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홍수전)

홍수전(洪秀全)은 왜 양수청(楊秀淸)을 제압하지 못했을까?

by 중은우시 2012. 6. 2.

글: 학길림(吉林)

 

태평천국의 전반기에 홍수전, 양수청 두 사람의 권력투쟁은 계속 존재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갈수록 격렬해졌다. 홍수전이 계속 열셰였을 뿐이다. 일국의 주군인 홍수전이 왜 양수청을 제압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태평천국의 신권(神權), 군권(君權), 상권(相權), 병권(兵權)의 각도에서 그 답안을 찾아보기로 하자.

 

4대권력중 가장 먼저 교차가 나타난 것은 신권이다. 홍수전은 '배상제회(拜上帝會)'의 창시자이자, 동시에 대외적으로 자신이 천부(天父)의 둘째 아들이며, 천부의 부탁으로 일반백성들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홍수전은 완전한 신권을 장악했어야 한다. 그러나, 1848년, 풍운산(馮雲山)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홍수전은 그 소식을 듣고 광주로 가서 구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배상제회는 일시에 주재인을 잃어 혼란이 발생한다. 이러한 긴급한 때에, 양수청, 소조귀(蕭朝貴)는 천부(天父), 천형(天兄)의 대변인으로 말씀을 전한다. 일정한 정도로 인심을 안정시켰지만, 문제는 신권에 교차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평소에 홍수전은 교주이고, 양수청, 소조귀보다 높지만, 일단 양수청이 천부가 하범하여 몸에 붙었다고 선포하고, 천부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 아들인 홍수전은 양수청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음으로 병권이 교차된다. 의거초기에 홍수전은 스스로 병권을 장악했다. 1851년, 홍수전은 <행영포배조>를 반포한다. 전, 후, 좌, 우, 중군 주장의 직권을 규정했다. 그런데, <천명조지서>에 이 조서를 수록할 때, 주석이 부가된다: "이것은 이전에 행영포배때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은 동왕(東王, 즉 양수청)의 장령(將令)을 따라야 한다." 이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홍수전은 기실 병권을 정식으로 양수청에게 넘겼다. 양수청은 병권을 장악하였지만,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그는 공공연히 군대내에 장령을 반포하여, 군영에서는 단지 장군령만 따라야 하고, 천자의 명을 듣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때부터, 천경의 내분까지, 양수청은 병권을 독단하고, 명령을 내린다. 이리하여 병권이 군권을 침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병권과 군권이 교차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리고 상권을 얘기하자. 전체 봉건왕조에서 황권과 상권의 갈등은 시종 존재했다. 명태조 주원장이 승상을 폐지한 후에야 바뀐다. 태평천국은 비록 재상을 두지 않았지만, 홍수전은 <영안봉오왕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상에서 봉한 각 왕(서왕, 남왕, 북왕, 익왕)은 모두 동왕(東王)의 절제(節制)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제'는 실제로 상권에 상당한다. 최소한 상권에 가깝다. 이에 이르러 양수청은 태평천국의 상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마지막으로 군권이다. 태평천국의 군권은 기실 별 볼 것이 없을 정도로 적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 자체가 바로 종교의 기초위에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천왕의 군권은 먼저 신권의 제약을 받는다. 일단 천부가 하범하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 위로는 국가대사로부터 아래로는 홍수전의 사생활까지. 일국의 군주인 홍수전은 수중에 병졸 한 명이 없었다. 게다가 양수청의 상권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므로, 홍수전의 실권은 일찌감치 모조리 빼앗긴 상태였다. 그저 군왕의 명목만 있을 뿐이다.

 

4대권력의 분배로 보면, 양수청이 신권, 군권의 실권을 장악하고, 병권, 상권의 전부를 장악했다. 그래서 양수청은 기실 태평천국의 진정한 군정대권을 장악한 셈이다. 빈자리만 가진 홍수전에 있어서, 그가 양수청과의 권력투쟁에서 시종 열세에 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