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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암살사건: 조병균 총리가 모살범?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김만루(金滿樓) 

 

상해지방검찰청이 총리 조병균에게 법정으로 와서 대질할 것을 요구했으나, 조병균은 병을 이유로 거절했고 이로 인하여 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국민당인이 발간하는  <민립보>에서는 "살인범주범의 이름으로 조병균을 환영한다"는 글을 싣고 조병균이 "만악정부의 국무수령"이라고 하였다. 현재 '송교인암살사건'의 주범인 응계형이 구금되어 있는 곳인 해운국영창은 이미 그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교인암살사건"의 발발초기, 조병균은 전통을 보내어 스스로를 변명한 바 있다. "송교인암살사건"에 내무부비서 홍술조가 관련된 것은 본 총리 및 정부로서는 의외이다. 다만 본인은 총리 겸 내무총장으로서, 행정상의 검독을 태만히 한 점은 있지만, 형사책임을 받을 이유는 없다. 조병균은 변명과정에서 '행정책임'과 '형사책임'을 구분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았다. 역시 청나라말기 순경출신은 다르다. 이와 비교하자면 황흥등은 처음부터 조병균을 '사건주범'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이는 사법질서를 존중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당연히 청말민초의 법치관념은 지금과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상해지방검찰청의 소환후 조병균은 경사검찰청에 보낸 회신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변호한다. 그중 이유는 3가지이다: 첫째는 법률관계와 정치관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책임을 질 수는 있지만 법률책임은 질 수 없다. 둘째는 '송교인암살사건'의 정범은 무사영이고, 혐의범은 응기승이다. 홍술조는 지금 도피중이어서 그가 상해로 간다고 하더라도 대질할 사람이 없다. 셋째, 황흥과 응계형은 중대한 금전거래가 있었고, 군대를 선동하여 내란을 음모한 혐의가 있다. 죄행이 훨씬 엄중하다. 왜 황흥은 기소하지 않으면서, 본인은 상해로 와서 신문을 받으라는 것인가?

 

일찌기 1개월전에, 국무총리가 응계형의 밀전과 관련있다는 소식이 나온 후, 조병균은 일찌기 북경의 <신기원보>에 이런 담화를 발표한다. 1912년 당소의 내각기간동안, 그는 내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송교인은 농림총장이다. 피차간에 동료관계였고, 가까운 친구였다. 송교인이 서직문밖 성에서 10리정도 떨어진 농사실험장에 거주했는데, 어떤 때는 저녁늦게 북경성을 나갈 수 없으면 당시 항상 그의 집에 머물렀고, 두 사람은 서로 하지 않는 말이 없었다. 당소의 내각이 무너진 후, 송교인은 북경을 떠나 남하한다. 당시 5천원의 빚이 있었는데, 그가 대신 상환했다. 이런 말의 숨은 뜻은 그는 송교인과 가까운 친구이고, 모살을 꾸밀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조병균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당시 국무원 비서장이던 장국금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송교인이 농사시험장에 거주했는데, 자주 야간에 북경성으로 들어와 국무원 비서실과 국무총리 조병균과 얘기했다. 알기로는 두 사람이 서로 존경했다. 송교인은 국회성립후 조병균을 총리 심지어 총통으로 올리겠다고 했다. 조병균은 송교인이 대당의 영수이고 정당내각을 조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단지 송교인은 속깊은데서는 조병균에 미치지 못했다. 어떤 때는 국민당의 내부상황을 그대로 얘기했다. 조병균도 북양정부의 내막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여러해 후, 장사쇠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국원년 그는 북경에 있었는데, 누군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병균과 송교인은 지나치게 친밀하다. "조병균은 수시로 송교인의 어깨를 치면서 말하는데, 아주 가까운 모습이었다."

