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홍수전)

황당무계한 태평천국

by 중은우시 2012. 3. 2.

글: 원등비(袁騰飛)

 

태평천국은 정말 중국근대사상 한편의 코미디극이라 할 만하다. 무슨 종교이든 사랑을 주장하고 살생을 금지한다. 그러나, 홍수전은 달랐다. 그가 창립한 종교는 배상제교(拜上帝敎)라고 하는데, 목적은 반정부이다.

 

중국민족혁명의 거대한 흐름은 약 200년간 기복이 있었다. 태평천국이 마침내 양광(광동,광서)지구에서 거대한 파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나름의 심층적 원인이 있다. 영국은 원래 광동에서 오랫동안 압박을 받아와서, 광동정부와 광동인민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어렵사리 전쟁에서 승리하자 현지의 인민에 대한 착취는 아주 심하게 된다. 이렇게 쌓인 원한이 아주 깊었다. 게다가 광동인민은 민족감정이 강하고, 성격이 강인하다. 제1차 아편전쟁부터 광동인민은 자발적으로 삼원리평영단을 조직하여 영국군을 공격한다. 지방관리들은 인민을 억누르고 외국의 말은 잘 따랐다. 광서는 광동과 이웃하고 있어서 양광지구의 사람들은 영국을 미워하고 관리를 미워하는 일이 많았다.

 

가장 앞서서 자본주의의 압박을 받은 양광지구는 인민들이 한편으로는 외국세력에 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부에 반항했다. 이것은 점차 또 다른 자각으로 이어진다. 양광은 혁명의 발원지가 되고, 일정한 민중기초가 있었다. 양광지구에서 민간자발조직이 영국군을 공격하는 활동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백성은 관리들 두려워하고, 관리는 양귀(洋鬼)를 두려워하고, 양귀는 백성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돌았다.

 

광동은 상대적으로 비교적 발달한 곳이다. 광동인들은 진정한 기독교를 접해보았다. 그래서 홍수전이 말하는 것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광서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전도한다. 양광지구는 조정과 외국인에 대한 원한이 깊었으므로 일촉즉발이었다. 홍수전이 일을 벌이기 좋은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1851년, 홍수전이 금전의거를 일으키기 전에, 조정은 밀고를 받는다. 그래서 전 운귀총독 임칙서로 하여금 반란을 평정하도록 파견한다. 당시 임칙서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명령을 받은 후 밤을 새워 떠나나 병세가 악화된다. 아들은 나이든 부친이 안쓰러워 휴식을 권한다. 임칙서는 "내가 신강에서 이만리 빙천설지를 다니면서도 몸에 창을 들고 한번도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다. 지금 어찌 힘든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대련을 하나 쓴다. "구리국가생사이(苟利國家生死以), 기인화복피추지(豈因禍福避趨之)" 그리고는 갈 길을 서둘렀다. 병구를 이끌고 급히 길을 떠난 임칙서는 결국 도중에 죽고 만다. 임문충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 홍수전 일당은 흩어져 도망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임문충공이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금전의거후, 홍수전은 태평천국이라고 국호를 정한다. 촌(村) 하나를 얻고는 건국한 것이다. 이것은 대실책이다. 바로 조정의 주목을 끈다. 이것은 도적무리가 개나 닭을 훔쳐먹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반혁명이고 정부전복을 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조정은 즉시 병마를 모아서 진압을 개시한다.

 

홍수전은 이리저리 싸우면서 향(鄕) 하나를 차지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한다. 촌 하나를 차지하고는 건국을 하고, 향 하나를 차지하고는 천왕을 칭하다니, 그리고 천왕을 칭했을 때, 그의 비빈이 36명에 이른다. 무엇이 사교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재물을 빼앗을 뿐아니라 여인도 빼앗는다. 그렇지만 그 지방의 여자들이야 별 것이 없었다. 나중에 홍수전은 비빈이 80여명에 이르는데, 다 알아볼 수가 없어서, 번호를 붙인다. 1호비, 2호비...완전히 숫자화관리에 들어간 것이다, 청나라때 비빈이 가장 많았던 건륭제도 기껏 50여명에 불과했었다.

