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사마의)

사마의(司馬懿) 자손3대는 어떻게 조조집안의 강산을 빼앗았는가?

by 중은우시 2012. 8. 15.

 

작자: 미상 

 

동한말기에서 위진때까지 정권은 분할되고, 번왕들이 난립하여 전체 정치국면이 아주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정권의 교체과정은 하나의 강물이 산길을 따라 여러번 굽어서 흘러가는 것같았다. 이때 자주 바다의 파도보다 더 미친 듯한 파도와 바람이 불기도 했다. 하나의 가족은 하나의 거함과 같이 도도히 흐르는 강물 속을 잘 헤쳐나가며 운행하고, 마지막에 안전하게 정박했다. 이 가족은 바로 위진역사상 막후에서 무대위로 나온 사마씨가족이다.

 

일찌기 삼국시대에 항간에는 당대에 4대권모가(權謀家)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즉, "와룡(臥龍), 봉추(鳳雛), 유기(幼麒), 총호(冢虎)". 와룡은 제갈량, 봉추는 방통, 유기는 강유(姜維), 총호는 사마의이다. 사마의는 사마가족의 가장 걸출한 대표인물이고, 동시에 서진(西晋)왕조의 진정한 창시자이다.

 

사마의에 대하여 후세인들이 잘 아는 사적은 아마도 제갈량과의 7년항전사일 것이다. 그동안 비록 사마의가 패한 적이 많기는 했지만, 전체 중국전쟁사상 가장 걸출한 군사가중의 하나인 제갈량과의 전투에서, 사마의는 최후승리를 거둔다. 제갈량은 여러날 포위당하여 있다가 군영내에서 병사한다. 그후 촉군은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로 궤멸당한다. 만일 당시 위명제가 명령을 내렸다면, 사마의는 아마도 직도황룡하여 촉국을 철저히 멸망시켰을 것이다.

 

사마의는 73세까지 살았다. 전란이 끊이지 않고 물질이 척박한 위진년대에 이것은 이미 오래 산 것이다. 위진시대에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사십여세에 불과했었다. 사마의의 인생은 대부분 신하들중 우두머리로 있었다. 복잡한 공무를 처리하고, 전쟁터를 누비는 정치생애는 원래 사람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반군여반호'라고 사람의 생명은 일단 관직에 들어서면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사마의는 순조롭게 인생의 길을 마친다. 그가 의존한 것은 영단묘약의 장수비법이 아니라, 그의 지혜와 기지였다.

 

사마의는 병든척하는 것을 잘했다. 조조가 아직 소영주일 때, 사람을 통하여 사마의를 부른다. 사마의는 잘 알았다. 당시의 조조는 아직 한나라통치자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장기간 그의 곁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병석에 누워있는 척한다. 조조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허실을 염탐하지만, 모든 사신들은 사마의가 병석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온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사마의는 중풍에 걸렸다고 믿었다. 나중에 조조도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단기간내에 더 이상 사마의를 찾지 않았다. 가장 대단한 점은 사마의가 만년에, 위나라황제 조방(曹芳)의 나이가 어려서, 조상(曹爽)의 일당은 황제위를 찬탈하고자 했다. 사마의는 시비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역량을 축적하여 일거에 조상 일당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병든 척한다. 조상은 자신이 황제위를 찬탈하는데 불리한 영향을 미칠 유일한 사람이 바로 사마의라는 이 늙은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그리고 일찌감치 들은 바 있다. 사마의는 병든 척 잘하기로 유명하다고. 그래서 심복을 보내어 그가 정말 병들었는지를 살펴보게 한다. 염탐꾼이 사마씨집안의 대문으로 들어간 후, 사마의는 그의 노련함을 젊은이들에게 한번 과시한다. 무엇이 '장계취계'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사마의는 두 명의 비녀의 부축을 받으며 대청에서 염탐꾼을 만난다. 이때 한 비녀가 탕약을 한 사발 올린다. 사마의는 입으로 받아 마셨는데, 옷깃에 가득 흘리고, 가슴께의 옷에도 약물이 흐른 반점이 남는다. 염탐군은 사마의에게 짐짓 묻는다. 사마의는 이때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입안에서 우물거리고 말이 끊기며 혀가 꼬인다. 마치 며칠 후면 죽을 것같은 모습이었다. 염탐꾼은 이를 보자 이 늙은이는 정말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조상에게 보고한다. 이번에 병든척 한 것은 조상을 마비시킨다. 기본적으로 조상은 사마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게 된다. 이로써, 사마의는 나중에 조상일당을 일망타진하는데 필요한 연막탄을 성공적으로 터트린 셈이다. 이렇게 깊은 속은 현재라고 하더라도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시에 이런 전술은 사마의로 하여금 여러가지 골치거리나 화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나중에 굴기하는데 효과적인 완충대를 형성해준다.