 

송교인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조병균의 첫반응은 아주 괴이했다. 장국금에 따르면, 조병균은 내각정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는데, 국회선거 사무국국장인 고오가 돌연 뛰어들어와 보고했다. 송교인이 호녕기차역에서 총격을 받았으며 상세가 중하여 목숨을 구하기 어려울 것같다고. 조병균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대변한다. 즉시 자리를 떠나 회의장을 몇 바퀴 돌고는 혼잣말을 했다. "이거 큰일이다. 사람들이 만약 내가 송교인을 죽였다고 말한다면, 내가 친구를 팔아먹은 것이 아니냐. 그게 사람이냐." 그 자리에 있던 내각인원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얼마후 총통부에서 전화가 온다. 조병균은 바로 황급히 떠난다.

 

당시 사람들이 남긴 현장기록으로 보면, 조병균이 엄중한 실태를 보인 것은 고의로 연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부 사정을 알고 있었고, 일이 의외로 전개되어 일시 어쩔 줄 몰랐던 것같다. 바꾸어 말하면, 조병균이 사전에 송교인암살계획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만일 조병균이 영향, 홍술조가 송교인을 대한 사정을 전혀 몰랐다면,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사람들이 만약 내가 송교인을 죽였다고 말한다면 내가 친구를 팔아먹은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추론해보면, 조병균은 홍술조의 "훼송"행위는 알았다. 그러나 송교인암살건은 그에게 의외였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병균과 송교인의 개인친분이 좋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경쟁상대방으로서, 조병균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송교인에 대하여 손을 조금 썼을 것이다. 홍술조가 응계형에게 보낸 밀함에서 어느 정도 토로했지만, 조병균은 응계형, 홍술조 두 사람이 소위 '손황송열사'를 산포하려는 계획을 알고 난 후에, 반대를 표시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즉시 홍술조로 하여금 총통 원세개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홍술조의 이 주장에 대하여 조병균은 단호히 부인한다. 그는 자신은 '손황송열사"의 밀전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전보가 도착한 후, 즉시 홍술조는 총통에 보고했다"는 내용은 순수히 홍술조가 날조한 것이며 그는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조병균의 이유는 각부인원이 총통을 알현하는 것은 항상 부장이 데려간다. 총통부는 출입이 엄격하겨, 내빈은 모두 등기해야 한다. 그는 내무총장인데, 홍술조를 데리고 총통을 알현한 적이 없을 뿐아니라, 총통부의 출입기록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 홍술조의 주장은 황당무계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조병균이 출입기록에 등기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자신의 책임을 깨끗이 부인했다. 이것은 약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릭, 이것은 그가 돌연 송교인피살소식을 들었을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실태를 보인 것과도 맞지 않는다. 사실상, 정치에 관련된 사무는 모든 일이 광명정대할 수 없다. 만일 출입기록만으로 역사의 진상을 이해할 수 있다면 천하에 비밀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홍술조 자신은 수안통천의 인물이다. 그는 조병균이 데려가지 얺더라도 원세개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세개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총통추 출입처에 등기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증으로, 응계형의 그 "손황송열사"의 밀전은 원래 조병균에게 보낸 것이다. 만일 조병균이 정말 받지 않았다면, 홍술조는 어디서 그 내용을 알았단 말인가. 더욱 기괴한 것은 이 밀전이 발송된 후, 응계형과 조병균은 바로 직접연락을 끊었다는 점이다. 밀전, 밀함이 하나도 없다. 설마 조병균이 응계형에게 흥미를 잃었단 말인가? 이것은 사건진전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같다. 합리적인 해석은 조병균은 응계형, 홍술조가 "손황송열사"를 준비하는 것을 알고, 송교인을 잘 알기 때문에, 게다가 다른 정치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 일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고, 홍술조로 하여금 혼자 처리하도록 맡긴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응계형, 홍술조의 밀전밀함의 두 가지 핵심문제는 이해가 된다. 하나는 소위 "격렬한 문장"이고, 둘째는 "훼송수훈위"이다. "격렬한 문장"이라는 말은 주로 홍술조에게서 왔다. 그중 '대제목', '긴요문장', '격렬거동'등 서로 다른 표현이 있다. 큰 뜻은 모두 응계형이 행동에 나서라는 말이다. 그러나 밀함,밀전 그 자체에서는 '송교인암살'의 의도를 찾을 수가 없다. 홍술조가 나중에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소위 '대문장'이라는 것은 당시 원세개정부가 총통제를 주장하고, 국민당이 내각제를 주장하는 것이며, 응계형이 받은 임무는 내각제를 고취하는 글을 공격하는 글을 실으라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고 하였다.

