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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침구(針灸)의 북경중의학계에서의 지위변천

by 중은우시 2013. 4. 27.

글: 장위동(張衛東) 

 

서언

 

옛날의 북경은 비록 경사(京師)였지만, 선진과학의약사업은 아주 낙후되었다. 조부인 장진계 선생은 중의아과(兒科)에 뛰어났고, 부친 장진계 선생은 북경동인당의 피부과전문가였다. 그래서 필자는 어려서부터 제세량의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침구"는 구북경중의계에서 정통유의(儒醫)나 당의(堂醫)가 중시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향의(鄕醫, 시골의원)나 영의(鈴醫. 떠돌이의원)가 가장 능한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나, "침구"연구서적은 모두 유의들이 만들었다. 그런데 왜 '침구'에 능한 의원은 향의나 영의가 많았을까? 이런 의원들은 글을 약간밖에 모르거나 일부는 아예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치료경험은 뛰어났다. 그들은 "침구'기법에서 정교한 절기를 지니고 있다. "침구"는 구북경중의계에서 여러번 변천을 겪는다. 청나라때 '침구'를 폐지한 연유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지금 '침'은 상용되나, '구'는 거의 쓰지 않는다.

 

침구는 두 가지 치료방법이다. "침"과 "구"는 상호보완적이면서 상호배타적이다. "침"은 각종유형의 침류의 공구로 혈도를 찔러넣거나 압력을 가해서 치료하는 것이고, '구"는 가연소물을 혈도위치에 대하여 태우는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숙 혹은 기타 가연약물을 사용한다. 그리고 침으로 찌르는 동시에 쑥을 침에서 타게 하여 혈도에 열을 전하는 치료방법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침구"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침구치료는 상고시대 복희씨기 발명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상미백초이제구침(嘗味百草而製九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당시의 침은 '돌'로 만든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점차 뼈, 대나무에서 금속침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폄석(石)"진료의 전고에서 전해져 내려왔다. 이렇게 돌을 침으로 하여 혈도를 찌르는 것을 "폄자(砭刺)"라고 불렀다. '구법(灸法)"은 인류가 불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타났다. 침과 구의 배합사용은 원시적인 질병진료방법에 또 한단계 발전한 것이다.

 

진한이래 고전의학저작에서 침구를 연구한 기록은 많다. <황제내경>의 경락순환 및 병후, 수혈, 침구방법등의 장절이 있다; <영추>에는 침구에 관한 치료방법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인 이론이 있다. 그래서 이를 <침경>이라고도 부른다.

 

한나라때의 <황제팔십이난경> 및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은 모두 일찌감치 침구를 기록한 이론고서적이다. <상한잡병론>에는 많은 침구처방이 있다. 침구와 용약(用藥)을 배합하여 치료했다. 이때부터 침구학은 용약이외의 가장 중요한 과목이 된다. 이론전적도 갈수록 풍부해지고, 역대에 부단한 연구로 완성되었다. 위진시대의 <침구갑을경>을 표지로 하여, 침구학은 의료에서 지위를 확보한다. 이것은 기념비적인 의학저작이다. 갈홍이 편저한 <주후비급방>은 대량의 페이지를 구방구십구조를 소개하고, 구법의 임상응용을 연구한 서적이다.

 

당나라때는 침구를 가장 중시했다. 여러 이론전적이 출현하여 후세에 고귀한 의학경전을 남겼다. 이세민은 명을 내려 견권등 의학명가들에게 전인들의 침구전적을 정리하도록 명령한다. 손사막의 <비급천금요방>, 왕도의 <외합비요>, 최지체의 <골증병구방>등은 모두 침구에 관한 이론서적이다. 당나라때의 태의에는 침구과를 설치했고, "침박사 1인, 침조교 1인, 침사 10인, 침공 20인, 침생 20인을 두었다." 침구의 지위를 거의 용약과 동등한 경지로 끌어올렸다.

 

오대이후, 치구학은 거의 의원의 필수과목이 된다. 요, 송, 금, 원시기의 태의원에는 "침"과 "구"의 두 과를 두었다.

