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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문제)

수문제의 다섯 아들...

by 중은우시 2018. 7. 28.

글: 풍현일(馮玄一)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은 웅재대략의 군주이다. 그는 수나라를 건립했고, 다른 지방할거세력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한다. 그후에 제도를 창건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금방 국가의 흥성과 번영을 회복한다. 그러나 그의 둘째아들 양광(楊廣)이 즉위한 후, 대거 토목공사를 벌이고, 백성을 수탈하며, 대외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국가의 인력물력을 모두 낭비해버린다. 수문제 양견이 힘들게 만들어놓은 수나라는 이렇게 양광에 의해서 신속히 패망한다. 대업말기, 풍운의 반란이 전국을 석권한다. 수양제는 만회할 힘이 없었다. 강도(江都)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된다. 비록 참혹하게 죽었지만, 수양제는 강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에게 있어서 강도에서 죽은 것은 아마도 괜찮은 결말이었던 듯하다.


양광은 수문제 양견의 둘째아들이다. 아마도 정말 후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왕가에서 태어난 것이 행운은 아닐 수 있다. ㅅ문제 양견과 황후 독고씨는 모두 5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이 5명의 아들은 모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정말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아들 양광의 최후는 부하에게 피살당한 것이다.


큰아들 양용(楊勇)은 원래 좋은 남자였다. 용모도 준수하고, 학문을 종하앴으며, 사부(詞賦)를 잘 지었다. 성격은 관후하고 온화하며 솔직했다. 사람됨이 일부러 꾸미고 하진 않았다. 수문제는 그를 태자로 세운다. 그러나, 양광과의 투쟁에서 실패했고, 태자에서 폐위되어 서인이 된다. 양광이 즉위한 후, 그는 즉시 수문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양용을 사사한다.


셋째아들 양준(楊俊)은 진왕(秦王)에 봉해진다. 처음에 양준의 명성은 아주 좋았다. 수문제도 조사를 내려 그를 칭찬하고 상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점점 사치하고 부패해갔다. 여러번 궁중제도를 어겨서, 수문제는 그에게 크게 실망한다. 개황17년(597냔) 수문제는 그의 관직을 삭탈한다. 그래도 양준은 회개하지 않고 나쁜 짓을 다하다가 비(妃)에게 독살당한다. 개황20년 사망하니 향년 30세이다.


넷째아들 양수(楊秀)는 성격이 포악했고, 심지어 "사형수를 해부하여 쓸개(膽)를 꺼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그는 월왕(越王)이 되고 나중에 촉왕(蜀王)으로 바뀐다. 양광이 황태자에 오른 후, 양수는 양광이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는다. 양광은 이로 인하여 그의 관작을 박탈하여 서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를 내시성(內侍省)에 연금한다. 618년, 우문화급이 수양제를 죽이고, 양수를 황제에 앉히려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고, 양수와 그의 일곱아들은 모조리 살해당한다. 당시 나이 46세이다.


다섯째 아들 양량(楊諒)은 한왕(漢王)이 된다. 인수4년(604년), 양광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얼마후 양소(楊素)가 병력을 이끌고 와서 진압한다. 그 후에 유폐되었다가 죽는다. 죽을 때 나이 겨우 31살이다.


일대명군 수문제는 독고황후와의 사이에 5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한 명도 선종(善終)하지 못했다. 수양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형제간의 상잔으로 죽었다. 이를 보면 황자간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제왕가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좋은 일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