 

태평천국은 일부다처제를 실행한다. 태평천국의 주요지도자인 양수청은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형제들이 처첩을 둔다. 혼인은 하늘이 정한다. 몇명을 둘 것인지도 하늘에 따른다." 천왕 홍수전이 가진 처첩의 정확한 숫자는 기록되어 있다. 태평천국의 여러 인사들이 공술에 따르면, 홍수전은 여색에 빠져있었다. 1864년, 상군이 남경을 점령할 때,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이 포로로 잡힌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현재 나이 16살이다. 노천왕은 나의 부친이다. 나는 88명의 모후가 있다. 나는 두번째 뇌씨(賴氏) 소생이다. 내가 9살때 4명의 처를 주었다." 천왕은 88명의 후비가 있었다. 이미 역대봉건제왕의 삼궁육원칠십이후비의 인원수를 넘어선 것이다. 천왕은 매일 여인들 틈에서 지낸다.

 

남경을 함락시킨 후의 홍수전은 반벽강산을 손에 넣은데 만족한다. 그래서 자신의 천자생활을 누리는데만 신경쓴다. 천왕은 41세에 남경으로 들어간 후, 1864년 6월 52세의 나이로 자살할 때까지, 11년간 한번도 남경성을 나가본 적이 없다. 장년의 홍수전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수하들에게 맡겨둔다. 적과의 전투를 지휘하지도 않고, 조정의 일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남경에 주둔한 후, 홍수전은 매번 생일때마다 부하 몽득은(蒙得恩)은 그에게 6명의 미녀를 바쳤다; 매년 봄에 꽃이 필때면 몽득은은 남경의 13개 성문앞에서 미녀선발을 했다. 나중에는 아예 명문으로 규정한다: 모든 젊은 여자는 천왕의 선발에 응해야 한다. 1861년, 태평천국이 강소, 절강에 들어갈 때, 홍수전은 이수성이 뽑아서 보낸 3000명의 미녀중에서 180명을 골라서 천왕부로 들인다. 천왕부에는 가로세로 8척짜리 대조화상(大雕花床)이 있었는데, 무엇에 쓰는 건지는 말하지 안아도 될 것이다.

 

홍수전이 모두 몇 명의 여인을 가졌는지는 아마도 영원히 통계낼 수 없을 것이다. <강남춘몽필기>라는 책에 따르면, 천왕부에는 태감도 없었다. 비빈에 일하는 여관(女官)까지 합하면 모두 2300여명의 미녀가 홍수전 1명을 모셨다고 한다.

 

홍수전은 비빈의 관리에서도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88명의 후비는 모조리 봉호를 받고 모조리 처로 칭했다. 처첩이 너무 많으므로 홍수전은 그녀들의 성명조차도 기억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녀들을 부를 것인가? 홍수전은 고금중외 후궁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벌인다. 숫자로 일련번호를 매긴 것이다.그래서 제25처, 제73처등 고금에 듣도보도못한 명칭이 나타나는 것이다. 수천의 꽃처럼 예쁜 궁녀들은 처첩보다도 등급이 낮은 향락도구이다. 그래서 숫자조차도 부여하지 않았다. 홍수전은 조정을 신경쓰지 않는다. 모든 정력을 후궁관리에 쏟았다. 후궁의 여인들은 감히 천왕을 화나게 하지 못했다. 태평천국의 성립초기, "천하의 남자들은 모두 형제이고, 천하의 여자들은 모두 자매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웠었는데, 이것은 웃기는 말이다. 증국번은 이 적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절대로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고심을 거듭하여 토벌하려는 대상이 매일 밤낮으로 향락을 누리며 여인들과 술마시고 노래부르며 지낼 줄은.