 

송나라의 왕유일은 경혈방면에서 354개를 확립하고, <동인수혈침구도경>을 저술하고, 두 개의 동인(銅人)을 만들어 침구혈도를 연구하는데 참고하게 했다.

 

금나라의 하약우는 "자오유주침법"을 창립하고, 마단양의 "천성십이혈", 두한경의 "팔맥교회혈"등은 모두 침구에 대한 뛰어난 침법이다. 원나라때의 활백인은 <십사경발휘>를 저술했다.

 

명나라때는 이전의 침구전적을 계속 정리연구하였고 저술이 풍부했다. 침을 놓은 방법에서 게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진회는 <신응경>을 저술하고, 서봉은 <침구대전>을 저술했으며, 고무는 <침구취영>을 저술했고, 양계주는 <침구대성>을 저술하고, 오곤은 <침방육집>을 저술하고, 왕기는 <침구문대>를 저술하고, 장개빈은 <유경도익>을 저술하고, 이시신은 <기경팔맥고>를 저술했다. 이런 서적은 침구학을 높이 끌어 올렸다. <침구대성>은 침구학의 모든 문학을 종합한 것이다. 명나라때의 침구는 북경에서 아주 활발했던 학문이다. 관방이건 민간이건 모두 그 신비한 혈위에 대하여 농후한 흥취를 발생시켰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의학중 하나이다.

 

청나라는 북경중의침구의 재난시대이다

 

청나라 건륭이전의 침구발전은 상대적으로 평온했고, 기본적으로 명나라이래의 전승상황을 유지했다. 당시의 태의원에는 대방맥과, 소방맥과, 두진과, 상한과, 부인과, 창양과, 침구과, 안과, 구치과, 인후과, 정골과등이 있었다. 다만, 가경3년(1797년)에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다. 두진과와 소방맥과가 합병되고, 구치과와 인후과가 합병되어 구치인후과가 된다. 수백년동안 11과는 9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중국이 봉건에서 반봉건반식민지사회의 과도단계이다. 태의원은 이 시기에 여러가지 일을 겪는다. 가경6년(1802년), 정골과를 상사원 몽군기 탁반장 응차로 보내어, 정골이 비록 의과이지만, 말을 기르는 아문에 속하게 되었다. 도광2년(1822년), 태의원 침구과는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침구과는 영원히 정지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침구과가 내정 및 관방에서 소멸된 화근이다. 다만, 왜 침구과를 없애고 영원히 정지시켜야 했을까? 지금도 이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태의원지>의 기록에 따르면, "명을 받든다: 침구법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침을 찌르고 불로 태우니 이것은 군왕의 적절한 것이 아니다. 태의원 침구과는 영원히 정지시킨다." 이것은 도광제가 침구과를 없앤 원인이다. 설마 그는 침구가 치료에서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침구에 대하여 두려워했단 말인가. 현재, 우리는 아직 믿을만한 자료가 없다.

 

다만 황제가 침구를 무서워한 것은 도광제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역대왕조의 군주는 모두 자신의 생명을 특히 아꼈다. 삼국시대의 화타는 조조의 병진료에 침을 썼다. 치료효과는 아주 좋았지만, 조조는 의심을 품었다. 피해를 당할까 우려해서, 화타에게 독수를 쓴다. 이로써 추단하면, 도광제가 침구과를 없앤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 성지는 '침구법이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침으로 찌르고 불로 태우므로 이것은 군왕에 적절한 바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폐지했다. 이것은 아마도 침구를 두려워한 대문일 것이다. 그래서 당당한 이유로 내세운 것은 다 헛소리일 수 있다. 아마도 도광제가 가경이 두 번이나 암살을 당한 것을 보고 거기에 그는 의심이 많은 황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황실구성원 및 고관대작들도 침구를 두려워했다. 침구의 북경에서의 지위는 일락천장이다.

