홍수전이 스스로 만든 '교의'가 모조리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술과 아편을 금지하는 내용등은 쓸모가 있다.

 

<원세경세훈>에는 홍수전이 이렇게 선전한다. "천하의 많은 남자들은 모두 형제이다; 천하의 모든 여자들은 모두 자매이다." 그러나, 홍수전이 가장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부분은 바로 그가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말다르고 행동다르다는 것이다. 이 오점은 역사의 먼지를 걷어낸다고 하여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평천국은 등급이 삼엄했다. 특권현상이 아주 심각했다. 비록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하지만, 성고제도(聖庫制度)하에서 고위층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평등'했다. 그들의 생활은 황음하고 사치했다 확실히 '어디서나 배부르고 따뜻했다'  그러나, 하층민중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집단공급생활을 하였다. 혁명초기에 '남녀를 구분하여' 가정을 해체시키고, 일만민중들은 결혼하고 가정을 가지는 것도 금지당한다. 천왕, 동왕, 익왕등은 여러 처첩을 거느린다. 심지어 홍수전의 아들이 십세된 '소천왕'도 4명이 부인을 얻는다.

 

태평천국은 '남녀평등, 부녀해방'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녀들의 발은 해방되었지만, 그 목적은 일을 시키고 전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해방된 부녀는 힘들게 일하다가 죽었다. 더욱 악랄한 것은 천왕이 어떤 때는 부녀를 하사품으로 내렸다는 것이다. 전투에 힘을 쓴 남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여색에 대하여, 홍수전은 강력한 기호를 지니고 있었다. 금전의거때 15명의 비를 거둬들이고, 영안위성때는 36명의 비를 받아들인다. 무창기간에 '10여세를 넘고 용모가 뛰어난 자 육십인'을 거둔다. 천경에 이르러서는 미녀를 널리 모은다. <강남춘몽필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왕부에 애낭, 희낭, 묘녀, 교녀등 16개의 명위에 모두 208명이 있었다. 24명의 왕비의 아래에 택녀, 원녀등 7개 명위의 모두 960명이 있었다. 비빈만 1168명이었다. 여기에 궁중에서 일하는 여관(女官)까지 더하여 모두 2300여명의 부녀가 천왕부에서 홍수전을 모셨다. 천왕부는 태감을 써본 적도 있다. 그러나 거세기술은 복잡하여 한번에 80명을 거세했는데, 77명이 죽었다. 나머지 3명도 폐인이 된다. 그래서 포기하고 만다. 

 

여인들은 궁에 들어간 후 천왕 홍수전을 위하여 전방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에, 조심해야할 것이 많았다. 천왕부는 원래 양강총독아문을 기초로 만든 것이다. 규모는 커서 방원 10리에 이르렀다. 1853년부터 1861년까지 공사하여 겨우 절반을 완공한다. 1853년부터 천왕부에 들어간 후, 딱 한번 동왕부로 가서 양수청을 만세에 봉한 것을 제외하고는 홍수전이 죽을 때까지 천왕부를 나오지 않는다. 여인국에서 이런 향락을 누리다 보니 천경이 위급할 때, 이수성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고 요청해도 죽을 때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홍수전과 천국의 타락에 대하여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내심으로 불안해 했다. 특히 나효전, 정위량은 <화갑회억>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효전은 나중에 갖은 방법을 써서 천경을 방문한다. "그러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태평군내부가 극히 부패해서인지, 아니면 나효전이 원만하게 일처리를 잘하지 못해서인지는 모른다....혹은 그가 침폐의 방식을 쓰고 그들이 발명한 세례의 신방식을 쓰지 말도록 권하여 그들을 분노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어떤 일이 일어났건 그는 금방 그들과 다투게 되고, 부득이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망쳐야 했다."

 

1860년, 나효전은 천경에 도착한 후 환대를 받는다. 그리고 좋은 집고, 맛있는 음식과 풍성한 급여를 받는다. 그외에 홍수전은 그에게 3명의 처를 내린다(물론 그는 받지 않았고, 그냥 화려한 관복만을 받는다). 그러나 홍수전은 예전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물은 바 있다: "외국인 나효전은 진심으로 성의가 있는가?" 나효전이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홍수전이 접견할 때 그에게 무릎을 꿇는 예를 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가 막 거절하려고 할 때, 돌연 터져나온 명령에 멍해진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은 후, 그도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1862년, 나효전이 천경에서 도망친 후, 그는 분노하여 서신을 써서 신문사에 보낸다. 서신에서는 홍수전을 "미치광이이고 통치자가 되기에는 완전히 부적절한 인물이고, 조직적인 정부는 절대로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천경으로 가기 전에는 홍수전을 "순결무하(純潔無瑕)한 인물"이라고 하였었다.

 

태평천국의 철저한 실패에 해다여, 해외사학자인 사경천은 조롱하여 말한다: "천왕 홍수전의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무런 상심했다는 흔적을 내놓지 않았고, 홍수전의 형이라는 예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천부천형이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홍수전의 연극을 일찌감치 알아봤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