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서서(吳書書)
여인의 매력은 세월에 면역될 수 있을까? 답안은 Yes이다. 대혼군(大昏君) 양광(楊廣)의 처인 민황후(愍皇后) 소씨(蕭氏)가 바로 그런 여인이다. 그녀는 13살때 수나라의 진왕비(晋王妃)로부터 시작하여, 양광(楊廣), 우문화급(宇文化及), 두건덕(竇建德), 돌궐처라가한(突厥處羅可汗), 힐리가한(頡利可汗)과 이세민(李世民)의 여섯 명의 남편을 거친다. 비록 그녀는 소녀, 숙녀, 아주머니로 바뀌어갔지만, 그녀의 매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60여세까지 즐겁게 살다가 대당의 황궁에서 병사한다.
소황후가 생활하던 시대는 국호가 양, 진, 수, 당으로 4번 바뀐다. 그녀 본인은 매력적인 여인의 대변인으로서 조금도 인기가 줄지 않았다. 고금중외에 다시 없을 정도있다. 소황후는 황후가 되기 전의 신분이 공주였다. 그녀의 부친은 남북조 말기 서량(西梁) 효명제(孝明帝) 소귀(蕭巋)이다. 출생월이 이월이어서, 현지의 풍속에 따르면, 이월에 출생한 자녀는 불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귀는 그녀를 당제(堂弟) 소급(蕭岌)에게 맡겨서 입양시켰다.
실제상, 나중의경력으로 보면,소황후는 확실히 천살성(天煞星)이 인간세상에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에서 극성(克星)인 것은 남편이지 부친이 아니다. 양부가 병사한 후, 소황후는 외숙부 장가(張軻)에게 입양된다. 어려서는 빈곤한 생활을 한다.
그녀가 8살 되는 해, 운명의 신이 그녀에게 미소를 짓는다. 당시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진(陳)나라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다. 함께 데려간 사람중에 그의 둘째아들 진왕 양광이 있었다. 진나라의 군주인 진서보(陳舒寶)는 끝까지 멍청한 정신을 고집하며, 수나라 대군을 본체만체 한다. 오히려 대신들이 자신을 따라 함게 부패하도록 고무시키다가 결국 양광에게 멸망한다. 이제 수나라는 전국통일을 완성했다. 양광을 표창하기 위하여, 양견은 아들에게 관직을 올려주고 작위를 내리는 외에, 천하의 명문세가에 명령을 내려 집안의 아직 출가하지 않은 딸의 생진팔자(生辰八字)를 조정에 보고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나이 21살된 양광에게 명리가 맞는 왕비를 구해주고자 한다.
누가 알았으려, 고르고 골랐으마, 나이가 비슷한 아가씨들은 이게 맞지 않으면 다른 게 극성이었다. 결국 유일하게 나이 만9세인 소황후의 팔자만이 양광의 팔자와 합쳤을 때 대길(大吉)로 나왔다. 그래서 그녀를 뽑는다. 여자측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궁으로 불러들인 후 즉시 성혼시키지 않는다. 독고황후는 이 어린 며느리를 아주 좋아한다. 그녀를 자신의 딸로 삼아 기른다. 그녀를 위하여 많은 스승을 모셔서 그녀에게 글을 읽고, 쓰는 것, 그림그리는 것, 악기를 다루는 법등을 가르친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소씨는 뭐든지 배우면 바로 알았다. 4,5년이 지나자 그녀는 아주 예쁜 미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글과 예를 아는 다재다능한 여인이 된다. 순식간에 개황13년이 되어, 양주를 진수하도록 명을 받은 양광은 장안으로 가서 소황후와 결혼한다. 양광은 25세, 소황후는 만13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미녀로서의 기준을 충족시켰다. 양광은 유명한 호색황제이다. 그러니 신혼처에 대하여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점술에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점술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그녀는 '모의천하(母儀天下)'한다는 것이었다. 소씨녀가 모의천하한다면 그 남편은 바로 황제가 아니겠는가? 비록 현재 태자는 그의 형인 양용이지만, 제왕가에서 태어난 그는 자연히 황제가 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소씨녀를 자신의 운명에서의 복덩어리로 보고, 그녀를 아주 아꼈다.