 

이때 사회환경변화 및 서방의학이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되면서, 중의는 그저 용약에서 노력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침구의 발전은 점차 정체된다. 청나라때 침구를 편찬한 전적으로 보면, 전조의 여하한 시대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침구학이 발전을 못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심지어 배척되어 골상안마과등 과목보다 못하게 취급되고, 결국 가전의 향의나 떠돌아다니는 영의계들이나 하는 과목이 되었다.

 

침구과는 비록 내정 및 고위게층에서는 소실되었지만, 민간의 전승은 지속되었다. 침구과는 태의원에서 영원히 폐지되었지만, 그래서 그후의 태의원에서 다시는 전승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북경의 모든 정통유의와 일부 당의는 대부분 침구에 능하지 못했다. 후세의 유의들은 심지어 침구를 배척하는 습관까지 생긴다.

 

1912년, 선통제가 황제에서 물러나고 민국이 들어서면서, 북경의 침구는 약간 호전된다. 일부 가전향의와 경혈에 뛰어난 당의들은 침구를 이용하여 치료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평민계층이 많았다. 관리계층 및 규중여성환자들은 여전히 침구치료를 받지 않았다. 1930년이후, 침구로 치료하는 것은 북경성내에서 점자 대부분 환자 맟 유생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침구과에 종사하는 의원들의 문화수준은 보통이었다. 침구치료방면에서는 임상치료에 국한되었고, 약물배합치료 및 학술연구방면에서는 여전히 박약했다. 북경의 당시 가장 저명한 침구의생은 왕락정(王樂亭)선생이다. 그의 의원은 선무문밖 교장육조에 있었다. 매일 환자가 끊이지 않아서, "금침왕락정"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해방후, 침구과는 북경중의계에서 신속히 발전한다. 국가의학원에 정식학과를 설립했을 뿐아니라, 그리고오랜 장기간 민간에서 의술을 행사던 노의원들이 국영의료단위에 받아들여진다. 기본의학교육을 받은 후 다시 계획적인 안배에 따라 임상과 교학에 투입된다. 그리하여 많은 청년의료종사자들이 침구의료를 배울 수 있었다.

 

농촌적각의생을 보급할 때, 북경성 교외의 모든 의원은 거의 모두 침구요법을 배웠다. 다만, 이렇게 한꺼번에 보급하는 것은 독특한 침구기법의 실전을 가져온다. 예를 들어, 아동치료방면에서 '피침' 그리고 대침으로 혀를 찌르는 구급방법등이 실전된다. 나중에 호침자법(毫針刺法)이 천하를 통일하고, 구법은 점차 감소한다.

 

문혁말기 북경중의계에서는 다시 한번 침구기법혁신의 기풍이 일어난다. 많은 의원은 각종 소위 '전침(電針)'을 연구제작한다. 성전파전침법, 전화침법, 미파침법등이 가장 자주보는 것이었다. 1980년이래 외래선진의료기기의 응용으로, 소위 '격광침' 치료가 나타난다. 혈위격광조사법, 혈위첩부법, 혈위매선법, 혈위자료법, 혈위주사법등이 있다. 나중에는 각종 창신복고등 여러가지 침법이 나타난다. 이침법, 두침법, 안침법, 수침법, 족침법, 완과침법등이 가장 인기있는 것이었다. 근래 침구명가 하보인(賀普仁) 선생은 60년 의료종사경험으로 '하씨침구삼통법"을 만들어낸다. 치료효과가 좋을 뿐아니라, 침구의 옛법을 따른다.

 

최근들어 사람들은 에이즈가 혈액으로 전염된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환자들은 침구치료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청년환자들은 침구치료를 선택하지 않는다. 1차적인 침구를 사용하는 것은 의원들에게 불편을 준다. 동시에 직접적으로 치료효과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현재 북경의 침구과는 아마도 또 한번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장래의 침구가 어떻게 변모할 지는 우리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망이 어떠할까, 계속 침구를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기법에 신경을 쏟을 것인가. 우리는 침구가 세계의 비물질유산이 되는 것을 아주 두려워한다. 생각해보라 만일 유산이 된다면 중의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