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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사마의)

누가 삼국시대의 가장 위대한 모사(謀士)인가.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십이천벌(十二天罰)

 

 

 

문무제일(文無第一) 무무제이(武無第二)

천하모사와 영웅은 부친모친이외에 시대가 그들을 만든다.

삼국시대는 말로써 다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시대이다. 나관중은 그것을 연의소설로 씀으로써, 인물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분명히 나관중은 유비라는 이 DNA로 감정해서는 황죽후예인지 알 수 없는 인물에게 편향되었다.

곽가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다른 한 사람을 이야기하자. 그것은 바로 얼마전에야 신단에서 내려온 제갈량이다. 그가 신단에서 내려온 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오물을 뒤집어 씌웠다. 그것은 아주 불공평하다. 제갈량은 확실히 동풍을 빌린 적이 없다. 그는 기껏해야 마작할 때 동풍을 잡았을 뿐이다; 화살을 빌린 적도 없다. 단지 그는 더욱 강하게 쏠 수 있는 연노를 발명했을 뿐이다; 그가 빌린 형주는 손권이 방패막이로 삼은 전략적 전선이다. 공성계는 확실히 빈 성이다. 제갈량이 거기에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는 사천인민을 위하여, 먹거리를 만들어냈다. 과괴(鍋魁). 그리고 만두도 만들었다.

 

이것들은 나관중의 활발한 오락세포가 우리에게 남긴 우스개이다.

제갈량은 삼국시대 아주 대표적인 유문교도(儒門敎徒)이다.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유가의 정의(精義)가 있다. 그리고 삼고초려의 이야기는 더더욱 후세의 선비들이 재주를 자랑으로 삼는 모범이 되었다. 그의 치국능력은 확실히 그 시대에 뛰어난 것이었다. 유비를 도와 파촉을 교묘하게 빼앗았을뿐아니라, 그는 촉국을 잘 다스렸다. 한번 생각해보자, 한중쟁탈전, 이릉지전, 남만출정, 그리고 육차북벌을 거치는 동안 촉나라에서는 큰 변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양식을 징용할 수 있었다. 유비와 제갈량은 외부인으로 현지의 호족들을 잘 다독거렸으니, 그것도 거대한 공로이다. 그후 이미 통일된 북방의 조조 및 강동에 자리를 잡은지 오래된 손권과 삼국정립을 이루는데, 제갈량의 공로는아주 크다.

 

제갈량의 사적은 기본적으로 모두 알고 있다. 다시 곽가를 얘기해보자.

그는 천종지재(天縱之才)이다. 천투지재(天妬之才)이며 절대의 도도(賭徒)이다.

서주전투, 관도지전, 그리고 오환정벌. 이들 전투중에서 우리는 그의 도박꾼 성격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당시의 조조는 그렇게 강대한 실력이 없었고, 군벌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반드시 연횡해야 했다. 그러나, 곽가가 바친 계책은 항상 도박의 맛이 있었다. 이 몇 가지 점에서 우리는 그가 시국을 어떻게 잘 장악했는지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당시의 각 제후의 성격을 이해했다. 몇번의 완벽한 공성계도 성공을 거두었다.

곽가는 21살때부터 세상에 나왔고, 21살이전의 사정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나는 그 때의 곽가가 모든 21살된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해에 그는 원소를 완전히 파악한다.

그리고 또 이 해애 그는 천하를 완전히 파악한다.

 

190년, 원소는 18로제후의 맹주가 되어 동탁을 토벌한다. 그 때, 곽가는 천하군벌의 품성을 확실리 보고, 원소의 우유부단함도 확실히 알았다. 그는 눈앞에 번쩍이는 사람을 발견했을 것이다. 조조. 비록 후세에 여러 해동안 욕을 얻어먹었지만, 동탁에 대하여 패할수록 계속 싸운 남자인 것이다.

모사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전풍은 그를 원소의 막료로 추천한 친구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최후결말은 분명하다. 곽가는 제갈량의 <장원>에서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법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실제행동으로 증명했다. 원소를 떠나 6년간 은거하고 그는 출도하자마자 조조를 선택한다. 이때 삼국시대는 한창 끓어올랐고, 한 청년의 지모로, 현명한 군주를 알아보는 혜안으로, 북방을 통일했다. 더더구나 동한말기 약한 상황하에서 소수민족인 오환에 대한 승리를 거둔다.