아쉬운 점은 그는 말의 절반만 들었다는 것이다. 점쟁이는 "모의천하"라는 말 뒤에 "명대도화(命帶桃花)"라고 하여 도화운이 따른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뜻은 소씨녀가 황후가 되는 것이 앞이고, 도화운이 있는 것이 그 뒤이다. 양광은 결혼한 후, 금방 재상 양소(楊素)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태자위를 빼앗기 위한 행동을 개시한다. 그러나 태자 양용은 굳이 죽을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부모가 큰 돈을 들여서 그에게 마련해준 태자비 원씨(元氏)는 본체만체하고, 오로지 첩인 운소의(雲昭儀)에게만 마음을 주었다.
그 결과 원씨가 분개하여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다. 양견과 독고황후는 화가나서 양용의 태자지위를 박탈할 생각을 가진다. 양광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고의로 모친의 앞에서 아주 인효하고 정파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일부러 소씨녀를 멀리하고 정무에 전념하는 자태를 보인다. 총명한 소미녀도 아주 잘 협력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독고황후에게 양광이 정무만 신경쓰고 자신은 돌보지 않는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들 부부는 서로 협력하여 독고황후의 마음을 얻어낸다. 마침내 양용의 태자지위를 박탈하고, 양광을 태자로 앉힌다.
이때는 양광과 소씨녀가 결혼한지 이미 7년이 된 때이다. 즉, 이들은 아무 심계가 깊은 젊은 부부였다. 모친 독고황후의 앞에서 꼬박 7년간 연극을 한 것이다.
그 후, 양광은 일련의 밀모를 통하여, 몇몇 형제와 부친을 몰아내고,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황제가 된 양광은 더 이상 모범남편행세를 할 필요가 없었다. 집안의 꽃은 들 꽃만큼 향기롭지 못하다는 호색한의 심리로 그는 소황후를 멀리하고, 새로운 미녀를 골라서 입궁시키는데 열중했다.
다른 황제는 삼궁육원을 두는데, 그는 한꺼번에 서원(西苑)에 십육원을 짓는다. 각각 경명원, 영휘원, 서란원, 신광원, 명하원, 취화원, 문안원, 적진원, 영문원, 의봉원, 인지원, 청수원, 보림원, 화명원, 기음원 및 항양원.
이어서 그는 모아놓은 천하미녀중에서 용모가 뛰어는 16명을 뽑아서 4품부인으로 봉하고 각각 하나의 원을 주재하게 한다. 그리고 또 다른 320명의 미녀를 뽑아서 가무와 악기연주를 가르친다. 다음은 각각 10명을 1개조로 하여, 각각 각처의 정대루사(亭臺樓榭)로 분재하여 직책을 주었다.
소황후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는 풍류남편인 황제를 잘 알았다. 그의 부친(수문제)처럼 말을 잘듣게 할 수도 없고, 자신도 독고황후처럼 남편을 다스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마음 편안히 갖고 남편의 풍류에 눈을 감아주었다.
기실, 소황후의 이런 태도는 총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존인 황제는 어쨌든 단속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보전하는 길이다. 소황후가 대범하고 은인자중했기 때문에, 주색에 빠져있는 수양제도 그녀는 존중하고 예의로 대했다. 자신이 향락을 즐기면서도 소황후를 잊지 않았다.
여색을 탐하면 자연히 국사를 소홀히 한다. 양광이 황재위에 있던 십여년동안 비록 무수한 미녀를 정복했지만, 이연등 여러 영웅남자들은 정복하지 못했다. 그가 세번에 걸쳐 양주로 가서 유흥을 즐길 때, 천하는 이미 대란에 빠진다. 이연, 이밀, 두건덕 등이 속속 거병한다. 이미 의욕을 상실한 양광은 남경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다시는 북방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때, 황위와 소황후를 노린지 오래된 우문화급이 금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병력을 이끌고 이궁으로 진입하여 막 50세가 된 수양제를 침전 서각에서 교살한다. 우문화급은 일찌기 소황후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다. 양광을 처리한 후, 즉시 그녀에게 아들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여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다.
이때 중원일대에서 거병한 두건덕은 계속 승리를 거두며 강도(江都)로 향한다. 우문화급은 막아내지 못하고, 계속 패배한다. 결국 소황후를 데리고 위현으로 물러나 지킨다. 그리고 스스로 허제(許帝)에 오른다. 그리고 소황후는 숙비(淑妃)로 봉한다.
