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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정덕제(正德帝): 황제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

by 중은우시 2012. 11. 17.

글: 장굉걸(張宏傑) 

 

1

 

27살이 되던 해, 황제는 더 이상 참지를 못했다. 그는 결정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변방을 한바퀴 돌고야 말겠다.

관문을 나서기 위해, 황제는 온갖 머리를 짜낸다. 팔월 일일의 새벽, 황제는 사전에 준비해둔 이미 낡고 헤어진 남색장삼으로 갈아입는다. 십여명의 일반백성복장을 한 태감과 함께 백성들과 섞여서 말을 타고 덕승문을 나선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난 이래 처음 북경성을 벗어난 황제는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보는 것마다 신기했다. 가면서 산과 물을 구경하며,말을 타고 6일을 갔다. 그러자 멀리 거용관이 보였다. 이곳은 몽골초원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앞장서서 길을 살피던 태감이 거용관의 앞까지 가서 보고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숭산준령의 사이에 높이 솟아있는 관문은 굳게 닫혀 있고, 병사들이 줄을 지어 서있고, 무기는 서늘한 빛을 뿜고 있었다. 거용관의 아래에는 서생의 기운이 넘치는 수관어사(守關御史) 장흠(張欽)이 날카로운 검을 가슴에 품고는 한가운데 정좌해 있었다. 학실히 황제가 북경성을 벗어났다는 소식이 여기에 전해진 것이다. 앞장섰던 태감은 평소에 북경성에서 통했던 위엄을 드러내며 장흠의 앞으로 간다. 그리고 큰 소리로 선포한다: "황제가 선부(宣府)를 순시하고자 하니, 장흠은 관문을 열고 영접하라."

 

백면서생 장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미복으로 북경성을 나서는 것은 조상대대로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런 황당무계한 행위를 저지하는 것이 어사인 자신의 기본적 책임이었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 태감에게 말한다: "너는 법도를 잘 알 것이다. 황제가 순행하는 이런 대사는 반드시 천하에 조서를 내려 고하고, 조상의 법도에 따라 먼저 어도를 만들고 다시 행궁을 만들고, 그 후에 완전무장한 난가가 법도에 따라 역을 하나하나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관하려면, 먼저 내각에서 내린 양궁의 어보가 찍힌 조서를 가져오라. 지금 너희가 청의소모에 경기(輕騎)를 타고 장행하는 것은 두 가지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하나는 황상을 사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법도에 어긋나게 출행하려는 것이다. 진상이 어떠하든간에 나는 그 명을 받들 수 없다."

 

태감이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장흠은 칼을 뽑아들고, "말을 더 하면 내가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말한다.

태감은 놀라서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말을 돌려 달려간다.(이 일은<명무종실록>권153에 실려있다)

 

태감의 보고를 들은 후, 황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억지로 뚫고 나가려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신변의 십여명으로는 수관관병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길을 꺽어 창평의 어마방(御馬房)으로 가서 하루를 놀고는 다음 날 우울하게 궁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등극한지 12년동안 문관들과의 계속된 투쟁에서 작은 하나의 실패일 뿐이다. 이런 좌절에 그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2

 

그는 대명왕조의 제10대황제이다. 원래 그는 대명왕조의 가장 복있고,가장 편안하고 즐길 수 있는 황제였다.

하늘은 그에게 직통의 넓다란 인생의 길을 닦아주었다. 대명홍치4년, 그는 대명왕조 133년이래 신분이 가장 귀중한 아이로 자금성의 중축선에 있는 교태전에서 태어났다. 그가 '가장 귀중하다'고 하는 것은 여섯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그는 황자, 황제의 아들이다. 둘째, 그는 황장자, 황제의 장남이다. 셋째, 그는 황후가 낳은 적장자이다. 넷째, 그는 황제가 혼인한 후 5년후에 전국의 백성들과 신하가 기다리고 기다리는 중에 태어났다. 다섯째, 나중에 유일한 동생이 요절하면서, 그는 황제의 독자가 된다. 여섯째, 대명개국133년이래, 여러가지 이유로 그 어느 황제도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라는 신분을 동시에 가지지 못했다. 즉, 그들은 황후소생이지만 황제의 장자가 아니거나, 혹은 장자이더라도 '서출'이었다. 이것은 종족예법을 가장 중시하던 대명황실에 있어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순조롭게 성장하여, 대통을 승계하는 것은 왕조개창이래 적장자의 신분으로 황제에 오른 첫번째가 되는 것이다. 이는 대명왕조에 있어서 대길대리(大吉大利)한 좋은 징조었다.

 

마치 그의 운명이 이렇게 남들과 다른 것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인지, 하늘이 그에게 준 출생일시도 유일무이하다. 만일 중국전통의 사주팔자로 따진다면, 그의 출생은 신시(申時), 유일(酉日), 술월(戌月), 해년(亥年)"이다. "신,유,술,해"는 마침 지지의 순서대로이다. 이런 사주팔자는 "관여연주(貫如連珠)"라고 하여, 대부대귀(大富大貴)한 상이다. 교묘한 점이라면 개국황제인 주원장의 사주팔자도 이처럼 "관여연주"였다는 것이다.

