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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소제(漢昭帝) 죽음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유병광(劉秉光) 

 

유불릉(劉弗陵)은 한무제(漢武帝)의 어린 아들이고, 8살에 등극하여, 21세때 붕어했다. 13년간 재위했으며, 역사상 한소제로 불린다. 한소제의 죽음에 관하여, <한서.소제기>와 <자치통감>은 모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평원년(기원전74년), .....여름사월 계미(癸未), 황제께서 미앙궁에서 붕어하다(夏四月癸未, 帝崩於未央宮)" 불과 몇 개의 단어에 사인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적혀 있지 않다. 그래서 의심이 일어나게 만든다. 한소제는 병사인지 급사인지, 아니면 정상사망인지 비명에 죽었는지, 천백년이래로 추측이 계속되었다. 한소제의 죽음은 사학계에서 풀기 어려운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한소제의 신체는 계속 괜찮은 편이었다. <한서.외척전>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아주 튼튼했다고 되어 있다. 거기에 그는 잘먹고 잘입었으며 걱정거리 없이 살았다. 그런데 21살도 되기 전에 사망하고 말핬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한다. 권신 곽광이 오랫동안 조정을 좌지우지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한소제를 죽여버렸다고, 암살이나 모살이라고. 이런 견해는 비록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기는 하지만, 필자의 분석에 의하면, 한소제는 비록 직접 곽광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곽광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한소제는 나이가 어려서 일처리경험이 없다. 정치를 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가대사는 곽광이 처리했다. "황제의 나이 여덟때 정사는 모두 곽광이 결정했다." 곽광은 "천하에서 그의 풍채를 보고 싶어하는" 풍운인물이 된다. 한무제가 곽광에게 "주공배성왕(周公背成王)"의 그림을 준 뜻은 곽광에게 "주공이 7년간 정치를 하다가 성왕이 자라자, 주공은 정사를 성왕에게 돌려주고, 북면하여 여러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사기.주본기>는 것을 배우라는 뜻이었다. 한소제가 성인이 되면 바로 권력을 돌려주고 물러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원봉4년이 되어, 황제가 친정을 할 때가 되었는데, 곽광은 여전히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정사는 하나같이 대장군 곽광이 결정했다."(자치통감)

 

권력은 괴이한 것이다. 항상 사람들이 그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추구하게 만들고, 지키려 하게 만든다. 권신도 그렇고, 제왕은 더욱 그러하다. 한소제의 나이가 어릴 때, 곽광은 "처음에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자신이 처리했다."(<한서.곽광전>), 이건 잘못된 일이라 할 수 없다. 한무제의 유명과 부탁이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소제가 성인이 되었으니, 자연히 권력을 되돌려 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곽광은 권력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된다. 곽광이 아직 한나라황실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고, 조정에서 권력기반과 세력이 있었으며, 한소제는 자신의 역량으로 곽광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저 용상에 계속 앉아서 허수아비 황제로 있었다. 이는 마음과 재능이 뛰어난 한소제가 우울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반고가 말한, "효소위임곽광(孝昭委任霍光), 각인기시이성명(各因其時以成名), 대의재(大矣哉)" 이것은 한소제의 어쩔 수 없는 조치일 뿐이다.

 

