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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문제)

양견: 수당성세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

by 중은우시 2013. 7. 12.

글: 일득재주(一得齋主) 

 

양견(楊堅), 수나라의 개국황제이다. 한족이며, 홍농군 화음(지금의 섬서성 화음현) 사람이다. 한나라때의 태위 양진(楊震)의 14대손이다. 그는 재위기간동안 백년동안 심각하게 분열되었던 중국을 성공적으로 통일시킨다. 그리고 선진적인 관리선발제도를 시작하고,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중국을 성세의 나라로 만든다. 수문제(양견)의 재위기간동안, 수왕조 개황연간에 강역이 광활하고, 인구는 700만여호에 달한다. 인류역사상 농경문면의 최고봉인 시기이다. 양견의 서방인의 눈에 가장 위대한 중국황제이며 "성인가한(聖人可汗)" 으로 일컬어진다.

 

양견의 부친 양충(楊忠)은 북주의 태조를 따라 관서에서 의거를 일으킨다. 그 공로로 보욕여(普六茹)씨의 성을 하사받는다. 지위는 주국(柱國), 대사공(大司空), 수국공(隨國公)에 이른다. 죽은 후, 태보(太保)에 추증되고 시호는 환(桓)이라 한다. 양견은 부친의 작위를 세습하였다. 그는 "제왕의 곁에 있으면서, 호랑이와 함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는다. 제왕 우문헌은 일찌기 무제 우문옹에게 말한다: "보육여견(普六茹堅, 양견)은 용모가 비범하다. 신이 매번 볼 때마다 부지불식간에 모자람을 느낀다. 그는 남의 아래에 있을 자가 아니니, 하루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 원래 우문옹도 양견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문헌의 말을 들은 후 더욱 의심하게 된다.

 

다만 양견을 제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백하대부 내화(來和)에게 묻는다. 내화도 양견이 비범하다고 말한다. 다만 암중으로 자신에게도 퇴로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거짓말을 한다: "양견이라는 사람은 믿을만 합니다. 만일 황상이 그를 장군으로 삼으면 병력을 이끌고 진(陳)나라를 공격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함락되지 않는 성이 없을 것입니다." 양견은 이렇게 하여 살신지화를 면한다.

 

우문옹은 그래도 안심되지 않았다.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관상가인 조소(趙昭)에게 몰래 양견의 관상을 보게 한다. 조소는 양견과 사이가 좋았다. 우문옹의 앞에서 양견의 얼굴을 관찰하는 척하고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한다: "황상,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양견의 상모는 아주 평범합니다. 큰 부귀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대장군입니다." 이렇게 하여 양견은 다시 한번 험관을 넘는다.

 

이때, 내사 왕궤(王軌)가 다시 우문옹에게 진언한다: "양견의 용모는 반상(反相)입니다" 그 말에 숨은 의미는 하루빨리 양견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우문옹은 관상가인 조소의 결론을 믿어 의심치 앖았으므로,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말한다: "정말 천명이 정해준 것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이렇게 하여 양견은 다시 한번 위기를 넘겼다.

 

우문옹의 사후, 아들 우문빈이 즉위한다. 양견의 장녀가 후비로 된다. 양견은 주국대장군, 대사마에 오른다.

 

우문찬은 양견에 대한 의심이 더욱 컸다. 그는 일찌기 직설적으로 양비(楊妃)에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반드시 너희 전 집안을 없애버릴 것이다." 그리고 내시에게 명하여 황궁에 살수를 매복시키고, 재삼 당부해서 말했다: "양건이 조금만 무례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죽여라!" 그후에 양견을 황궁으로 불러, 정사를 논의한다. 양견은 이미 위기를 많이 넘겨서 마음 속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문빈이 아무리 자극을 해도,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무슨 말을 해도, 양견은 태연자약한 모습이어서, 우문빈도 죽일 기회를 찾지 못했다.

 

결국, 양견은 "양전(兩全)"의 계책을 생각해낸다. 옛친구이자 내사상대부인 정택(鄭澤)에게 부탁하여, 우문빈에게 자신이 오래 전부터 출번(出藩. 지방으로 나가다)할 뜻이 있음을 표시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문빈의 뜻에 부합했다. 즉석에서 그를 양주총관(揚州總管)에 임명한다. 그제서야 우문빈은 안심하고, 양견도 안심한다.