 

사마의는 3대에 걸쳐 탁고(托孤)를 받아 어린 황제를 보좌한다. 여러해동안 축적된 정치경험은 그의 믿을만하고 능력있는 심복무리들을 형성하게 해준다. 마친매 조상의 일당을 제거한 후, 성공적으로 막후에서 무대위로 올라온다. 당초 조조가 위나라로 한나라를 대신한 것처럼, 진나라로 위나라를 대체한다. 거의 모든 천하의 정권을 장악한다. 그 후에 사마의가 죽을 때까지, 왕에 봉해지지도 않았고, 황제를 칭하지도 않았다. 기실 그는 당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마음만 먹었으면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조씨일문의 은혜가 너무 커서일 것이다. 조조가 없었으면 사마의도 없었다. 조조는 사마의를 알고, 사마의를 믿었다. 조조이후의 조비, 조예도 모두 그러했다. 심지어 위문제시기에, 위문제이든 위명제이든 사마의와 천하대사를 논의할 때면, 모두 친히 사마의의 집으로 갔다. 사마의에 대한 예우가 한나라가 소하를 대하던 것과 같았다.

 

사마의의 사후, 장남 사마사(司馬師)는 부친의 권력을 계승한다. 나중에 어린 나이로 죽어서, 차남인 사마소(司馬昭)가 대신 부친과 형의 권력과 지위를 승계한다. 그리고 사마가족의 통치국면을 더욱 확대한다. 이리하여 천하의 권력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집중되고, 위나라를 대체하는 발걸음을 빠르게 한다.

 

사마소는 다수의 후인들이 보기에 문무에서 모두 일류인 인물이다. 특히 한가지 점은 세상사람들이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가 부친을 따라 전투에 참여하고, 탁월한 군사재능을 익혔다는 점이다. 삼국시기에서 위나라때 촉을 정벌하는 기나긴 전투에서, 개세효웅 조조도 겨우 촉,오와 삼국정립하는 정도밖에 완성하지 못한다. 나중에 위문제 조비가 재위한 기간동안 여러번 촉국을 공격하고, 육전도 하고 수전도 하는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돌아왔다. 뜻을 펴지못한 것을 우울해하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위명제 시기에 촉국의 강역을 계속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화하판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3대의 군주는 부친 사마의가 끝까지 보좌했다. 그래도 촉국을 평정할 수 없었다. 사마소의 시기가 되어, 그는 성공적으로 대군을 이끌고 일거에 촉국을 멸망시킨다.

 

촉을 멸망시킨 후, 사마소는 후세인들이 감사해마지않는 공덕을 세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보내어 제갈량의 군사이론을 집중적으로 정리하고 학습하는 것이다. 이 조치로 인하여 많은 우수한 장수들을 배양하게 된다. 이들 장수들은 나중에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사마소가 촉에서 부대를 이끌고 돌아온 후, 직접 스스로 진공(晋公)이라 칭한다. 그후 더욱 당당하게 위황제 조호를 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며 자신을 진왕(晋王)에 봉한다. 그리고 사마염(司馬炎)을 세자(世子)로 올린다.

 

사마소가 스스로를 왕에 봉한 행위는 위황제 조호를 분노하게 만든다. 조호는 계속 이러다가는 위왕조가 대체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생명도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어느 비오는 오후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심복과 신뢰할만한 신하들을 부른다. 조호는 검을 들고 서안(書案)에 올라가서 만면에 노기를 띄고, 비감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여러분은 모두 위나라의 현신, 명장들이다. 나 조호는 최근 들어 여러 충효인사들의 은혜를 입었다. 오늘 사마소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이면 모두 알 것이다. 그는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우리 대위정권을 전혀 눈아래 두지 않고 있다. 이것은 나에 대한 일종의 배반이자,더더욱 여러분이 여러해동안 대위에 쏟은 노고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나는 사마적자(司馬賊子)를 죽이러 갈 것이다. 나를 도와주겠는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인을 이루는 것이다. 적자를 숙청하는데 성공한 후, 여러분들은 대위의 보국대신이 되는것이다. 여러분들은 망설이지 말라. 나와 함께 대위정권을 보위하자...."