황제가 권한을 잃고, 한소제는 사생활마저 곽광으로부터 견제를 많이 받게 된다. 한소제가 9살때, 배와 노를 만들어 놀다가 돌아오기를 잊어 밤새도록 놀았다.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자란 한소제로서는 신나게 논 샘이다. 그는 아주 기뻐했다. 그러나 금방 여러 신하들이 간하는 바람에 연못을 메우고, 배와 노도 없앤다. 한소제는 어쩔 수 없이 그만둔다. 여러 신하들을 움직여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곽광 밖에 없다. 그후 십여년간 죽을 때까지 한소제는 다시는 황제로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곽광의 권력농단은 한소제가 놀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후궁문제까지도 간섭했다. 12살때, 한소제가 혼인을 한다.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의 딸을 황후로 맞이한다. 그녀는 곽광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나이 6살의 상관씨가 황후가 된다. 여러가지 인정요소를 제쳐놓더라도, 이것은 확실히 정략결혼이다. 상관황후가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근원이다. 나중에 상관걸 부자는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후 곽광에게 주살된다. "황후는 나이가 어려서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곽광의 외손녀이므로 폐위되지 않았다." 비록 상관황후를 폐위시키지는 않았지만, 이번 변고로, 한소제는 황후를 더욱 멀리하게 된다. 이미 곽광에 대한 불만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상관황후는 어쨌든 곽광의 외손녀이고, 후궁의 최고어른이다. 곽광은 사심으로 "황후가 총애를 독점하고 자식을 낳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다른 후궁들이 황제에 가까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니 황제는 좋아하는 여인들과 지낼 수도 없고, 상관황후와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잤다. 한소제의 심경과 처지가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놀고 싶어도 놀 수가 없고, 후궁을 가까이하고 싶어도 가까이할 수가 없다. 한소제는 권위, 놀기, 애정에서 모두 권신 곽광으로부터 심하게 제약을 받았다. 놀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황제로서 실권을 하나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한을 품을 일이다. 정상적인 남자로서 여자를 거느릴 수 없는 것도 한을 품을 일이다. 이처럼 아무런 존엄도 없고, 아무런 활력도 없는 굴욕적인 처지는 왕후장상만도 못하고, 평민백성만도 못하다. 시간이 오래되자 한소제는 병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소제의 신체에 문제가 나타난 것은 사료의 여기저기서 자잘하게 흔적이 흩어져 있다. <한서.오행지>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원봉4년(기원전77년), 곽광은 아들을 갖게 하고 싶어했다. 황상이 시질(侍疾)이라고 의원이 말하다." <한서.외척전<>에서는 "곽광이 황후가 총애를 독점하고 아들을 갖기를 바랐다. 황제는 당시 '체불안(體不安)'했다. 좌우와 의원들이 모두 그 뜻에 따랐다(阿意)". 여기서 '아'는 영합한다는 뜻이다. 이 내용을 보면 한소제가 소위 '시질'과 '체불안'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한가지 가능성은, 곽광이 이를 과장하여 한소제가 다른 후궁을 가까이 하는 것을 막으려 했을 수 있고, 또 다른 가능성은, 한소제가 확실히 몸이 좋지 않았지만, 그다지 심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에 한소제는 18세였다. 진정 한소제의 병세를 얘기하고, 병세가 심각하다고 얘기하는 문자는 <한서.두주전>에 숨어 있다. "소제 말기, 침질(寢疾). 천하의 명의를 모아서 목숨을 늘이는 방약을 구하였다." 침질은 병세가 중해져서 이미 병석에 누워 있다는 말이다. 이 해에 한소제는 나이가 21살이다.

 

'시질', '체불안'에서 '침질'까지, 단지 3년동안 원래 활발하게 잘 살고 있던 청년황제가 병석에 누웠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곽광이 주공의 덕을 잊어버리고, 정사를 9년간 독단하고, 오랫동안 주공의 역할을 했고, 황상이 이미 약관이 되었지만 정권을 돌려주지 않았다."(<한서.오행지>). 그리고 한소제의 사생활에도 후안무치하게 간여했고, 제한했다. 그리하여 한소제는 말못할 고통을 겪고, 원망을 자기고, 불평불만을 품게 되며, 울고 싶어도 눈물이 없는 상황이 된다. 결국 속병이 들고, 그 병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한소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돌연사망하였지만, 기실 기나긴 기간동안 골병이 든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곽광의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우울하게 살다가 ㅈ구은 것이다. 한소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우울하게 살다간 황제이다.

 

한소제는 권력욕에 휩싸인 곽광의 여러 해에 걸친 압박과 괴롭힘으로 병이 걸려 죽었다. 당시에 이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한서.소제기>에서는 한소제의 죽음에 대하여 모호한 몇 개의 글자만을 남긴다. 대부분은 아마도 곽광이 사관에게 그렇게 시킨 때문인 것이다. 역대의 권력투쟁의 승리자는 모두 그러했다. 그러나 양심이 남아 있고, 기개가 남아있던 사관들은 여러 전,지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 내용은 곽광의 패도와 한소제의 우울함을 기술하고 있다. 어때는 사마천이 죽은 때로부터 아직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