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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중국역사상 "의신(醫神)"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by 중은우시 2013. 5. 23.

글: 손옥량(孫玉良)

 

중국역사상 뛰어난 의술로 "신의"라 불리는 사람은 적지 않다. 편작(扁鵲)이후, 화타(華佗), 장중경(張仲景), 손사막(孫思邈), 이시진(李時珍)등의 사람 내지는 TV드라마에 나온 "희래락(喜來樂)"등은 모두 세상사람들에 의하여 신의(神醫), 약왕(藥王)의 명예를 받았다. 소위 '신의'는 의술이 고명하여 출중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도 어쨌든 사람이다. 다만 '의신'은 다르다. 한 사람이 '신'으로 존칭된다면, 그의 지위는 이미 지고무상한 것이다.

 

 

따져보면, 가장 먼저 세상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유명해진 사람은 "염황이제(炎黃二帝)"중의 "염제(炎帝)"이다. 염제는 신농씨(神農氏)라고도 불린다. 신농씨가 백초(百草)를 맛보았다는 이야기는 세상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는 백초를 모두 맛보겠다고 맹세한다. 그가 맛본 것은 화, 초, 근, 엽이 삼십구만팔천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루에 칠십번 독을 만나고" 결국 그는 단장초(斷腸草)를 먹고 죽었다. 이치대로라면 신농씨가 의신으로 불리워도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염제는 중화민족의 시조이다. 의학상의 공헌이외에, 그는 "뇌사(耒)를 만들고, 오곡을 심었으며, 시전을 세우고, 시장을 처음 열었다. 마를 가지고 베를 만들어 사람들은 의복도 입게 된다. 오현금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나무를 깍아 활을 만들어 천하에 위엄을 떨친다. 도기를 제작하여 생활을 개선했다...."인류생활의 신세기를 개창하였다. 염제는 '전능신'이다. 옥황상제와 가같은 신령이고, 단순한 '의신'이 아니다.

 

염제의 이후, 또 다른 중화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시기에 명의가 나타나니 바로 편작이다. 그는 곳곳을 다니며 의술을 행하고 병자를 구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즐거움과 편안함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의원을 그들에게 즐거운 소식을 가져다 주는 까치(喜鵲)에 비유한다. 산동에서 출토된 한나라때의 석각을 보면, 고편작의 이미지가 있다. 그는 사람의 손, 사람의 얼굴을 하고, 머리에는 관적을 쓰고, 새의 몸에 짐슴의 다리를 하고, 긴 꼬리를 달고 있다. 이를 보면 고편작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편작의 명성이 널리 퍼진 것은 이 편작때문이 아니다. 황제시기에서 다시 삼천년이 지난 이후인 춘추전국시대에 하북 임구 사람인 진월인(秦越人)이 있는데, 이 진월인은 의술이 고명하고, 의덕이 고상하여, 사람들은 황제시기의 명의 편작의 명호로 그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편작의 이름은 크게 떨쳐진다.

 

진월인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였기에 이렇게 세상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까? 그는 내과 ,외과 ,부인과, 오관등 과에 능했고, 폄자(砭刺), 침구, 안마, 탕액, 열위(熱熨)등의 방법으로 질병을 치료햇고, 망, 문, 문, 절(望聞問切)의 진단방법을 창조한다. 중의 임상진당과 치료방법의 기초를 그가 닦았다. 그는 부끄럼없는 중의의 개산비조이다. 다음으로 진월인은 의술이 고명하고, 의덕이 고상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세상에 남겼다. 모두 널리 알려진 편작이 채환공을 만나고, 편작이 진무왕의 병을 치료하고, 편작과 위문왕이 의술을 논하고, 편작이 멱태자를 기사회생시킨 등의 이야기는 현재까지도 사람들이 많이 들어 익숙한 것이다. 셋째, 편작의 병치료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위로는 국왕에서, 아래로는 보통백성들까지 모두 치료해주었다. 그는 일생동안 사방을 돌아다니며 의술을 행한다. 족적은 당시의 중국 판도의 거의 절반을 장악한다. 사후에 하북 임구, 하남 탕음, 산서 영제, 섬서 임동, 하북 형대, 산동제남등지에 모두 편작묘를 건설한다. 이를 보면 사람들이 그에게 얼마나 존경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넷째, 편작은 1천여년전의 송나라때부터 의사들에 의하여 '의사지사(醫師之師)"라고 불린다. <송사>의 송인종이 한 때 몸이 좋지 않았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송사>에는 송인종의 몸이 하루는 좋지 않았는데, 허희가 침구로 송인종을 치료했다. 송인종을 감사표시로, 허희를 '의관'으로 들어오도록 추천하고 큰 상을 받는다. 허희가 송인종과 헤어진 후, 다시 서쪽을 향하여 절한다. 송인종이 그 연유를 묻자, 허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근본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 편작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허희는 송인종에게 간청한다. 그가 편작에게 준 하사품으로 사묘를 지어달라고, 그래서 송인종은 바로 편작묘를 만든다. 송인종은 편작묘를 짓고 편작을 의신으로 모시고, 봉호를 "영응후(靈應侯)"라 한다. 편작은 이렇게 하여 유일하게 황제로부터 '의신'이라고 존칭되는 의학자가 된다.

 

나머지 의사들과 비교하면, 편작은 사상 가장 자격있는 '의신'이다. 모든 사람이 존경하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편작의 저작인 <내경> <외경> <난경>등이 모두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더욱 탄식할 일은 편작의 의덕도 막 '실전'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병치료를 하다가 가난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돈이 없어 병치료를 못하는 등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법에 감사해야할 것같다. 일부 의사들은 '홍포'를 주어야 비로소 병치료고개를 들어 한번 쳐다본다. 의사라는 사람이 의덕을 잃으면 더 이상 환자를 볼 수 없다. 죽음에서 구해내고 부상입은 자를 치료해주는 것이 본인의 임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