198년 여포를 패배시키고, 원소가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라 도박한다. 그는 이겼다. 이해에 그는 28살이었다.

200년, "십승십패"로 인심을 안정시키고, 원소와의 일전을 겨루기를 제안한다. 원소가 사람을 잘못쓰고 우유부단할 것이라고 도박을 건다. 그는 이겼다. 그해 그는 서른 살이다.

207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오환에 출병한다. 남하할 우려를 해소시킨다. 오환의 교만한 심리상태에 도박을 건다. 지리는 없어도, 천시와 인화에 도박을 건다. 이 전투에 그는 목숨을 건다. 그해 그는 36살이다.

 

그는 자신의 안목에 도박을 건다. 그리고 주공을 제대로 선택한다. 그는 원소가 우유부단으로 여포를 제거할 것에 도박해서 이겼고, 관도에서 대승을 거둔다. 더더구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오환을 원정하여 북방민족의 남하라는 우려를 해소시킨다.

짧은 36년의 생명과 사서에 겨우 수백자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를 제대로 접촉할 수 없다. 그저 그는 의심이 가장 많은 간웅 조조의 신임을 얻었고, 조조가 그에게 중임을 맡겼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의 군사능력은 이미 증명되었다. 이 말에서 곽가의 치국능력을 알 수 있고, 그는 '치세의 능신'의 인정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곽가가 제출한 "십승십패"는 그 본인의 풍격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실 그가 제기한 것이거나 그가 쓴 것이든 아니든, 더더구나 그의 풍격에 부합하건 아니건 그런 건 모두 관계없다. 조조는 약하고 원소는 강한 상황하에서, 곽가는 비록 조조에게 일전을 겨룰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반드시 약간의 말로 아래의 장수와 문신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것에는 합리적인 논리분석이 없어서는 안된다.

 

관도지전은 전풍이 원소에게 말한 "조공은 용병을 잘한다"는 말이 정말 조조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친구인 곽가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와 저수가 허도를 기습하도록 건의한 것이 곽가의 도박꾼심리에서 비롯된 거인지 아닌지, 이 3분천하의 운명이 걸린 전쟁에서 곽가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배를 주리며, 하루종일 지도를 보면서 대책을 세웠을지 모르겠다.

필자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혈세서주"이다. 많은 사람들은 "혈세서주"를 조조의 개인주의 걸작으로 본다. 기실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수가 조조의 아들, 애장 저위를 죽였지만, 조조는 여전히 그의 투항을 받아준다. 북방에서 그렇게 민심을 중시여기던 조조가 어찌 이렇게 하였을까? 그리고 조조는 곽가의 말이라면 다 따랐다. 곽가의 눈으로 이렇게 하는 것의 폐단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조조가 부친이 원수에 머리가 돌아있어서 감히 말리지 못한 것일까? 기실 그렇지 않다. "혈세서주"도 곽가의 또 한번의 도박이다. 이번에는 자신과 조조의 명성을 걸었다. 목적은 바로 뒤의 관도지전이다.

 

왜 그들은 이렇게 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이렇게 하면 그저 민심을 잃는다. 이후 전투에서 아주 불리하다. 이 사건에서 곽가는 초인적인 안목을 드러낸다. 그는 원소가 우유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병력이 많다고 자부하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신속히 발전하는 조조는 이미 그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이때 조조의 실력은 아직 원소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서주를 공격한 것은 향후 원소와의 전투에서 후방의 걱정거리를 해소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원소도 모르지 않았다. "서주도성"을 통하여 한편으로 조조는 부친의 복수를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원소의 관망하는 태도는 더욱 확실해진다. 이렇게 하여 원소로 하여금 조조는 민심을 잃어서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7년후, 관도지전이 시작된다. 이 7년의 기간은 조조에게 얼마나 고귀했던가.

이것은 또 한번의 큰 도박이었다. 무서운 곽가는 다시 이겼다.

삼국역사에서, 모든 모사들은 제갈량의 광망으로 암담해졌다. 여기서 도도와 교도를 두 가지 방면에서 비교해보기로 하자:

 

심성

 

제갈량은 아주 유가식의 인물이다. 일처리도 인의도덕을 중시했다. 그리항, 나관중이 그를 좋아했고, 그의 위대함을 극력 선전해주었다. 곽가는 서진시기의 사인(士人)과 비슷하다. 자잘한 일에 구애받지 않고, 더더구나 예법은 무시한다. 행위도 그다지 올바르지 않았다.

