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문제)

수문제(隋文帝)가 첩을 두지 않은 이유는?

중은우시 2008. 3. 3. 03:02

글: 노아평(盧雅萍)

 

지금까지, 사람들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첩을 들이지 않은 이유를 그가 처인 독고씨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원래 양견이 첩을 들이지 않은 것은 양견 자신의 뜻이고, 또한 양견의 부친인 양충(楊忠)의 뜻이었다. 양씨집안은 고귀한 집안의 여인과 결혼하고 싶어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하루빨리 조정의 권력핵심에 들어가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어느 왕실의 공주가 남편이 첩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어느 공주가 남편을 다른 여인과 나누어 가지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당시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왕실귀족자제들은 첩을 두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정실부인을 맞이하기 이전에 이미 첩을 두거나, 여러명의 첩을 두었고, 자식까지도 낳았다.

 

여기에는 물론 당시 시대배경이 있다. 서위(西魏)와 북주(北周)시기에, 조정은 자주 대외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중에 남조 양(梁)나라의 왕공귀족과 그들의 미모가 뛰어나면서도 글을 아는 한족 여자들을 붙잡아 왔다. 그녀들은 거의 모두 북방왕실과 그들 자제의 노비나 첩이 되었다. 이들 여인들은 고귀한 혈통을 지녔기 때문에 첩으로 환영받았다.

 

예를 들자면, 북주의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은 10여세때 이미 남조 '죄신(罪臣)'의 딸인 이아자(李雅姿)를 첩으로 들였고, 그녀와의 사이에 장남을 낳았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돌궐공주(突厥公主)를 정실부인으로 맞이한다. 다른 많은 왕실자제들도 이러했다. 당시는 출신이 고귀한 여자를 정실부인으로 삼고, 예쁜 평민의 딸이나 전쟁중에 포로로 잡은 남조왕실여인을 첩으로 삼았던 것이다.

 

양충은 당시에 아직 수국공(隋國公)에 봉해지지 않았을 때였고, 매일 바깥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30여세가 되어서야 겨우 적장자 양견을 낳는다. 이치대로라면 그는 하루빨리 손자를 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양충은 양견에게 일찌감치 첩을 들여주어 양씨집안의 대를 잇게 하지 않은 것일까?

 

원래 양씨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관리를 지냈었다. 한나라의 태위(太尉) 양진(楊震)이 바로 양씨의 조상이다. 한나라이래로 대대로 문벌귀족이었으며, 여러 조상들이 조정의 삼공등 요직을 지냈다. 그런데, 북방선비족정권인 서위와 북주에 이르러 대재상인 우문태(宇文泰)를 따르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한족집안들은 선비족귀족들에게 중용되거나 신임을 받지 못했었다.

 

양충에게는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다. 그는 양씨집안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독특한 심계와 멀리내다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이미 성인이 된 적장자 양견에게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아들의 정치적인 앞날을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들이 당시 권력중심에 있던 선비족 귀족의 딸과 혼인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남북조시대에 북방유목민족이 중원을 차지했고, 국가의 주요한 정권은 대부분 선비족 귀족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의 정치적 앞날을 고려한다면, 한족인 양씨집안은 반드시 선비족의 왕공귀족과 혼인하여야 했고, 왕실의 여인을 처로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하여야만 아들 양견의 미래가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 될 것이고, 비로소 정치권력중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선비족귀족, 서위와 북주의 공주들, 다른 왕공귀족의 딸들은 일반대신의 집안에 시집을 간 후에 많은 경우에 시집과 트러블이 생기고, 심지어는 분쟁으로 조정에 고발하기까지 하였으며, 결국은 시집이 망하거나 멸문지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싸우게 되는 주요한 도화선은 바로 시집가기 전에, 남편에게는 이미 여러 첩과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왕실의 여인들은 남편이 첩과 서자들을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질투에서뿐아니라, 자신의 신분이 남편보다 고귀하다는 점에서 남편과 첩 및 그 자식들을 얕보는 것도 이유중 하나였다.

 

사실, 여기에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선비족 귀족여자들은 문화배경이 달랐고, 그녀들은 개성이 강했다. 그리하여, 자유, 독립, 그리고 애정을 중시했다. 그녀들은 당연히 다른 여자와 남편을 함께 나누어 갖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당시 많은 왕실여인들은 대신의 집안으로 시집가기 전에, 남편집안에 먼저 이전의 첩들을 내보내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첩들이 낳은 서자들은 배척되고 억압받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왕실여인은 아예 남편이 될 사람이 첩을 들이거나 자식을 낳은 적이 없을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정치권력중심에 아직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양씨집안으로서는 왕실의 여인을 맞이하려면 최소한 아들로 하여금 정실부인을 들이기 전에 첩을 들이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양충은 중년에 자식을 얻었고, 양견은 그의 적장자이다. 장래에 양씨집안의 모든 관직과 작위는 그가 물려받을 것이다. 심계가 깊은 양충은 자연히 양견에게 이런 점을 주지시켰다. 사내대장부로서 큰 일을 하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과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왕실과 중신의 딸을 취한다면, 비록 양충의 대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하더라도, 그의 아들인 양견의 대에서는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또한 양견까지도 두각을 못나타낸다고 하더라도, 손자대에 이르러서는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일어날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선비족의 삼공중신이며 서위의 병마를 장악하고 있던 대사마(大司馬) 독고신(獨孤信)의 딸인 독고가라(獨孤伽羅)가 양견에게 시집을 오고자 한 것이다.

 

이뿐아니다. 양충은 장남인 양견에게 첩을 들이지 못하게 했을 뿐아니라, 그의 세 아들 모두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장남인 양견은 선비족 귀족인 대사마 독고신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고, 차남은 북주의 공주의 손녀인 위지형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았으며, 삼남은 북주 무제의 여동생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양견이 결혼전에 첩을 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것이다. 결혼전에 첩을 들이지 않는데, 공처가이기때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정치적 야망이 있던 양견은 미래를 위하여, 결혼후에도 계속 첩을 들이지 않았고, 처인 독고가라에게 "일생동안 배다른 자식은 낳지 않겠다"고 맹서까지 한 것이다.

 

남편이 자기 한 사람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고가라는 결혼후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남편을 도왔고, 결국은 수나라를 세우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천고대업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