 

하물며 황장자는 생긴 모습도, "수질여옥(粹質如玉), 신채환발(神采換發)"했다. 아주 잘생겼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자주 울지도 않고, 웃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저 누군가가 웃기기만 하면, 그의 검은 두 눈동자는 바로 굴렀고, 반응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빨랐다.

 

출생한지 5개월만에, 황제가 성지를 반포하여 길줄도 모르는 이 영아를 황태자에 봉한다. 대명황조역사상 이는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황제는 아이에게 "후조(厚照)"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는 '조'를 붙여준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해가 비록 크고, 인민이 비록 많지만, 모두이 아이의 조림(照臨)하에 이게 될 것이다. 짐의 강산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명무종실록). 경사를 많이 읽은 신하들도 깊이 믿었다. 이 아이는 장래에 대명왕조에 전례없는 행운을 가져다줄 황제라고. 이미 9대황제의 경영을 거쳐, 대명왕조는 지금 전례없는 평온기에 들어섰다. 외환도 없고, 내우도 없다. 백여년동안 운영하면서 대명제국의 통치바퀴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이 영아의 미래운명은 바로 사평팔온(四平八穩)의 태평천자일 것이다.

 

홍치18년까지, 모든상황은 하늘이 안배해준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이 해에 홍치황제가 돌연 사망하고, 태자가 등극한다. 비록 14살이라는 나이는 황제의 업무를 하기에는 약간 어렸지만, 바로 이런 연령때문에 그는 전제정치에서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부자간의 반목시기, 궁정투쟁을 피할 수 있었고, 봉건정치의여러가지 태자의 후계를 방해하는 일들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신황제의 운이었다. 사람들은 특수한 '사주팔자'를 지닌 정덕황제가 그의 운을 국운으로 옮겨서, 만민들에게 안정되고 부유한 시대를 가져와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 일은 여기서부터 길을 벗어나고, 갈수록 더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사람들은 14살의 신황제가 황궁내에 거주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나흘이 멀다하고 남원으로 가서 매를 날리거나 말을 타고, 사냥을 한다.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권하기 전에 신황제는 다시 '혼자서 말을 타고 궁을 빠져나간다' 즉, 단기필마로 용의화포를 입고, 궁중을 빠져나간 대형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온 나라는 깜짝 놀라서 소동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황제의 일거일동은 모두 엄격하게 법도를 따라야 하고, 이처럼 호위도 없이 가볍게 외출하는 행동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정덕2년이 되자, 황제는 아예 대내에서 이사를 간다. 태액지(太液池)의 가에 표방(豹房)을 짓고 산다. 이때부터 황제가 거주해야할 건청궁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정덕9년, 사람들으니 북경의 홍등가이 한 극원에서 미복의 황제를 발견한다. 그리고 황제가 자주 미복으로 출궁하여 극을 감상한다는 말도 들린다. 이것은 사서에 명확히 기록된 황제의 미복출행의 첫번째이다.

 

정덕12년이 되어서는, 이 황제가 도대체 웬 일인지 모르겠지만, 금란전에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고, 자금성에 조용히 살지를 못했다. 마치 황궁대내에 그를 좌불안석으로 만드는 무슨 귀신이라고 있는 것처럼. 이 12년간, 그가 매번 도망칠 때마다 도망치는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처음에 백성과 신하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던 새 군주는 이제 전국인민들이 밥먹고 차마시면서 얘기하는 화제거리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정말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 황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왜 인간세상의 가장 화려하고 장중한 궁전에 거주하려 하지 않고, 굳이 호숫가의 조그마한 집으로 옮겨서 살려고 하는가? 왜 만승지존의 자리에서 향락을 누리지 않고, 혼자서 말을 타고 이곳저곳을 오가려 하는가? 왜 황제는 하루에 99개나 되는 요리를 먹지 않고 굳이 길거리로 나와서 길거리음식을 먹으려고 하는가? 왜 황실악대의 음악소리를 듣지 않고, 굳이 극원에서 저속한 극을 구경하려 하는가? 황가원림의 청유한 경치는 즐기지 않고, 굳이 장성바깥의 황량한 사막으로 가서 눈과 바람을 맞으려 하는가? 설마 그가 무슨 귀신에 씌이기라고 한 것인가?

 

3

 

북경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황제의 마음은 더욱 침울해졌다. 그는 학교에서 도망쳤다 돌아온 아이처럼, 다시 탁자와 서책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억지로 귀찮은 것을 참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으면서, 성가(聖駕)를 맞이하는 대신들의 예를 받고있었다. "인신불가일일무군(人臣不可一日無君)". 황제가 평안히 돌아온 것을 보고, 이들 대신들은 아이가 부모를 만난 것처럼(성년이 된 아이가 잃어버린 부모를 찾은 것처럼), 여자가 애인을 만난 것처럼(바람기가 넘치는 애인), 하나하나 얼굴에 기쁨을 띄고 큰 짐을 덜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만일 그의 생각대로라면 직접 덕승문에서 신무문으로 가고,바로 표방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쁨에 넘친 대신들은 이미 법도에 따라 가마를 준비해 놓았다.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려 어련(御輦)에 오른다. 417명으로 구성된 방대한 의장대가 호송하는 속에 정양문을 돌아, 대명문으로 들어간다. 오문, 태화문, 중우문, 우우문, 건청문....하나하나 지나가면서 한층한층 무거운 기운이 그의 머리 위를 덮어누른다. 황제는 익숙해진 꾹 참는 표정을 지으며, 진흙으로 만든 조각처럼, 그들이 시키는대로의 노정을 다 마친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표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몽상이나 광상을 가지고 있다. 만일 황제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대답할 것이다: 황제를 하지 않고싶다.

