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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중대혐의범 진기미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김만루(金滿樓) 

 

원극문은 글에서 송교인이 암살될 때 자신이 상해에 있엇고, 친히 진기미와 응계형이 송교인을 모살하려는 거동을 보았다고 썼다. 그렇다면, 원극문이 말한 사실이 있었는가?

 

원극문은 이렇게 말한다. 송교인이 북상하기 전에, 진기미, 응계형등이 그를 환송한다. 그 자리에서 진기미는 송교인에게 어떻게 정당내각을 조직할지를 물어본다. 송교인이 말한다: "나는 단지 대공무당(大公無黨)이라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진기미는 그 말을 듣고는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색은 영 좋지 않았다. 한편에서 응계형이 대노하며 욕을 한다: "네가 그렇게 하면, 그것은 반당행위가 아니냐.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말을 마치고, 응계형은 가슴에서 총을 꺼내서 쏘는 시늉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는 바로 응계형을 말렸다. 이런 위협에도 송교인은 굴복하지 않았고, 단지 여덟글자를 말했다: "사무가외, 지불가탈(死無可畏, 志不可奪)"(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뜻은 빼앗길 수 없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불쾌하게 헤어졌다.

 

원극문은 또 말한다. 그의 친구중에 심상운(沈翔雲)이 있는데, 동시에 그는 진기미의 중요모사이다. 하루는 심상운이 사적으로 원극문에게 말해준다: "송교인에게 일이 생길 것이다!" 원극문이 그 이유를 묻자, 심상운이 말한다: "국민당내에 많은 사람들이 송교인을 아주 미워한다. 진기미, 응계형이 특히 그러하다. 요 며칠 그들 두 사람은 하루종일 이 일을 상의한다. 나처럼 가까운 사람들도 기밀에 참여할 수 없다. 우연히 그들이 논의하는 것을 들었는데, 송교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글의 말하는 어투는 모두 극히 좋지 않은 것이었다." 며칠 후 송교인에게 과연 일이 터졌다.

 

원세개의 아들 중에서, 차남 원극문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이 점은 원세개에게 칭제하라고 종용한 '태자' 원극정(袁克定)과 전혀 달랐다. 그러나, 일생동안 풍류를 즐긴 원극문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또 하나의 신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청방(靑幇)의 사람일 뿐아니라, "대"자배라는 것이다. 그래서 방회내부상황을 잘 알았다. 원극문은 스스로 그의 글은 선공 원세개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쓴 것이고, 이것은 송교인의 암살에 새로운 견해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진기미와 흑방의 관계를 말하자면, 한 사람이 큰 관계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청방의 두목 범고두이다. 이 인연은 진기미의 진기채(陳其采)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씨형제는 절강 호주 사람이다. 원래는 향신세가(鄕紳世家)이다. 태평군이 밀려올 때 전란으로 가산을 탕진한다. 부친이 열심히 가업을 회복시키고자 하였지만, 예전만 같지 못했다. 그리하여 진기미, 진기채의 부친은 진씨삼형제에게 다음과 같이 안배해준다: 첫째, 진기업(陳其業)은 가업을 계승한다; 둘째 진기미는 밖으로 나가 공부하여 상인이 된다; 셋째 진기채는 사숙에서 공부를 하여 공명을 얻는다.

 