 

양견이 박주총관(亳州總管)으로 부임할 때, 방황(龐晃)은 그에게 거병하여 제왕의 기업을 세울 것을 권유한다. 양견은 방황의 손을 잡고 말한다: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이제 양견은 주나라를 대체하여 왕조를 세울 뜻을 나타낸 것이다.

 

우문빈은 황가세습군주이다. 그는 조정에 신경쓰지 않고 주색에 탐닉했다. 조정의 문신, 무장들은 화가 나지만 감히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문빈은 충신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황제로 지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황제를 나이 겨우 6살인 아들에게 물려준다. 스스로는 천원황제라고 칭하고, 후궁에 거주하며, 하루종일 비빈, 궁녀들과 먹고 마시고 놀았다. 황움무도한 생활로 그는 겨우 22살의 나이로 죽게 된다.

 

그의 아들 주정제가 즉위하고, 양견을 승상에 임명한다. 주정제가 즉위할 때 나이는 겨우 7살이었다.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어린아이이다. 그래서 양견은 정택과 유방(劉昉)의 도움하에 외척의 신분으로 북주의 조정을 장악한다. 양견이 승상에 오른 후, 북주의 대권을 찬탈할 계획을 세운다. 먼저 북주종실의 오왕(五王), 조왕초, 진왕순, 월왕성, 대왕달, 등왕유를 장안으로 부르고, 옹주목 필왕현 및 조, 진등 오왕은 모조리 양견에게 죽임을 당한다. 양견은 다시 위효관(韋孝寬)을 기용하여 위지형을 격파한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적을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581년 이월 갑자일, 북주정제는 양견에게 사람들의 신망이 몰린다는 것을 이유로 선양을 선언한다. 양견은 세번 사양한 다음 천명을 받는다. 상부(相府)에서 평상복을 입고 입궁한 다음, 예를 마치고 임광전에서 황제위에 오른다. 국후를 대수(大隋)라 하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 한다. 그리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양견이 등극한 후, 북주종실을 죽여버린다. 개황7년(587년) 후량을 멸하고, 1년후 진나라를 토벌하는 조서를 내린다. 개황9년(589년), 양견은 대군에게 남하를 명령하고, 남방에 할거하던 진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한다. 서진말기이래 3백년간 분열된 국면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같은 해 유구군도가 수왕조에 귀순하고, 돌궐칸이 영원히 귀순하겠다고 표시한다. 양견은 중국이 장기간 혼란되었던 국면을 정리했고, 각 오랑캐부락을 정복하여, 중국을 다시 평화로운 시대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대수왕조가 건립된 후, 양견은 정성을 들여서 나라를 다스린다. 수왕조는 신속히 강대하고 번성하게 된다. 그는 중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을 뿐아니라, 수왕조의 정권을 공고히 히고, 사회를 안정시키고, 호구를 늘이고, 전답을 개간하고, 재물을 축적했으며 문화를 발달시켰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개황지치"라 칭한다. 정치, 경제등 분야에서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중앙에서는 삼성육부제를 실시하고, 지방의 주, 군, 현 3급제를 주, 현의 양급제로 고친다. 지방관리는 중앙에서 임면했고, 이를 통해서 중앙집권을 공고히 한다. 양견이 즉위한 후, 토목공사를 대거 벌여서, 궁전을 짓고, 수도인 대흥성(나중의 당나라 장안성의 원형)을 건설한다. 대흥성의 설계와 배치사상은 후세도시건설 및 일본, 조선등의 도시건설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수문제는 584년 우문개로 하여금 사람들을 데리고 조거(漕渠)를 파도록 시킨다. 대흥성 서북에서 위수를 끌어들여 한나라때의 조거의 옛 물길의 동쪽을 돌아가게 하여 동관에서 황하로 들어간다. 길이는 150여킬로미터이다. 이름은 광통거(廣通渠)라 한다. 이것은 대운하의 시작이다. 대운하는 두 개의 문명을 연결시켰다. 황하유역 장강유역이 점차 일체로 된다. 양견은 23년간 재위하다가 604년 대보전에서 병사한다. 향년 64세이고 태릉이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