 

황제는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이다. 이것은 천하에 가장 널리 알려진 오해중 하나이다. 만일 반대로 말한다면 더욱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12년동안, 그는 꾹 참고 이 직업을 수행했다. 그가 보기에 태화전의 넓다란 자단목보좌는 그냥 특수하게 만든 형틀이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황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 황제는 전체 제국의 기기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규율에 맞게 움직여야 하는 부품이다. 그의 일상생활은 일련의 임무, 관례, 예의로 구성된 무거운 압박하에 진행된다. 마치 단조로운 시계처럼, 매월, 매일, 심지어 매시진 해야할 일이 있고, 모두 엄격한 일정에 따라 진행된다. 황제의 주요한 사회책임중 하나는 복잡하고 장중한 전례에 출석하여 주재하는 것이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땅에 제사지내는 것, 풍년을 기원하는 것, 태묘에 제사지내는 것, 사직에 제사지내는 것, 능에 행차하고, 책봉하고, 상을 내리고....이들 전례는 모두 역대이래로 답습되어 온 것으로, 날짜, 형식, 절차가 모두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년 원단이 되면 봉선전에 가서 조상에 제사지내고, 그 후에 후궁으로 가서 양궁황태후에 하례를 드린다. 그리고 어황전에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는다. 건청궁에서 붓을 들어 '정대광명'이라는 글을 쓴다. 정월에는 태묘에 제사재니고, 곡신에 기원하고, 외번에 연회를 베풀고, 가까운 종친에 연회를 베풀고,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이월에는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경전례(耕田禮)를 행하고, 경연을 연다...모든 이런 것을은 우리가 지금 보기에 가식적인 형식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전례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미가 중대하고, 천리인심에 관련되고, 천하의 치란에 관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규모가 거대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황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제단에서 몇 시진을 서 있어야 한다. 평상심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가볍지 않은 체력활동이다. 그리고 비범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보자면 황제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황제는 대명사회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놓여 있다. 예의와 질서의 상징이다. 황제를 둘러싸고 제정된 각종 번잡하고 엄격한 예의제도는 모두 신성불가침의 질서정신을 나타낸다. 의복을 입는 것을 예로 들자면, 궁내에 전문적인 자료중에 <천대당(穿戴檔)>이라는 것이 있는데, 황제가 매일 입는 복식과 악세사리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매 계절, 매 월, 매일 어떤 의복을 입을지 모두 엄격한 규정이 있다. 조그만치도 흐트러져서는 안된다. 심지어 하루 내에 황제는 반드시 3번이상 의복을 갈아이어야 한다; 상조(上朝)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하조(下朝)하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침전에는 침복(寢服)으로 갈아입는다.

 

식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식사 시간, 장소는 모두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후세황제들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게 하였다. 어선(御膳)의 식보(食譜)는 매일 내무부대신이 정한다. 매월 책으로 만든다. 매번 음식을 올릴 때면 황실의제에 따라야 한다. 요리는 거의 100종에 가깝다. 비록 대부분의 요리는 황제가 건드리지도 않지만. 그래도 반드시 올려놓아야 한다. 가까운 신하가 황제의 음식습관을 잘 알게 되면 안전에 불리하므로, 조종이 법도에 따라, 매 요리는 단지 3입씩만 먹을 수 있다...

 

심지어 잠자는 것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황제가 어느 궁에서 잠들 것인지는 모두 상침궁이 사전에 안배한다. 취침순서에도 엄격한 규정이 있다. 예를 들어 비(妃)는 반드시 황제의 발 아래에서 기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황제의 총행을 받는다. 황제의 총행은 규정된 시간 예를 들어 30분이 되면 문밖에서 기다리던 태감이 높은 소리로 외친다: "청만세야절로(請萬歲爺節勞)" 이것도 조종의 법도이다. 황제가 지나치게 힘을 쓰는 것을 막고, 몸을 지나치게 해치는 것을 막고, 다음 날 업무를 보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일정한 의미에 있어서,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죄수이다. 그의 형기는 무기이다. 모든 사람이 황제라는 이 자리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가장 최선의 인선은 초인적인 인내력과 자제력을 지닌 사람이다. 가장 좋긴로는 내성적인 성격에, 반응이 늦고, 혹은 나이가 이미 많아서 혈기가 누그러진 사람이다.

 

불행히도, 혈통이외에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후조는 황제의 적절한 인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