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섭지추(葉之秋)
조씨(趙氏)는 조(趙)나라의 창립자이다. 춘추시기에 진(晋)나라때부터 흥기했다. 그중 진경공(晋景公)시대에 한때 멸문을 당하였고, 단지 조무(趙武) 한 사람만이 남는다. 그러나 조씨는 다시 왕년의 영광을 회복한다. 마지막에는 삼가분진(三家分晋)하여 조(趙)나라를 건국한다.
그렇다면, 조씨는 어떻게 멸문되고, 또 어떻게 지위를 회복했는가?
조씨가 진나라때 흥성한 첫번째 공은 조쇠(趙衰)에 있다. 조쇠는 공자(公子) 중이(重耳)를 쫓아서 열국으로 19년간 도망다니다 결국 진나라로 되돌아오고 중이를 도와 국군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가 진문공이다. 진문공이 왕위에 오르자, 그 최고의 공로는 조쇠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쇠는 국정을 장악한다. 조쇠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순(趙盾)은 작위를 승계하고, 계쏙 국정을 장악한다.
조쇠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당시 조쇠가 관직에 나가려 할 때 점을 친 바 있다. 자신이 국군을 따라가야 하는지, 아니면 국군의 어느 공자를 따라가야 하는지. 그 결과 여러 사람들은 모두 흉조이고, 공자 중이를 따랐을 때 대길(大吉)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조쇠에게 재주가 있었던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충신인가? 아니다. 조쇠가 충성한 것은 진문공이 아니다. 진문공이 그에게 준 권세이다.
권세는 조쇠 본인이 계속 분투하는 마지막 목표이다. 더더구나 진나라의 군신, 심지어 천백년이래 소위 명군현상(明君賢相), 충신양장(忠臣良將)이 분투한 최종목표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의 사람이 있을까? 있다. 그러나 적어도 너무 적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단지 더욱 자신의 권세를 위하여 혹은 자기 가족의 권세를 계속하기 위하여 행동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권세에 열중하고, 권모술수에 정통한 조씨일문은 왜 멸문되었을까?
윈인의 하나. 조씨 특히 조순의 권세가 지나치게 컸다.
조쇠가 죽은 후, 조순은 국정을 2년간 관장하고 진양공(晋襄公)이 죽었다. 후계군왕을 결정할 때, 조순은 일찌기 태자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맞이하려고 고려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태자의 모친이 밤낮으로 울고, 태자모친 일족의 세력이 두려워 태자를 군왕으로 올린다. 그가 진령공(晋靈公)이다. 이렇게 하여 진령공은 즉위초기에 조순과 갈등이 생긴다. 게다가 진령공은 호색하고 음탕했다. 조순은 여러번 간언했다. 진령공이 자란 후, 진령공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조순을 암살하고자 한다. 조순은 어쩔 수 없이 도망친다. 그의 동생인 조천(趙穿)은 군대를 이끌고 궁문으로 진입하여 진령공을 죽이고 새로운 국군을 세운다. 그가 진성공(晋成公)이다. 군신간의 불화가 이 정도에 이르렀다. 진령공때, 조순의 일문은 이미 권세가 조야를 뒤흔들었다. 진성공때는 더더욱 중천에 뜬 해와 같았고, 한창 잘나갔다. 진성공은 즉위할 때 이미 성년이었고, 여전히 정사는 조순에게 맡겼다. 당연히 이는 진심이 아니고 조씨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진성공 육년 조순이 사망하고, 이년후 진성공이 사망한다. 그리고 진경공(晋景公)이 즉위한다.
진경공3년, 도안가가 조씨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원인의 둘. 조씨를 반대하는 세력이 강대했다.
조씨, 특히 조순은 근 20년간 진나라의 국정을 장악했고, 권세가 아주 컸다. 일단 사망하자, 왕년의 정적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춘추시대의 진나라는 삼군육경(三軍六卿)이 공동으로 국정을 관리했다. 조순이 정경(正卿)을 맡았지만, 진나라에는 여전히 다른 귀족들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반조세력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은 당연히 진령공시대를 대표하는 국군세력이다. 천백년이래, 군권과 상권은 상보상성(相輔相成)했으며, 수화불용(水火不容)하기도 했다. 하물며 춘추시기였다. 그리고 조순이 죽은 후, 정경을 맡고 국정을 장악한 사람은 그의 아들 조삭(趙朔)이 아니라, 극결(郤缺)이다. 조순의 사후, 조씨일문의 권력은 거대한 낙차가 발생한다. 한쪽이 내려가면 다른 쪽이 올라간다. 일시간에 조씨집안은 곳곳이 위기에 휩싸인다.