 

조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반대의 목소리가 속속 나타난다. 모두 조호에게 포기하고 참으라고 권한다. 당시 조정대신은 다수가 사마소를 옹호했다. 어쨌든 사마소집단의 세력은 조호가 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호도 혈기넘치는 사나이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대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당시 그의 세력은 너무 약소했다. 그는 신하들의 권고를 듣지 않고, 백여명의 친병을 이끌고, 갑옷과 투구를 쓰고, 호호탕탕하게 사마소의 집으로 죽이러 떠난다. 누가 알았으랴. 일찌기 누군가가 사마소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사마소는 정예병을 보내어 도중에 조호를 가로막고 죽여버린다.

 

사마소는 조호를 죽인 후, 조환(曹奐)을 황제로 올린다. 그가 위원제(魏元帝)이다. 조환은 그저 허수아비였다. 이때의 천하는 이미 진정으로 사마가족의 것이 되어 있었다. 265년, 사마소가 중풍으로 죽은 후, 사마가족은 또 다른 대표성을 지닌 인물을 무대위로 올린다. 그가 바로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이다. 사마염은 왕위를 승계한 후, 조환을 물러나게 핍박하고, 정식으로 서진(西晋)을 건립하니, 그가 바로 진무제(晋武帝)이다. 그는 진나라의 개국군주가 된다. 도읍은 낙양으로 한다. 동시에 사마소를 문황제로 추존하고, 사마의를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한다. 

 

사마염이 진나라를 창립한 것은 후세인들에게 순리에 따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의 공적은 완전히 사마의, 사마사 및 사마소 삼대인의 기초위에서 건립된 것이다. 수도거성(水到渠成)한 것이다. 후세인들은 보편적으로 사마염에게는 걸출한 재능이 없으나, 운명이 좋아서,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사마염이 등극한 후, 국가는 이미 안정을 찾는다. 더 이상 큰 동란은 없었다. 그래서 사마염은 천진하게도 강산이 공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ㄴ다. 그래서 변방의 군사를 취소시키고, 한 마음으로 농전제를 개선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그의 천진함과 유치함은 최종적으로 나쁜 결과를 불러온다. 사상유명한 '팔왕지란'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마의에서 사마염까지 중국정치의 변화는 이 시기 중국문학의 발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사마소시기에, 고도의 정치압박, 연속된 문자옥으로 당시의 중국선비들은 이미 더 이상 가볍게 정치를 논할 수 없었다. 비록 공덕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때는 아부를 제대로 못한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중국문학은 전원시등 사물을 빌어서 자신의 뜻을 얘기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건안문학의 호매한 기운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고도의 정치압박은 선비들의 정치적인 열정을 거의 없애버린다. 관심의 주류는 이미 철학, 사상, 귀신등 분야로 옮겨간다. 대량의 이 방면의 작품들이 날로 유행하기 시작한다.

 

사마염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비록 약간 압박을 느슨하게 풀어주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도 위진문학의 소극적인 추세는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게다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경제가 날로 번성하자, 선비집단의 지위는 날로 올라갔다. 중국지식인의 흥취는 현실도피, 급시행락(及時行樂)으로 향한다. 사마염의 관대함은 오랫동안 고도의 정치억압을 받아왔던 선비들의 독소가 그의 집권기에 신속히 발효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오늘날 위진풍도를 즐겨 얘기하고 있지만, 아무런 과정없이 말하자면, 위진시대에 중국지식인의 기풍은 가장 위축된 시기였다. 감히 나서서 국가의 책임을 지려는 지식인이 갈수록 적어졌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국가는 자연히 책임지지 않는 국가로 변모한다. 위진이 '오호난화'에 멸망하는 결말은 이때 이미 화근을 심었다.

 

서진멸망의 도화선인 '팔왕지란'을 얘기하자면, 사마가족 특히 사마염의 통치정책과 분리할 수가 없다. 사마염이 채택한 것은 명문거족을 우대하는 것이었다. 특히 명문지식분자를 우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문(名門)지식분자와 한문(寒門)지식분자의 대우는 차이가 컸다.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게 되면 화가나서 죽게 되는 상황이 나타난다. 여러 한문지식인들은 다른 출로를 찾는다. 많은 왕실의 문하로 투신하는 것이다. 당시 서진의 여러 왕야들 중에서, 주변에 한문출신의 지식인을 막료로 두었다.이들은 서진의 명문거족을 얘기할 때면 하나같이 이를 갈았다. 사마염이 죽은 후, 즉위한 진혜제는 유명한 백치황제이다. 그리하여 왕야들에게 반란의 기회를 준다. 거기서 바람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들 주변화한 지식분자들이다. 사마염의 통치정책이 조성한 사족과 한문지식인들의 대립은 서진멸망의 중요한 원인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