진씨의 셋째인 진기채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16세때 수재가 되고, 18세때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사관학교에 가서 군사를 공부한다. 5년후, 진기채는 보병병과 1등의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 당시 청나라조정이 신군을 훈련시키고 있었으므로 진기채등은 중용된다. 귀국하자마자, 진기채는 주호신군 통대(統帶)가 된다. 얼마후 호남무비학당을 창건하도록 파견된다. 그후 진기채는 다시 호남신군 표통(標統, 단장)의 직위를 받는다. 당시 나이 겨우 25살이다. 2년후, 진기채는 남경으로 가서 육군제9진 정참모관이 된다. 얼마후 북경으로 가서 군자부(참모본부) 제3청 청장이 된다. 당시 막 서른이었다. 진기채와 같은 사례는 아주 많다. 마찬가지로 젊어서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양필, 채악, 오녹정, 염석산, 장소증, 남천울등이 청말민초에 모두 이름을 날렸다. 이들은 좋은 시기를 잘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아마도 별 관계가 없을 것이다.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보자. 진기채는 일본에서 돌아온 후, 한때 주호신군 통대로 있었다. 이 시기가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직무때문에, 그는 청방의 우두머리인 범고두를 크게 도와준 적이 있고, 이것은 그의 형인 진기미가 청방내에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일의 경위는 이렇다. 범고두에게는 예덕보(芮德寶)라는 제자가 있었다. 한번은 성황묘 부근에서 한 영국인이 한 중국여자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 예덕보는 의분에 달려가서 막는다. 그 영국인은 자신이 외국열강의 국민이라는 것을 내세워 오히려 예덕보를 치려 한다. 예덕보는 분노해서, 무술을 써서 영국인을 흠씬 두들긴다. 그러고 나서 그 영국인은 낭패한 모습으로 영국영사관으로 가서 영사에게 그를 폭행한 흉악범을 엄벌해달라고 한다. 그때는 열강의 세력이 아주 컸고, 영사재판권이 있었다. 범고두도 감히 서양인들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덕보를 서양인들에게 넘겨준다면,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고, 자신의 강호에서의 지위도 문제된다.

 

범고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영국영사는 주호신군 통대인 진기채에게 예덕보를 체포하는데 협조해달라고 요청한다. 진기채는 사정의 경위를 들어본 후, 상해지방에서 이 사건을 처리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할 뿐아니라, 오히려 그 영국인을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진지채가 가진 병권에 겁을 먹은 영국영사도 과분하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영국인이 배상하고 사죄하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된다.

 

진기채의 개입은 예덕보 사건을 원만하게 종결시켜주었으므로 범고두는 감격하고 고마워한다. 그는 진기채에게 큰 마음의 빚을 진 것이다. 그러나 진기채는 금방 승진하여 외지로 간다. 범고두는 은혜를 갚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 은혜갚는 일은 나중에 진기미에게 하게 된다.

 

진기미는 진기채보다 2살이 많다. 동생의 성공적인 경력은 그에게 자극과 계시를 주었다. 진기미는 일찌감치 세상에 나와서 전당포에서 12년간 일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생은 일본유학 몇년만에 이미 비황등달했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으로 불만이 있었다. 그후 진기미는 동생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한다. 그도 일본으로 가서 유학하려 한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후, 진기미는 동빈학교로 가서 군사를 배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일본사관학교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사관학교는 반드시 청나라조정이 파견해야 했고, 선발기준도 아주 엄격했다. 수십면, 수백명중에서 1명을 뽑는 것이었다. 진기채와 같은 성공사례는 아주 드문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군사를 배우려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그래서 교활한 일본인은 적지 않은 짝퉁학교를 만들어 중국학생을 모집했고, 그들의 학비를 편취했다. 동빈학교도 그중 하나이다.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짝퉁학교의 유학생은 별로 배울 것이 없다. 그러나 혁명당인들에게는 기회였다. 얼마후 진기미도 동맹회에 가입하여 황흥, 송교인등 혁명선구자를 만난다. 이들 혁명당원과 비교하면, 진기미가 혁명에 참가한 시기는 아주 늦었다. 경력도 적었다. 그러나, 진기미는 자신의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회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여러해동안 단련된 그는 혁명활동에서 아주 일처리를 잘해냈다. 그리하여 금방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간다.

 

진기미는 항상 일처리가 과감했고, 대담했다. 당시에 "사첩(四捷)"이라고 불리웠는데, 바로 구치첩(口齒捷), 주의첩(主意捷), 수단첩(手段捷), 행동첩(行動捷)이다. 게다가 그 본인이 호협장의했고, 친구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청방에 들어간 후 물만난 고기같았다. 범고두의 도움으로, 진기미는 금방 방안이 크고 작은 여러 두목들을 알게 된다. 혁명을 위하여, 진기미는 얼마후 일부 청방의 대두목을 혁명진영에 끌어들인다. 원래 범고두의 수하핵심구성원인 응계형, 유복표, 이징오등과 그들의 수하 수천명은 상해혁명과정에서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신해혁명후, 원래 관료사회에서 잘 지내던 진기채는 형이 이미 공공연히 반란을 꾀하는 것을 보고 북경에 그가 오래 머무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방으로 도망친다. 이때부터 그는 관직과는 멀어진다. 민국성립후, 진기채는 재정에 투신하여, 중국은행 항주분행 부행장, 절강성 재정청 청장, 재정부 해관감독등의 직을 맡는다. 비록 괜찮게 지내기는 했지만, 둘째 진기미나 조카인 진과부, 진립부와 비교하자면, 진기채는 그저 무명에 불과하다.

