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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이우선(李又仙): 명나라때 경성에 이름을 떨친 남기(男妓)

by 중은우시 2012. 12. 22.

글: 양영춘(梁迎春) 

 

기녀는 중국고대의 정상적인 직업이다. 재색으로 이름을 떨친 기녀들도 부지기수이다. 남기(男妓)도 비록 동시에 존재했지만 극히 개별적인 현상이었다. 아마도 잘 모르고 있겠지만, 개방적인 명나라때, 관방기원이 있을 뿐아니라, 공개된 남기원(男妓院)도 있었고, 거기에서 경성에 이름을 떨친 유명한 남기를 배출한다. 뛰어난 기예와 자색으로 무수한 관리와 진사를 정복하였으니, 그는 남원(南院) 출신의 명기 이우선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이우선이 유명해진 것은 괴이한 일도 아니다. 명나라때 기원은 대부분 관방에서 관리했고 몰래 영업하는 민영기원은 아주 적었다. 명나라때 율법은 아주 엄격하였다. 명태조 주원장이 혹형으로 관리를 다스려 천하가 모두 두려워했고, 관이건 민이건 모두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법률에 저촉되지 않으려 했다. 명나라때 인민들이 번영과 부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주원장의 공로가 크다. 그러나 그후의 몇몇 황제는 점차 부패하기 시작한다.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려는 생각은 사라진다. 특히 명나라 정덕황제시기는 황음이 극치에 달하게 된다. 그는 표방을 지어서 음탕한 일에 썼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특히 미소년을 좋아했다고 한다. 황제마저도 남자를 좋아하니 그 아래의 관리들이 그 본을 받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명나라의 율법에 따르면 북경에서 근무하는 관리는 가족을 데려갈 수 없었다. 그리고 기녀를 찾아가서도 안되었다. 그리하여 동성애의 기풍이 날로 흥성한다. 남기원이 공개적으로 성립된 것도 이러한 요소와 관련이 있다. 무형중에 관리들의 성문제를 해결해준 것이다. 동시에 국고도 채워졌다. 한 단체의 기풍은 그 지도자의 행위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한 나라의 기풍은 황제와 관련이 없을 수 없다. 정덕황제의 음탕행위는 놀라울 정도였고, 남기를 공급하는 남원이 당당하게 세워지고, 그곳을 드나드는 관리들에 대하여도 아주 관대했다. 당시의 관리들은 모두 남기와 어울려 노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연히 어떤 관리들은 기녀들이 있는 청루(靑樓)를 드나들기도 한다. 청루가 단지 민간에만 개방되었다면 그렇게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확실히 관리들이 기녀를 찾기 어렵게 만들고, 또한 부정부패를 가속화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대세를 따르는 것이 좋으므로, 드러내놓고 기녀를 찾는 관리는 아주 적었다. 감히 청루를 찾지 못하고 그저 남원을 찾았다. 남기원은 이로 인하여 문전성시를 이루고, "남원"이라고 불린다. 이우선은 바로 이때 두각을 나타냈다.

 

이우선의 부친은 관리였다. 그는 부친이 전량(錢糧)을 북경으로 운송하는 것을 따라 북경으로 올라왔는데, 중도에 강도를 만나 재물을 다 빼앗기고 만다. 이우선의 부친은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게 되어 원래 죽음으로 끝내고자 한다. 이때 15살의 이우선은 부친에게 가산을 팔아서 손실을 메워주도록 권했으나, 여전히 100여냥이 부족했다. 이우선은 이런 상황하에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팔기로 결정한다. 남원의 어느 기원주인이 그를 사준다. 100냥은자는 적은 돈이 아니다. 이렇게 높은 가격을 받은 것을 보면 이우선의 용모와 기예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원주인이 큰 돈을 아끼지 않고 내놓은 것이다. 실제로 이우선은 관료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아서, 금기서화에 모두 능통했다. 특히 용모가 아주 뛰어나고 여성적인 특징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3년간 "첩"으로 지냈지만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우선이 남원에 들어간 후, 부친과 온집안이 굴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굴욕을 당하는 것은 감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풍월장소가 그다지 만만한 곳은 아니다. 남원의 관리는 아주 엄격하다. 남기가 약간만 손님에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하면, 바로 기원주인은 주먹과 발로 구타했다. 이우선은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거기의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다른 남기와 마찬가지로 여장을 하고 마음 속으로 원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자매로 호칭했다. 그는 석달만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고 1년이 지나서는 온 경성에 이름을 떨친다.

 

존엄과 원칙이 없다면 천당에서 생활하더라도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하물며 풍월장소야. 이우선이 남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광(匡)씨성의 젊은이 덕분이었다. 그가 사람을 찾아서 부탁을 하고, 관청을 통하여 남원에 압력을 넣고, 기원주인에게 돈을 집어주고서야 이우선을 기원에서 빼낼 수 있었다. 이우선이 고해에서 빠져나오게 되니 그가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이를 갚고자 했고, 첩으로 3년간 지낸다. 이것은 기실 기형적인 연애이다. 그러나 당시에 성행하던 남기의 기풍과 비교하면 별 것도 아니다. 이우선은 이렇게 여장남자로 광씨집안에 들어가고 3년간 약속을 잘 지킨다. 광씨집안의 상하는 모두 그가 여자로 알고 속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광씨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이우선은 그의 아들을 성인으로 잘 기른 후, 남자의 몸으로 회복하여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명나라때 남기에 관한 역사기록은 아주 많다. 민간의 이야기는 더욱 많다. 당시에 성행한 남기의 기풍은 민중의 심리에도 상흔을 남긴다. 이우선의 이야기는 바로 대명왕조의 국운이 상승하다가 하락하는 전환기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