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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문제)

수문제: 남북을 통일시킨 웅재대략

by 중은우시 2013. 4. 15.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581년, 양견은 북주정제를 폐위시키고, 수왕조를 건립하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 한다. 곧이어 각지의 할거정권을 소멸시키고, 위진남북조이래 3백년간의 천하대란과 남북분열현상을 종식시킨다. 그는 화하를 통일시키는데 불후의 공헌을 세웠다. 동시에 수문제는 여정도치하여 전란과정에서 건립한 수왕조는 통치를 잘하여, 국고가 충실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아,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각 분야에서 모두 큰 발전을 이룬다. 어떤 사가는 수문제시대를 '개황지치"라 부르기도 한다.

 

수고조 문황제 양견의 아명은 나라연(那羅延)이다. 홍농 화음(산서성 화음 동쪽) 사람으로, 대대로 무천진(지금의 내몽고 무천 서쪽)에 거주했으며 동한의 태위 양진(楊

震)의 후손이다. 부친 양충(楊忠)은 북주의 공신으로 관직이 국주, 대사공에 이르고 수국공(隨國公)에 봉해진다. 서위 대통7년(541년), 양견은 풍익반야사에서 태어난다. 태어나면서 기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하동에서 온 비구니가 별관에서 길렀다. 부친의 공로가 높다보니, 양견은 15세에 산기상시, 거기대장군의 직위를 받는다. 16세때는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한다. 561년, 주무제 우문옹이 즉위하고, 20세의 양견은 수주자사가 되고 대장군이 된다. 양견이 계쏙 승진할 때 북주이 팔대주국(柱國)중 하나인 독고신은 양견의 전도가 양양하다는 것을 보고, 14살된 작은 딸 독고가라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이 여자가 바로 나중에 양견과 함께 "이성(二聖)"이라 칭해지는 독고황후이다. 독고씨의 언니는 주명제의 황후이므로 양견은 황친이 되고 지위는 더욱 혁혁해진다. 양충이 병사한 후, 양견은 수국공의 작위를 승계한다. 577년, 양견은 주무제를 따라 제(齊)를 멸한다.이때 공로를 세워, 주국(최고무관)에 오른다. 그리고 정주총관이 된다. 얼마후 박주총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지위가 계속 올라가면서, 양견은 대신들의 질투를 받게 된다. 우문호가 권력을 농단할 때, 여러번 양견을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주무제때, 일부 대신들은 양견이 반상(反相)을 지니고 있다고 하며 주무제에게 일찌감치 그를 제거할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주무제는 그 건의를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양견의 장녀를 태자비로 삼는다. 이때 직위도 높고 권력도 강해진 양견은 이미 가진 사회적 영향을 이용하에 계속 자신의 세력을 확대한다. 578년, 주무제가 붕어하고 황태자 우문빈이 즉위한다. 역사상 주선제라 칭한다. 양견의 딸은 황후가 되고, 양견은 상주국(上柱國), 대후승(大后丞)이 된다, 얼마저 대전의(大前疑, 승상)으로 승진하여 실권을 더욱 장악한다.

 

양견의 권세가 날로 커짐에 따라 주선제도 그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진다. 얼마후, 황음무도한 주선제는 4명의 총비를 동시에 황후로 앉힌다. 이렇게 하여 양황후와 나란히 황후가 된다. 여러 황후들이 총애를 독차지 하기 위하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할 때 우문빈은 양황후에게 말한다: "반드시 너의 가족을 멸족시킬 것이다" 그리고 양견을 입궁하라고 하면서, 위사들에게 분부한다: "만일 양견의 표정이 격분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라" 그러나, 양견은 입궁후 태연한 태도로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선제도 손을 쓸 수 없었다. 향락을 위하여 주선제는 얼마후 나이 겨우 7살된 아들 우문연에게 양위한다. 그가 주정제이다. 우문빈은 자칭 천원황제라 한다.

 

581년, 주선제가 병사한다. 주정제는 나이가 어려 친정할 수 없게 되어, 양견이 선제황후의 부친, 죄대승상의 명의로 백관을 지휘하고 조정을 총괄한다. 상주(하북 임장)총관 위지형은 거병하며 반대한다. 양견은 위효관을 보내어 평정하고, 위지형을 죽인다. 곧이어 종실인 조왕 우문초등 5왕이 경성으로 불려들어온다. 그후에 하나하나 죽임을 당한다. 양견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후, 신속히 정치적인 식견이 있는 대신들을 기용한다. 그리하여 북주의 가혹한 정치를 바꾸고, 혜민정책을 실시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광명을 본다. 자신의 명성을 크게 높인 후, 자신이 황제를 칭할 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581년 2월, 모신 고영, 양소등이 기획하고 핍박하여, 9살된 외손자 주정제는 40세의 외할아버지 양견에게 선양한다. 양견은 자신의 집안의 '수왕'이라는 작호를 쓴다. 그러나, ""는 "주(走)"와 같은 뜻이어서, 불길하다고 보아, "수(隋)"로 바꾸고 연호를 개황으로 하며, 장안을 수도로 삼는다. 역사상 그는 수문제라 칭해진다.