 

영안에서 홍수전은 부하들에게 후한 상을 내린다. 5명의 "왕(王)"을 봉한다. 아마도 이렇게 봉왕하는 명칭은 그가 극을 보고 생각해낸 것일 것이다. 문맹인 양수청은 '동왕'으로 동방각국을 관제한다. 여기에는 일본이 포함된다. 방회의 우두머리인 소조귀(蕭朝貴)는 "서왕"이 되어 서방각국을 관장한다. 영국이 그의 명령을 들을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군사 풍운산(馮雲山)은 '남왕"으로 당연히 말레이시아도 그의 관할이다. 지주 위창휘(韋昌輝)는 '북왕'으로 러시아도 그가 관할한다. 마지막으로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이다. 석달개는 태평천국내에서 학력이 가장 높다. 그는 무과과거출신이다. 그는 시도 쓸 줄 안다고 한다. 홍수전은 IQ가 너무 낮았다. 군웅을 이끌 재능이 없었다. 그의 친구인 홍대전(洪大全), 모사 풍운산, 용장 소조귀가 모두 전사하자 그는 영혼을 잃는다. 홍수전은 양수청이 대권을 독단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듣도록 한다. 천왕은 만세, 동왕은 구천세, 서왕은 팔천세, 남왕은 칠천세, 북왕은 육천세, 익왕은 오천세이다. 이것이 소위 태평천국의 "수의육걸(首義六傑)"이다.

 

태평천국은 계속 북진하여 홍수전의 부하가 남경을 점령한다. 그리고 천경(天京)으로 명칭을 바꾸고 도성으로 삼는다. 이때 홍수전은 50만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전선이 만 척이 넘었다. 그가 광서의 촌구석에서 남경까지 진격해온 것은 직도황룡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다.

 

홍수전이 만일 전군을 북상시켜, 북경을 함락시켰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홍수전에게 그런 정치적 지혜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남경까지 간다. 남경은 육조고도이다. 홍수전은 이 곳은 천당이라고 여긴다. 천당로는 이렇게 시작되고 만들어진다. 홍수전은 호화로운 천왕부를 짓게 하는데 면적은 북경의 자금성을 모방한다. 홍수전은 겨우 3개의 도시, 남경, 진강, 양주를 점령하고 이렇게 큰 천왕부를 만들었다. 백성들의 말에 소인배가 갑자기 돈을 벌게 되면 뭘 해야할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졸부의 행태와 심리가 나타난다. 천왕부를 지은 홍수전은 하루종일 조정은 신경쓰지 않고, 천왕부 안에서 비빈들과 어울리며, 남는 시간에는 '천서(天書)'를 쓴다. 그는 대신을 만나지 않았다. 대신들이 그를 만난다면 바로 그의 수준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조정은 동왕 양수청등이 관리했다. 부패정도는 놀랄 정도이다.

 

태평천국의 가장 하급관리는 양사마(兩司馬)이다. 모두 25명을 관장한다. 집을 나설 때는 4명이 가마를 든다. 25명중 절반을 여자라고 보면 나머지는 11명의 남자이다. 그 안에서 4명이 가마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들이 가마를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청나라의 관리는 칠품 지현이 2명이 드는 가마를 타고, 총독이 8명이 드는 가마를 타고 황제가 16명이 드는 가마를 탄다. 황제가 사망했을 때 관을 드는 경우는 128명이 든다. 홍수전의 가마는 64명이 들고, 양수청은 48명이 들었다. 그들이 남경성을 나서면 온 성이 계엄상태가 된다. 백성들은 등을 돌리고 그들의 의장대를 보지 않고 땅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의장대와 부딪치면 참수한다. 더 심하면 능지, 점천등(點天燈), 즉 몸에 기름을 부어 태운다. 이런 일이 많았다. 홍수전의 상상력은 아주 풍부했다. 형벌을 남용한다. 청나라조정은 대역무도일 때 비로소 능지를 하지 일바인들은 그런 형을 받을 자격도 없다.

 

홍수전은 포학무도했다. 그가 천왕이 되기도 전에, 자주 처를 때려죽이곤 했다. 남경에 들어온 후,   그를 화나게 해도 죽이고, 그가 화가나도 죽였다. 사람들은 그저 무릎을 꿇고 노기를 가라앉히라고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홍수전이 살계를 대거 펼칠 지도 몰랐다. 홍수전은 처첩, 궁녀에게도 그러했으니, 그가 적대시하고 그가 불만을 가진 상대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