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춘추시대 며느리를 처로 삼은 황당한 국군들

중은우시 2013. 11. 9. 23:54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중국고대4대미녀중 양옥환이 있다. 그녀는 당현종 이융기의 비이다. 그녀는 당시 최고미녀였고, 당현종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아 귀비에 봉해진다. 그녀는 원래 이융기의 며느리이다. 당현종은 머리를 쓰고 수단을 써서 그녀를 차지한다. 춘추시기 이런 국군이 여러 명 있었다. 원래는 자신의 아들의 처로 받아들였으나, 그 여자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아들을 제치고, 자신이 처로 삼아버린 것이다. 시대적인 요소로, 그들은 당현종처럼 우회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다. 당현종은 먼저 양옥환을 출가시켰다가 다시 환속시켜서 다시 자신의 궁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는 바로 처로 삼았고, 조금도 감추려 들지 않았었다.

 

위선공(衛宣公)

 

위선공은 기원전718년 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한다. 그는 아들인 공자급(公子伋)에게 제나라 제희공(齊僖公)의 딸인 선강(宣姜)을 구해준다. 아직 아들과 선강이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위선공은 이 여자가 실로 너무 예쁜 것을 보고는 좋아하여 자신의 처로 맞아들이고 만다. 그 후에, 위선공은 아들 공자급을 위하여 다른 여자를 하나 구해준다. 이 위선공은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의 음탕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일지기 공자로 있을 때, 위선공은 부친 위장공의 첩인 이강(夷姜)과 사통했다. 이 공자급은 바로 그와 이강과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다. 국군이 된 후, 원부인인 형씨(邢氏)는 총애를 받지 못하여, 공자급이 세자로 봉해진다. 며느리를 빼앗을 때, 이 이강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수(淇水)의 가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높은 대를 마련해주는데, 역사서에서는 신대(新臺)라 부른다. 그리고 신대에 선강과 함께 산다. 시경에는 <북풍.신대>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이야기를 얘기하는 것이다. 얼마 후, 선강은 위선공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는다. 공자수(公子壽)와 공자삭(公子朔)이다. 공자급의 모친이 사망한 후, 위선공은 선강을 정부인으로 앉힌다. 이 선강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공사삭과 위선공의 앞에서 공자급에 대한 나쁜 말을 많이 한다. 위선공은 자신이 세자의 처를 빼앗아 온데 대하여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 아들을 눈엣가시로 여겨서 시시때때로 이 아들을 괴롭히고, 이 아들을 아주 미워했다. 그리하여 그를 폐위시킬 생각만 했다. 그리하여, 위선공은 이유를 하나 찾아서, 태자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변경에서 그를 제거해 버리고자 한다. 위선공은 공자급에게 백모(白旄) 사절(使節)을 주어서 보내고 도적에게 암중으로 명령하여, 변경에서 그를 막아서, 손에 백모 사절을 든 사람을 죽여버리도록 한다.

 

공자급이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선강이 낳은 큰아들 공자수가 이 음모를 공자급에게 얘기해준다. 그리고 그에게 가지 말라고 권한다. 공자급은 말한다: "부친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려 하다니, 그게 될 말인가?" 그리고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제나라로 떠난다. 공자수는 공자급이 그가 말리는 것을 듣지 않자, 마중한다는 명복으로 연회를 베풀어 공자급을 술에 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백모사절을 훔쳐서 공자급보다 먼저 변경에 도착한다. 도적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공자수를 죽여버린다. 공자급이 도착한 후, 도적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죽여야 될 사람은 나다." 도적들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공자급도 죽여버린다. 위선공은 공자삭을 세자로 삼는다. 다음 해 위선공이 죽고, 세자 삭이 국군이 되니, 그가 바로 위혜공이다.

 

노혜공(魯惠公)

 

노혜공은 성이 희(姬)이다. 이름은 불황(弗湟)이라고 한다. 노나라의 13대 국군이다. 그의 정부인인 맹자(孟子)는 아들이 없었다. 성자(聲子)라는 첩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이름이 식(息)이다. 말년에, 노혜공은 아들 식을 위하여 말녀(末女)를 처로 삼게 해주려 한다. 후인들이 그녀를 중자(仲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중자가 노나라로 왔을 때, 노혜공은 말자가 아주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그녀를 자시의 것으로 삼아, 부인으로 봉한다. 나중에 이 중자는 다시 아들을 하나 낳는다. 이름이 윤(允)이다. 식은 태자가 아니었고, 그의모친은 정부인이 아니었으므로, 당시의 법도에 따라 윤이 태자로 봉해진다. 이 노혜공은 46년간 재위하였고, 재위기간동안 황당한 일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느리를 빼앗은 황당한 일때문에 역사에 악명을 남기고, 공자식에게 살신지화가 미친다.