 

양견이 황제를 칭한 후, 적극적으로 통일대업을 준비한다. 수나라 개황7년(587년), 수문제는 후량효정제 소종을 제거하고, 그후에 거병하여 진(陳)을 멸망시킨다. 개황 9년 저월, 남진이 멸망한다. 이제 삼백년간 계속된 화하분열국면이 종식되고, 전국이 통일된 것이다. 이것은 수문제 양견이 중화민족에 해준 최대의 공헌이다.

 

수왕조가 건립된 후, 수문제는 일련의 정치 및 경제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먼저, 그는 북주의 관제를 폐시했다. 한, 위의 관제의 기초위에서 삼성육부의 중앙기구를 창립한다. 삼성은 상서, 문하, 중서이고, 중서성은 취지(取旨), 문하성은 심의(審議), 상서성은 집행을 했다. 삼성은 마찬가지로 최고정무기구이다. 삼성의 장관은 모두 재상이다. 삼성은 국정의 각 직책을 같이 논의하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대신의 권력독점이 나타날 가능성을 감소시켰다. 상서성의 아래에는 육부를 두었다. 이부, 예부, 병부, 도관(후에 형부로 개칭), 탁지(후에 호부로 개칭) 및 공부이다.매부는 사사(四司)를 관할했다. 이 중앙간부체제는 후세에 미친 영향이 아주 크고 청나라때까지 기본적으로 그대로 사용된다.

 

수문제는 대거 지방행정제도를 개혁한다. 수나라초기이 주,군,현의 3급제를 주, 현의 양급제로 바꾸었다. 이러헥 하여 수만명의 용관(冗官)을 도태시켰고, 대량의 행정비용을 절약한다. 그에 상응하게 인민의 부담도 줄어든다. 동시에, 수문제도 특별히 관리제도를 중시하여 좋은 관리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간사한 관리는 엄히 처벌했다. 여남태수 공손경무가 재직하던 기간동안, 청렴하고 생산을 중시했으며 사회질서도 잘 잡혔다. 수문제는 그를 도주자사로 발탁한다. 글고 그는 청백리의 모범을 만들어, 백관들이 학습하게 한다. 이와 동시에, 수문제는 자주 사람을 보내 전국의 대소관리들의 집정상황을 규찰했다. 죄상을 발견하면 반드시 엄벌했다. 그래서 수문제의 통치기간동안 사회질서는 잘 잡히고, 좋은 관리가 많이 나왔다.

 

수문제는 법제를 강조하고, 선후로 고경, 소위, 우홍등으로 하여금 <신률>을 제정하게 했다. 형벌은 이전 왕조에 비해서는 경감되었고, 교형, 열형등 혹형을 폐지한다. 사형제는 반드시 "대리사가 재검토"하도록 하였다; 모반, 악역, 불효등 '십악'을 열거하고, "십악을 범하고 고의살인을 한 경우에는 사면을 하는 경우에도 제외한다." 이것은 "십악불사"의 유래이다. 후세의 법률은 많은 것이 <수률>을 기초로 수정했다.

 

수문제는 처음으로 선진적인 문관선발제도인 과거제를 창안한다. 개황7년(587년) 조서를 내려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각구군에서 매년 3인을 선발하여 장안으로 보내어 시험에 참가하게 한다.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은 문벌세족이 관료를 독점하는 국면을 타파한다. 빈민 한사들이 관료가 되는 경로가된다. 나중에 수양제의 완비를 거쳐, 수재, 명경, 진사의 삼과로 나눈다. 이런 선진적인 문관과거선발제도는 청나라말기까지 계속된다.

 

양견은 북위이래의 "균전제"를 실시한다. 다만, 조세부담은 이전 왕조보다 경감되었다. 그는 소위의 "경요박부(輕徭薄賦)"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몇번이나 조서를 내려 요역과 조부를 감면한다. 그리하여 농민의 부담이 대거 경감된다.

 

화폐시장의 혼란한 국면에 대하여, 수문제는 명을 내러 다른 고화폐와 사인 주폐를 폐지한다. 단지 새로 주조한 오수전만 시장에 유통시킨다. 동시에, 도량형을 새로 제정한다. 이들 조치의 실시는 크게 공상업의 발전을 추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