도안가는 육경이 아니었고, 독립한 정치세력이 아니었다. 그저 진경공의 총애를 받아서, 완전히 진경공의 화신으로 보았다.
조씨를 멸한 직접적인 원인에 대하여 <사기>와 <좌전>은 서로 다르게 적고 있다.
<사기>버전에서는 진경공이 즉위한 후, 도안가를 사구(司寇)로 삼는다. 그는 진나라이 사법업무를 책임진다. 진경공의 뜻에 따라, 당시 진령공이 피살된 사건을 조사한다. 비록, 진성공의 즉위초기, 이미 공개적으로 조순은 충신이고 시군(弑君)과 관계없다고 표시한 바 있지만. 조천은 시군하였지만, 국가에 공로가 있는 점을 감안하여 대죄입공(戴罪立功)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달라졌고, 조순의 시대는 이미 흘러갔다. 진경공은 옛날의 사건결론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를 가지고 조씨의 일족을 멸문시킨다. 체포하기 전에, 도안가는 죄명을 여러 장수들에게 알려준다. 단지 한궐(韓厥)만은 다른 생각을 나타낸다. 만일 국군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 신하들이 이렇게 찬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씨는 멸족당했다.
<좌전> 버전은 이렇다. 조순의 아들 조삭이 죽은 후, 조삭의 숙부인 조영제(趙嬰齊)은 조삭의 처 즉, 조카며느리인 조희(趙姬)와 간통을 했다. 조씨일문은 이에 대하여 불만이 아주 컸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조영제를 진나라에서 쫓아낸다. 조희는 이를 가슴에 한으로 품었다. 그리하여 진경공에게 진언한다. 조괄(趙括), 조동(趙同)이 모반을 하고자 했다고. 그리고 조씨와 불화관계에 있는 난씨(欒氏), 극씨와 함께 진경공에게 압력을 가한다. 그리하여 진경공은 조씨를 모반죄로 멸족시킨다.
두 판본은 시간적으로 12년의 차이가 있다. <사기> 버전에 따르면, 조씨를 멸하고, 조씨가 회복한 것은 모두 진경공때이다. 그러나, <좌전>에 따르면, 진경공이 조씨를 멸하고, 후계군왕이 조씨를 회복시켰다.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린지,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그러나 조씨가 멸문당한 근본원인은 일치한다. 두 가지 주장을 종합하면 아마도 진상에 더욱 근접할 것이다. 조순의 사후 십여년, 조씨일문의 세력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조삭은 젊어서 죽었다 이는 조씨일문에 더욱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기에 조씨는 내부가 불화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다른 귀족들에게 먹힌 것이다.
역사상 도안가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도안가가 소인 간신배라고 본다. 진경공의 총애를 믿고 공신을 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도를 바꾸어 보자면, 도안가는 진나라 국군에 충성했다. 그리고 엄격하게 법을 집행했다. 당시 조씨가 군주를 시해한 것에 대하여는 역사가들이 일찌감치 결론을 내렸다. 조순은 비록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막후에서 지휘를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군주를 시해하였다면 멸문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조씨는 세력이 너무 커져서 이미 국군의 권력을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였다. 진나라의 천추만대를 위하여는 반드시 조씨를 죽여야 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당연히 도안가 본인의 인품이 어떠하든지간에, 재능이 어떠하든지간에, 역사의 평가는 항상 성왕패구(成王敗寇, 이기면 왕이고, 지면 도적이다)이다. 진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조씨는 결국 조나라를 건립한다. 일지기 조씨를 박해했던 도안가는 악명을 뒤집어쓰고, 후화되고 요마화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선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궐(韓厥)은 왜 조씨고아의 부흥을 도와주었는가? (0) | 2013.04.13 |
---|---|
한위조(韓魏趙)에 멸망한 지백(智伯)은 소인인가 군자인가? (0) | 2013.04.13 |
육권(鬻拳): 초(楚)나라의 무사도(武士道) (0) | 2012.09.19 |
육웅(鬻熊): 도가의 비조(鼻祖) (0) | 2012.09.19 |
기해(祁奚): 외거불피구(外擧不避仇), 내거불피친(內擧不避親) (0) | 2012.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