 

노혜공이 죽은 후, 윤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노나라 사람들이 같이 협의하여 식으로 하여금 국정을 대리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윤이 세자였으므로 식은 대리라 한 것이고, 즉위라고 하지 않았다. 사후에도 노은공(魯隱公)이라 칭한다. 이 식은 국군의 자리에 그다지 야심이 없었다. 11년간 대리국군으로 있다가 말려가 낳은 아들 자윤이 어른이 되자 그에게 국군의 자리를 넘겨준다. 그러나, 세상에는 일을 만들어 자신의 사리를 도모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노나라에 공자휘(公子揮)라는 사람이 있었다. 노은공11년 겨울, 공자휘는 노은공에게 은근히 이렇게 진언한다: "백성들은 당신이 국군으로 있는 것이 백성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대리국군으로 있지 말고 정식국군이 되라. 당신은 윤을 죽여버리고, 나를 국상(國相)으로 삼아달라." 노은공은 동의하지 않는다. 군군은 운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 자윤이 이미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으니 그는 자윤에게 정권을 넘길 예정이라고 한다. 자신은 노년을 보낼 곳을 찾아가면 된다고 한다. 공자휘는 자신이 한 말때문에 자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겁을 벅는다. 오히려 자윤에게 은공에 대한 나쁜 말을 한다: "자식은 당신을 제거하고 국군이 되고자 합니다. 이 일을 잘 생각하십시오 내가 그를 죽여버리겠습니다." 자윤은 동의한다. 그리하여, 공자휘는 노은공을 죽여버리고, 자윤을 국군에 앉힌다. 그가 바로 노환공이다.

 

초평왕(楚平王)

 

초평왕의 이름은 기질(棄疾)이라고 한다. 초공왕(楚共王)의 아들이다. 그는 자신의 형인 초령왕(楚靈王)과 또 다른 두 형을 죽였다. 한 명은 이미 초왕에 오른 형 공자비(公子比)이고, 다른 한 형은 자석(子晳)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초왕의 자리에 오른다. 평왕2년(기원전527년), 초평왕은 비무기(費无忌)를 진(秦)나라에 파견하여 태자건(太子建)의 처를 구해주려 한다. 이 진나라의 여인은 백영(伯嬴)이라고 부르고 미모가 뛰어났다. 영친(迎親)인원들이 아직 초나라의 수도인 영도(郢都)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무기는 한발 먼저 돌아와서 초평왕을 부추긴다: "진나라여자는 경성경국의 미인입니다. 당신이 가질 수 있습니다. 태자를 위하여는 다시 다른 여자를 구해주면 됩니다." 초평왕이 동의한다. 그래서 자신이 백영을 취하고 태자를 위하여는 다른 여자를 구해준다. 얼마후 이 백영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웅진(熊珍)이다. 그가 바로 나중의 초소왕(楚昭王)이다. 이 비무기는 왜 이렇게 후안무치한 말을 했을까? 원래, 그는 태자건의 소부(少傅)였다. 태부(太傅)는 바로 오자서(伍子胥)의 부친인 오사(伍奢)였다. 비무기는 무슨 재주를 가진 것이 아니어서, 태자가 그를 무시했다. 그래서 비무기도 자주 태자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한 것이다.

 

4년이 지나자, 초평왕은 태자건을 변방의 성읍인 성보(城父)라는 곳으로 보내어 변방을 지키게 한다. 비무기는 더욱 심하게 초평왕에게 태자건에 대한 나쁜 말을 한다: "군왕께서 태자의 처를 취했는데, 그가 원망하지 않을 것같습니까. 현재 태자가 바깥에 있고 매일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제후들과 내왕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국군의 자리를 빼앗을까와 우려됩니다." 초평왕은 그 말을 듣고 아주 겁을 먹는다. 당시 그도 병력을 데리고 바깥에 있으면서 초왕의 자리를 그렇게 빼앗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사를 불러들여 책망한다. 그가 태자를 잘 교육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후 오사 및 그의 장남을 죽여버린다. 초평왕은 다시 사마분양(司馬奮揚)을 보내어 태자건을 죽여버린다. 사마분양은 태자건을 동정하여 고의로 소식을 흘려서 태자건은 송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초평왕은 13년간 재위하고 죽었을 때는 평안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후는 그렇지 못했다.오사의 차남 오자서가 오나라로 도망쳐서, 오왕 합려를 도와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마침내 초평왕이 죽은 후 10년만에 초나라의 수도 영도를 함락시키고, 초평왕을 무덤에서 꺼내어 오자서는 채찍으로 시신을 때려 분을 푼다.