 

진기미는 달랐다. 그는 천성적으로 난세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을 틈타 호군도독이 된다. 일시에 풍광무한이 된다. 그러나, 진기미는 혁명과정에서 이름을 크게 떨쳤지만, 그는 뼛속까지 흑사회의 본색이 있었다.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진기미는 혁명당 내부 내지 방회에서 경쟁상대방을 제거하거나 쫓아냈다. 그중에는 광복회 영수 도성장을 암살한 것도 있고, 남경함락에 공을 세운 민군참모장 도준보를 총살한 것도 있으며, 제조국을 공격할 때 그의 목숨을 구해준 바 있는 광복회 영수 이섭화도 있다. 그에 반대하는 오송군정분부를 설립하였으므로 진기미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암살하려 했다. 이섭화는 놀라서 상해를 떠난다. 그외에 진강군정부도독, 북벌군임준총사령관 임술경도 하마터면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외에, 진기미는 혁명경비를 구하기 위하여, 중국은행 상해분행경리 송한장을 납치한 적도 있다. "송교인암살사건"이후 같은 청방의 원로이자 당시 양주도독으로 있던 서보산을 폭사키킨다. 상무인서관의 창업자인 하서방은 혁명당이 갑북에 주둔하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에, 암살당한다. 이것도 진기미가 막후에서 조종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상해수비사, 북양장군 정여성도 폭사당하는데 이것이 진기미가 마지막으로 성공한 암살이다.

 

진기미는 역사적으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응계형과는 여러가지 관계가 있어서, 일부 신문에서는 "송교인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마찬가지로 진기미가 막후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혁명당인들과 완강하게 계속 투쟁했던 대재자 양계초는 그의 집안에 보낸 서신에서 직접 진기미를 송교인암살의 주범이라고 지목했다. 그리고 송교인암살사건은 동맹회사람들이 스스로 죽인 것이라고 하였다. 북경정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이뿐아니라, 양계초는 이들이 다음번에 암살할 대상이 자기일 것으로 의심했다.

 

여론의 압력하에, 진기미는 한편으로 신문에 스스로를 변명하며, 자신은 응계형과 특수한 관계가 아니라고 성명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국민당인을 독촉하여 하루빨리 사건을 해결하여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한다. 흑백양도의 공동노력하에 "송교인사건"은 사건발생후 3일만에 해결된다. 이것은 조계암살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여러해 이후, 진과부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진기기가 송교인암살의 주모자로 의심을 받았는데, 즉시 상해전보국 국장 오패황을 불러온다. 그에게 북경정부와 상해의 전보왕래를 찾아보게 하고, 어떤 사람이 전보를 받았으며, 어떤 사람이 관계있는지 알아보게한다. 바로 전보왕래에서 핵심단서를 잡는다. "송교인사건"은 그리하여 가볍게 해결된다. 그래서 공로를 말하자면, 오패황에게 공로를 돌려야 한다고 했다.

 

친히 사건해결에 참여했던 국민당인 주남해도 이렇게 회고한다: 송교인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국민당은 흉수를 체포하는 업무에 이상하리만치 노력했다. 모든 당내의 사람들과 상해의 당원이 모두 출동한다. 각각 나눠서 단서를 찾았다. 상해전보국 국장 오패황은 이전에 진기미의 명을 받들어 정보업무를 담당했다. '송교인암살사건"과 관련있는 전보는 모두 그가 친히 전보국에서 수발번호를 확인했고, 하나하나 점검하여 잘못된 것이없었다. 그리고 우편국에서는 수발원, 전보발송원등 원래의 업무담당자들이 전보원고에 일일이 서명한다.

 

당연히 사건해결이 너무 빠른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중에 북경 국무원 성명에서 지적한 것처럼, "송교인사건"의 해결이 이렇게 빠를 수 있었던 것은 응계형, 무사영등이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도망칠 준비도 하지 않은 것에 원인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을 시킨 사람이 자신들을 팔아먹을 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전체 모살안의 사건해결의 단서와 흉범은 바로 찾아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 배후의 주모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진기미라고 보는 것이다.

