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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여포)

여포(呂布)는 개세효웅(蓋世梟雄)인가?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이치아(李治亞) 

 

여포는 아주 잔인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정원(丁原)을 죽였다; 여포는 아주 잔인했다. 자신을 발탁한 바 있는 동탁(董卓)을 죽였다. 대의멸친으로 보이고, 여포가 정의를 추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도 여포를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 비록 여포의 무예는 천하에 이름을 날렸지만, 삼국시대에 개세효웅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여포를 꼽지는 않을 것이다.

 

왜 무예가 고강한 여포는 개세효웅이 되지 못했을까? 왜 여포는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을까? 설마 당시 사람들이 편견을 가졌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은 일거에 명성을 떨치는데, 왜 여포는 계속 묵묵히 지내야 했을까?

 

여포는 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을까?

 

첫째, 여포는 목표가 없었다. 여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부하였다. 한번도 우두머리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의 뒤에서 힘쓰는 것은 잘 했지만, 일단 자신이 제일 윗자리로 올라가게 되면 그는 자연스럽게 우두머리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우물쭈물하거나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금의 성부(城府)도 없다. 유비를 보라. 비록 이전에는 두목이 될 기회가 없었지만, 일단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좌장비, 우관우를 가지자 기세가 대단하지 않았는가?

 

둘째, 여포는 원칙이 없었다. 여포는 일을 함에 있어 원칙이 없었다. 누구든지 돈을 많이 주면 그를 위해서 일했다. 그는 조조가 아니다. 백성의 생활이 힘든 것을 보고 측은지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조조의 <해노행>은 여포가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쓸 수가 없다. 글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경지의 문제이다.

 

셋째, 여포의 생활은 방향이 없었다. 여포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면 그를 위해서 일했다. 이것은 상대방이 내놓는 패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도의는 여포가 생각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동탁이 여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며, 여포에게 적토마와 금은비단을 내리며, 여포를 자신의 문하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여포는 눈썹 한번 까닥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친과 같은 정원을 바로 죽여버린다.

 

넷째, 여포는 사람을 쓸 줄 몰랐다. 장료는 여포의 수하로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조조에게 귀순한 후, 용이 날개를 얻은 듯히 비룡재천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아니라, 오자양장의 반열에 들어간다. 그리고 소요진일전에서 손권의 위망을 꺽고 도망치게 만든다. 강동에서 장료의 이름만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가 되었다. 진궁이 와서 투항하여, 그에게 조조의 근거지 연주를 주었는데, 여포는 위풍이 팔방에 미치게 되었음에도 그는 이를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나중에 개인의 영웅모험주의로 진궁의 많은 합리적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자신은 생의 끝을 맞이한다.

 

다섯재, 여포는 사람을 볼 줄 몰랐다.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사람을 알아보아야 한다 조조가 그러했고, 유비도 그러했다. 손권도 마찬가지이다. 여포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쓰지 못했다. 여포는 자신의 수하중 누가 충성심이 강한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진등부자에게 농락당하고, 마찬가지로 진궁의 말도 듣지 않았다.

 

이상의 몇 가지 점을 살펴보면, 여포는 그저 전장(戰將)이고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혹은 마혁과시(馬革裹屍)할 수는 있었다. 일단 운주유악하면 반드시 패배한다. 그래서 여포는 용맹스러웠지만,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마침내 수하에게 포박되어 조조에게 바쳐진다. 여포는 유비를 존경해왔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유비가 조조에게 잘 말해주어 자신을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유비의 한마디는 "명공은 여포가 어떻게 정원과 동탁을 대했는지 잊으셨습니까?"였다. 이 말로 여포는 단두대로 보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