제갈량은 많은 의미에서 "무허(務虛)"이다. 그의 많은 행위는 자신을 예법이 틀 속에 묶었다. 비교적 두드러진 것은 바로 승리를 틈타서 추격하지 못한 사마의이다. 그는 좋은 기회를 놓친다. 병력을 물리고 돌아갔다. 곽가는 "무실(務實)"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명성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그래서, "혈세서주"했다. 원소일가를 모조리 죽였다. 이런 살벌하고 과감한 것은 절대 유교의 인의도덕이 제창하는 것이 아니다. 제갈량은 일처리가 너무 조심스러웠다. 이것은 그가 유비와 파트너가 된 원인이기도 하다. 곽가는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조조와 같은 효웅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런 전란의 시대에 인의도덕은 아무렇게나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제갈량의 조심스러운 성격은 나중에 촉국의 간부들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조조가 일찌기 곽가에게 물은 적이 있다. 모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냐고. 곽가는 전쟁과 바둑과 마찬가지로, 어떤 전쟁도 사전에 모두 배치하고 하는 것은 없다. 병법을 잘 아는 것은 기본이다. 군사의 우열은 현장에서의 임기응변이다. 이 말은 승리의 관건을 잘 말해준다.

 

장재

 

우리는 먼저 진실한 역사를 보자: 화소박망파는 제갈량과 관련이 없다. 적벽대전은 제갈량과 관련이 없다. 육출기산은 제갈량이 한 일이다.

그래서, 이들 진실한 역사를 확실히 안 후에 제갈량은 남만을 평정하여 윈시부락을 이긴 외에, 그다지 뛰어난 승리는 없다는 것이다. 곽가를 보자. 성세가 대단했던 북방통일전쟁은 그가 혼자서 기획하고 완벽하게 승리한 것이다. 더더구나 관도지전은 이소승다(以少勝多)의 모범이다.

용인방면에서, 이것은 상대적으로 제갈량이 잘한 분야이다. 다만, 이 용인도 촉국건립이전과 건립이후를 나눠야 한다. 촉을 건립하기 전에, 제갈량은 용인방면에서 확실히 뛰어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건국이후에는 그다지 잘한 것이 없다. 마속을 잘못 믿어서 인생최대이 유감을 남겼고,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게 핍박하여, 촉중무대장(蜀中無大將)의 국면을 불러왔다. 강유를 거두었지만, 기대가 컸던 것만큼 실망도 컸다. 용인방면에서, 곽가는 무슨 정보를 남긴 것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겉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도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조조를 위하여 분석하는 장면을 그려보자, 그렇다. 모든 군사는 그저 용병지법, 포진지술, 모계책산만 알아서는 안된다. 더더구나 장수를 잘 알아야 한다. 적합한 사람을 쓰는 것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관건이다. 제갈량은 목숨이 곽가보다 길었다. 그래서 그의 재능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곽가는 짧은 생애를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단지 그는 탁월한 군사재능으로 천하국면과 각로영웅의 성격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대외전쟁을 진행했다. 곽가가 상대한 것은 직접 한나라를 위협하는 유목민족이었고, 제갈량이 상대한 것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남방 소수민족이었다. 그외에, 제갈량은 유가의 방식외에 종횡지술을 뛰어나게 운용했다. 강동과 연합하여 북위에 대항한다. 그리하여 촉한정권은 그 사이에서 성장한다. 이는 실로 힘든 일이었다. 비록 그는 군사적으로 곽가, 주유에 미치지 못했고, 문장재주에서는 조가삼부자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는 절대로 삼국에서 가장 위대한 외교가이다.

이 두 가지는 대체로 한 역사인물의 비교적 여러가지 측면을 포괄한다. 신단에서 내려온 제갈량은 촉한정권을 창조했다. 곽가는 삼분천하의 가장 튼튼한 기초를 만들었다. 이 삼분의 1이 유표이건 유비이건 이미 원형은 형성되었다. 우리는 만일 곽가가 적벽대전까지 살아있었다면, 삼국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이 곽가보다 목숨이 길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잘못된 계책을 남겼고, 자신의 점수를 깍아먹었다. 기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유비와 조조를 참조하고, 횡적으로 두 사람이 한 일을 비교해보면 공로가 크고 작은 것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 시대는 교도의 것이 아니라, 도도의 것이다.

그 시대 가장 위대한 천재는 곽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