 

이 성명에서, 북경은 아주 재미있는 논리를 만들어낸다. 소교인이 원세개를 총통으로 모시자고 주장하였고, 진기미, 황흥은 이에 극도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혁명당의 내부암투는 이미 아주 치열해졌다. 응계형은 원래 진기미의 옛부하이다. 무사영은 또한 황흥의 개인적인 사람이다. 홍술조는 송교인이 내각총리를 다투므로, 상사인 조병균의 위치를 지켜주기 위하여 응계형에게 송교인의 명성을 훼손시키도록 지시한다. 진기미는 이 시기를 이용하여, 응계형, 무사영의 손을 빌어 송교인을 암살하도록 하고, 사후에 죄명을 모조리 중앙정부로 떠넘겼다. 사건해결후, 무사영은 원래 내부사정을 모조리 진술했다. 그러나 진기미는 이십여만원의 거금을 들여 회심공당을 매수한다.그리고 무사영에게 전면진술번복을 하도록 협박한다. 사건범인이 상해지방검찰청으로 인도되자, 진기미는 무사영이 다시 말을 바꿀까 우려하여 독살하여 살인멸구한다. 이를 톻아여 응계형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겁을 준 것이다.

 

논리는 비록 맞지만, 북경측의 지적은 추측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무사영이 황흥의 개인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현재 이를 증명할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만일 무사영이 정말 모살되었다면, 그렇다면 진기미에게 혐의가 가장 크다. 왜냐하면 무사영이 구금되어 있던 호군군영의 주둔군대는 진기미의 군대이기 때문이다. 이 모살안은 만일 진기미의 묵인이 없었더라면,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응계형은 암살사건에서 위치도 아주 기이하다. 응계형은 흑도인물이다. 공진회에도 사람이 많다. 어떤 살수든 구할 수 있다. 왜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무사영과 같은 사람에게 시켜서 하게 하였을까? 암살대상이 내각총리가 될 송교인인데, 당시에 이는 어떻게 보더라도 적은 일이 아니었다.

 

응계형이 내부인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그가 공진회를 연루시키고 싶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다. 혹은 처음부터 일이 성공한 후, 무사영을 팔아버릴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아마도 무사영이 응계형의 집에서 붙잡힌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아주 아이러니한 점은 응계형도 다른 사람이 팔아먹은 것같다는 것이다. 그를 팔아먹은 사람은 아마도 이전에 그와 교분이 두터웠던 혁명당인일 것이다.

 

전체 송교인암살과정을 보면, 해명되지 않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예를 들어, 송교인은 무사영에 의하여 죽었는가? 이것도 확실히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혹은 무사영이 명을 받들어 송교인을 암살했고, 그는 확실히 총을 쏘았다. 그러나 암살시는 깊은 밤이고, 현장이 혼란스러워서, 다른 사람이 총을 쏘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사영은 자신이 송교인을 죽였다고 진술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추측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장을 보면, 자객은 무사영 1명만이 아니었다. 다른 3명도 있었다. 즉 오내문(吳乃文), 진옥생(陳玉生), 장한표(張漢彪)이다. 이 세명중, 오내문은 이전에 응계향이 호군도독부 첩보과 과장을 할 때의 수하이다. 바로 그가 무사영을 응계형에게 소개했다. 진옥생은 전채 암살안이 구체적인 책임자이다. 암살당시 그가 데리고 갔다; 장한표는 신분이 불명이다. 그러나 그도 살수일 것이다. 그외에 고용살인과정에서, 자칭 광복군 군수관이라는 풍모가 일찌기 무사영과 접촉한 바 있다. 이들은 사건발생후 모두 도망쳤다. 그저 멍청한 무사영만 남아서 피살된 것이다. 많은 비밀은 여기서 끝난다.

