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신릉군(信陵君)은 왜 평생 실권을 잡지 못했는가?

중은우시 2013. 4. 26. 23:34

글: 유연빈(劉宴斌)

 

모두 알고 있다시피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는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신릉군 위무기(魏无己)와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이 네명은 한때 전국시대의 국면과 진전을 변경시켰다. 다만, 이 풍운을 질타한 바 있는 "사공자"가운데, 한 명의 "공자"는 한번도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바 없다. 그는 바로 신릉군 위무기이다.

 

같은 왕실종친인 평원군과 맹상군 두 사람은 선후로 여러번 상(相)에 오른 바 있다; 초왕을 옹립하는데 공로가 있는 춘신군은 국가의 정권을 수십년 장악했다. 그들 3명과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이 일찌기 "절부구조(竊符救趙)"하고 제후와 연합하여 진군을 핍박하여 함곡관에서 물러나게 만든 신릉군은 정치적으로는 약간 처량했고, 한번도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바 없었다.

 

기실, 이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릉군 본인이 책임을 져야할 사항이다. 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은 모두 그 본인의 성격으로 인해서 일어난 문제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이 점을 잘 설명해준다.

 

위무기가 막 신릉군으로 봉한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아무 할 일없이, 신릉군은 자신의 왕형(그의 동부이모 형인 당시의 위왕)을 찾아가서 바둑을 두었다. 두 사람이 한창 재미있게 바둑을 두고 있을 때, 돌연 수성하던 사병이 황망하게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북방변경에서 봉화가 올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조왕이 대부대를 이끌고 위,조의 변경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곧 우리 위나라국경을 넘어올 것이라고 한다.

 

사병의 보고를 받고, 군사상황이 급박하니 위왕은 급히 일어나서, 여러 대신들을 모아 대책을 협의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신릉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정보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다만 사람을 더욱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자신의 왕형을 소맷자락을 붙잡고, 그것은 조왕이 변경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며, 절대로 우리 위나라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니 놀랄 것없다고 하면서, 그를 끌어당여 계속 바둑을 두판이나 더 두었다.

 

자신의 동생을 어찌할 수 없던 위왕은 마음은 딴데 가 있지만, 다시 앉아서 억지로 바둑을 더 두었다.

 

한참이 지나서 바깥에서 한 사람이 급히 뛰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금방 보고한 정보는 잘못되었으며, 조왕이 사냥을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연히 위왕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의 첫번재 반응은 자신과 바둑을 두는 이 동생이 어떻게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까, 설마 그는 추측한 것인가? 그건 불가능하다 그는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문을 신릉군에게 얘기한다.

 

신릉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말한다: "그건 별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의 몇몇 문객이 조왕의 곳과 잘 통합니다. 그래서 긴급한 상황이 있으면 그들이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내어 알려줍니다. 금방 조왕이 사냥한다는 것은 하루전에 내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놀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왕은 자신의 이 동생이 신통력을 듣고 기뻐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식은 땀을 흘렸다. 그는 천리밖에 있는 조왕의 곁에도 눈과 귀를 두고 있는데, 그렇가면 그 자신의 곁에는 얼마나 많은 눈과 귀를 심어두었단 말인가. 자신의 일거일동이 모조리 그에게 알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언젠가 그가 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싶으면 나는 언제든지 피살될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위왕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한다. 그후, 위왕은 지극히 뛰어난 모략과 넓은 인맥을 지니고 있는 동생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후 다시는 위나라의 군국대권을 자신의 이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임금을 모시는 일은 호랑이와 함께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제왕의 앞에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말을 하거나 일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신릉군은 이 부분의 금기를 범했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는 뭐든지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형의 앞에서 말을 많이 한 덕분에 자신은 평생 국가의 실권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고, 남들이 주목할만한 정치적 업적을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