 

진문공(晋文公)

 

종법제도에 따르면, 조카도 아들이다. 그래서 윗대의 사람들이 아랫대의 사람을 부를 때 질자(侄子) 혹은 질아(侄兒)라고 부른다. 아랫대의 사람은 윗대의 사람을 백부(伯父) 혹은 숙부(叔父)라고 부른다. 진문공은 조카며느리를 처로 삼는다. 이것도 며느리를 처로 삼는 것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다.

 

진문공의 이름은 중이(重耳)이다. 진헌공(晋獻公)의 아들이다.  진헌공은 여희(驪姬)를 총애하여, 태자 신생(申生)을 죽이고, 중이와 동생 이오(夷吾)는 유랑을 떠나게 된다. 진헌공이 죽은 후, 진나라의 대신들은 먼저 여희와 그녀의 여동생이 낳은 두 아들을 죽이고, 이오를 모셔서 진나라 국군으로 삼는다. 그가 바로 진혜공(晋惠公)이다. 진혜공은 형이 그의 정권을 빼앗으로 올까봐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 그를 추살하려 한다. 중이는 망명길을 떠난다. 진혜공이 국군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진(秦)나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진나라에 토지를 할양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군이 된 후에는 후회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진(晋秦) 두 나라의 관계는 긴장된다. 진(秦)나라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진혜공은 자신의 아들 태자어(太子圉)를 진나라에 인질로 보낸다. 13년, 진혜공은 병이 위중해지고, 태자어는 대신들이 다른 공자를 국군으로 세울까 우려하여, 몰래 진(晋)나라로 돌아간다. 그리고 처는 진(秦)나라에 남겨둔다. 진혜공은 재위14년만에 죽고, 태자어가 즉위한다. 그가 바로 진회공(晋懷公)이다. 진나라에 남겨둔 여자는 이름이 회영(懷嬴)이라 한다.

 

태자어가 도망치자, 진(秦)나라는 아주 분개한다. 그래서 중이를 찾아서 그를 진나라의 국군으로 앉히려고 생각하게 된다. 중이가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목공은 종실의 5명의 여자를 중이에게 처로 준다. 그 중에는 진혜공의 처인 회영도 들어 있었다. 진문공은 국군의 자리를 위하여 이 여자를 처로 취한다.

 

당연히 진문공 중이가 조카며느리를 처로 삼은 것은 위의 3명의 며느리를 처로 삼은 국군들보다 더욱 후안무치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조카며느리는 이미 태자어에게 시집을 갔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진목공의 입장에서 보면 원인과 고충이 있다. 그는 중이를 국군으로 세우고 싶었다. 진회공 어는 반드시 폐위시켜야 했다. 폐위된 국군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 것인지는 누구든 잘 알고 있다. 과연 중이는 귀국하여 국군에 오르자마자 바로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조카인 어를 죽여버린다. 회영은 진목공이 사랑하는 딸이다. 그는 이 딸이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할까 겁을 냈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억지로 중이에게 보내어 처로 삼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다섯 여자를 묶어서 함께 중이에게 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스스로의 격을 낮추어 부탁하는 것이다. 중이는 국군의 자리를 위하여 수행대신의 의견을 들은 후, 이 여자를 받아들였을 뿐아니라, 그녀를 정부인으로 삼는다. 보기에 도덕인륜방면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사람은 바로 중이이다.

 

기실, 우리만 중이를 질책하는 것은 아니다. 사학자들도 그를 책망했다. <좌전>에서 이 이야기를 쓸 때 네 글자를 쓴다: "회영여언(懷嬴與焉)". <사기>에는 특별히 이렇게 썼다: "고자어처여왕(故子圉妻與往)". 만일 그들이 이에 불만을 품지 않았더라면 이 일을 아예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제후국의 군주가 처를 취하는 경우는 너무나 많지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얼마나 되는가? 특히 <좌전>에서는 이 진나라여인을 '회영'이라 칭했는데, 그것은 이 여인이 바로 진회공의 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진문공이 아무리 진나라의 현공자이건 춘추의 패주이든간에 이 성격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 시대에 군부(君父)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의 어떤 결정도 아들은 따라야 한다. 이것은 바로 부친에 의하여 처를 빼앗기고도 반항한 사람이 전혀 없는 이유이다. 다만, 부친으로서 먼저 아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인륜의 정상관계를 문란하게 해서는 안된다. 춘추시대라고 하여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들 며느리를 처로 삼은 군주는 살아있을 때는 응보를 받지 않았지만, 그들의 아들들은 최후가 아주 처참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잘못이 심은 씨앗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