 

네 사람의 신분을 보면 혁명당인이면서 방회분자이다. 혹은 동시에 두가지 신분을 다 지니고 있다. 흑방분자는 행동이 비밀스럽다. 수단은 지저분하다. 그중에는 사기도 있다. 일부 혁명당인들도 마찬가지로 "목적만 묻지 수단은 가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광복회 회장 도성장이 암살된 사례를 보면,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장개석은 일기에서 자기 입으로 인정한다. 도성장의 암살은 바로 그가 저지른 일이라고. 막후지휘자는 바로 의형인 진기미라고. 도성장이 피살된 후, 장개석은 일본으로 도망가서 피한다. 또 다른 살수인 왕요경은 금방 살인멸구당한다.

 

더욱 기괴한 일은 "송교인암살사건"의 해결과정에서 장개석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당시 상해지방건찰청장을 맡고 있던 황진반(黃鎭磐)에 따르면, 당시 장개석의 협조가 없었다면 흉수 무사영등의 단기간내에 조계에서 순조롭게 체포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약간 기이하다. 장개석은 도성장을 죽인 후 일본에 근 1년간 피해있었는데, 그가 송교인암살사건의 해결에 참여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진기미의 수하로 또 다른 중요한 두목인 왕금발(王金發)의 작용은 더욱 컸다. 왕금발은 '산대왕' 출신이다. 청나라말기 혁명시 암살을 많이 했다. 그가 이번에 해결에 협조한 것은 암살분야를 잘 알아서이다. 송교인사건이 발생한 후, 국민당 특파원의 신분으로 대원을 이끌고 가서 응계형응 체포했다. 나중에 응계형의 집에서 무사영을 체포하고 대량의 죄증을 획득한다. 공로를 따지면 적지 않다.

 

또 다른 주목할 사료는 일찌기 송교인이 발탁해서 국민당내에서 발전한 양사의가 "송교인암살사건'을 회고하면서 한 말이다: 국민당은 선거승리후, 송교인이 각지에서 연설을 했다. 그중에는 원세개정부를 비난하는 것이 있었다. 나중에는 어떤 사람들이 익명으로 반격하곤 했다. 송교인은 상해에 도착한 후 글을 써서 반박한다. 익명씨의 변명은 모조리 공박당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송교인은 이 일을 언급하면서 아주 득의만면했다. 앙천대소까지 했다. 진기미는 그 곁에서 차갑게 말한다: "둔초, 그렇게 좋아하지 말라. 그들이 암살 수단으로 너를 상대할 것이다." 송교인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크게 웃었다. "우리 혁명당인들이나 사람을 암살할 줄 안다. 그들이 우리를 암살하는게 뭐가 두려우냐."

 

송교인이 암살당한 그날 밤, 양사의는 동창 당과의 집에서 그 말을 듣는다. 원세개가 많은 자객을 파견하여 송교인을 암살하려 한다고. 당과는 또한 공진회의 또 다른 거물 장요경과 술을 마시고 놀면서 알게 된 사이이다. 양사의는 다음 날 송교인에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암살소식을 들은 것이다. 송교인이 이미 출발하여 이미 암살당했다고. 이때 우페부가 카드를 하나 보내온다. 거기에는 놀리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원래는 황흥을 제거하려 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송선생이 맞았다. 실로 미안하다 운운...

 

카드에서 하는 말은 고의로 본질을 흐리려는 것일 것이다. 고증에 불과하여,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글에서 언급한 진기미와 장요경이 사전에 암살을 알았다는 것은 이상한 점을 드러내준다. 양사의는 말했다. 장요경과 진기미는 모두 강호의 거두이다. 모두 배경이 있다. 그들의 말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다. 만일 이 사료가 진실이라면, 진기미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이 암살을 기획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갑게 방관하고 이 모살을 내버려 둔 것이다.

 

원극문의 생전친구이며 민국의 사정을 잘 아는 정일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송교인이 암살될 때, 진기미는 기원에서 손님과 있었다. 돌연 누가 들어와 송교인이 암살되었다고 보고한다. 진기미는 처음네 놀라더니, 좌중을 향헤서 술잔을 들고 말한다: "이 잔을 건배합시다." 그러나, 이 술이 성공을 축하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경고를 듣지 않은 것을 위해서인지 진기미 본인만이 알 것이다.

 

진기미가 응계형을 대하는 태도도 아주 이상하다. 응계형이 구금된 기간동안, 그가 받은 대우는 무사영과 천양지차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2차혁명"이 발발한 후, 응계혀은 진기미의 눈아래에서 태연하게 도망친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숨은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