얼마후, 위현이 함락된다. 황급히 요성으로 물러난다. 두건덕은 군대를 이끌고 계속 추격하여 결국 요성을 함락시키고, 우문화급을 죽인다.
승리자인 두건덕은 우문화급의 금은보화를 차지하는 외에 매력이 아직도 남아있는 소황후까지 거둔다. 비록 이미 두번이나 과부가 되었고, 두 명의 남편을 잃었지만, 소황후의 미모와 고귀한 기질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두건덕은 그냥 생긴 것을 안가지면 손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문화급의 숙비는 자신의 왕비가 된다. 낙수(樂壽)라는 곳에서 여색의 즐거움에 빠지고, 원래 중원을 차지하려던 본래 뜻은 거의 잊어버린다.
다행히 두건덕에게는 질투심이 엄청난 본부인 조대수가 있었다. 그녀는 자주 그들 두 사람이 등불을 끄고 공부무산(共赴巫山)하고 있을 때, 돌연 대형 등을 들고 나타나서 소란을 피우곤 했다. 그리하여 두건덕이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때는 북방의 돌궐인들이 신속히 발전하여 중원을 핍박하는 중이었다.
원래, 멀리 돌궐칸에게 화친으로 시집갔던 수양제의 여동생이자, 소황후의 시누이인 의성공주(義成公主)는 이연이 이미 장안에서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소황후의 행방에 대하여 듣자, 사신을 보내어 닥수로 가서 소황후를 영접한다. 두건덕은 감히 돌궐인과 정면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소황후 및 황족을 온 사신에게 곱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소황후는 이렇게 여러번 돌고돌아, 돌연 돌궐로 이민까지 가게 된다. 국외에서, 그녀의 매력은 여전히 치명적이었다. 일거에 돌궐부자 이대의 우두머리인 처라가한과 힐리가한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그러나, 소황후는 일반적인 홍안화수(紅顔禍水)는 아니다. 최고수급의 홍안화수이다. 10년후, 즉 당태종 정관4년, 당태종은 대장 이정(李靖)을 파견하여 돌궐을 대파하고, 그녀의 다섯째 남편인 힐리가한은 밥그릇은 잃지만, 목은 잃지 않는다.
소황후는 다시 전리품으로 승리자인 이세민의 앞에 끌려간다. 이때의 그녀는 이미 48세이다. 이세민은 겨우 33세때이다. 다만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이세민은 허리는 버드나무같고 얼굴은 모란같은 그녀에게 정복당한다.
이때까지 아주 근검절약했던 이세민은 그녀를 위하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준다. 이번 연회는 곳곳에 화려한 궁등을 걸어두고, 탁자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당태종은 이런 장면으로 아주 호사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곁에 있던 소황후에게 묻는다. "그대는 눈앞의 장면이 수나라궁전과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기실, 이는 수나라궁전의 호화사치와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수나라궁전에서 밤에 연회를 베풀 때는 등을 켜지 않았다. 회랑에 120개의 직경이 수촌에 달하는 야명주를 걸었다. 그리고 대전앞에는 화염산을 수십개 만들어 단향과 향료를 피운다. 이렇게 하여 대전은 대낮처럼 밝았고, 온갖 향이 진동하여 마치 선경에 들어온 것같았다. 매일 저녁에 태워없애는 단향만도 200여수레였다. 이에 대하여, 소황후는 그대로 말하기 힘들어서 그저 담담하게 말한다: "폐하는 기업을 연 군왕인데, 어찌 망국의 군주와 비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태종은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다. 그녀의 지혜와 말재주에 탄복한다. 그리고 그녀를 더욱 아끼고 존경한다. 소황후는 당나라궁중에서 18년의 세월을 보낸다. 67세가 되어 사망한다. 이세민은 나중에 황후의 예로 소황후를 양광의 능에 매장하고, '민황후(愍皇后)'라는 시호를 내린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은 일종의 인생선택이다 (0) | 2013.04.27 |
---|---|
당고조 이연은 어떻게 황제에 올랐는가? (0) | 2012.12.22 |
이적(李勣)의 충의(忠義)와 원활(圓滑) (0) | 2012.08.15 |
당나라의 명재상 요숭(姚崇)은 어떻게 정적에 대처했는가? (0) | 2012.06.10 |
양양요(楊良瑤): 정화보다 먼저 아랍까지 항해한 중국인 (0) | 2012.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