 

"훼송수훈위"는 '송교인사건"에서 가장 논쟁이 많은 것이다. 조병균은 통전에서 이렇게 변명했다. 각 물즐에서 가장 중앙정부가 혐의를 받는 것은 3월 13일 홍술조가 응계형에게 보낸 전보에서의 "훼송수훈위"라는 단어일 것이다. <임시약법>의 규정에 따르면, 수훈은 대총통의 특권이다. 선례에 따르면, 각기관이 보고하고 여러번의 평의를 거친 후에 중앙에서 특별히 수여하는 것이고 평결이 필요하다. 만일 "훼송"이 "수훈"이 된다면, 생각해보라 응계형을 누가 추천하고 누가 평결하겠는가? 이것은 그저 홍술조가 정부의 명의를 빌어 응계형을 유인한 것이다. 절대로 정부의 촉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없다.

 

조병균의 변명은 약간 좌우를 고려해서 하는 말인 것같다. 그는 단지 "수훈"만 얘기했지, "훼송"은 얘기하지 않았다. 사실상 "수훈"이라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원세개시기의 <정부공보>를 찾아보면 수훈봉작은 여러번 있었다. 삼일 오일마다 있었다. 상상한 것처럼 그다지 융중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병균이 말한 그 절차, 체례, 의식은 민국초기의 규장이 불완비된 상황하에서 그대로 집행되지도 않았었다. 그외에 주의할 사항은 응계형 본인이 "수훈부수훈"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가 중시한 것은 눈앞의 실제이익이었다. 수훈위같은 것은 그에게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조병균은 '훼송'이라는 단어는 그냥 가볍게 넘겼다. 이말의 제출자로서, 홍술조는 또 어떻게 말하는가? 청도로 도망친 후, 홍술조는 통전을 보내어 변명한 바 있다: "훼인"이라는 두 글자는 북경의 습관어이다. 사람들마다 쓰고 있고, '살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랫동안 북경에 살아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어찌 이를 가지고 견강부회한단 말인가? 홍술조의 뜻에 따르면, "훼송"은 송교인의 명예를 망친다는 것이다. "훼기명예, 패기세력(毁其名譽, 敗其勢力)". "송교인의 비열한 행적을 폭로하여 송교인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것이지 절대로 송교인을 암살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전인 <북경화사어>의 해석을 보면, "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명성을 마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치켜세워줄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다." 둘째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 경제적 손실을 입게 한다"는 것이다. '훼괴(毁壞)'의 뜻은 죽살해의 뜻이 아니다. 만일 단어의 뜻으로만 해석한다면 홍술조의 변명은 성립된다.

 

주의할 점은 "훼송수훈위"의 "훼"자는 원문에 "불화자(火)"방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즉 "훼(燬)"였다. 홍술조는 나중에 이런 진술을 한다. "훼송수훈위"의 전문은 총통이 총리에게 주었다. 그는 일찌기 "명예훼손"의 "웨"인지. 조병균이 대답했다: 위에서 내려온 것이다. 홍술조는 말했다: "훼(燬)'와 '훼(毁)'는 다르다. 조병균이 말했다: 무슨 고증근거도 없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전문을 보낸 것이다. 소위 "훼송(燬宋)"을 그는 그저 송교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뜻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훈위'의 세 글자는 절대로 비서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도리는 명백하다.

 

조병균, 원세개는 당시에 모두 사망하였으므로, 홍술조의 이 말은 약간 물을 흐리는 의미가 있다. 현재는 선의로 홍술조가 최초에 말한 '훼송'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손황송열사'를 매수하고 공표함으로써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뜻이다. 그리고 원세개와 조병균도 이 계획을 알았을 것이다. 다만, 응계형은 1개월간 열심히 움직였지만 진전이 없었다. 그후 그는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하고, 명예를 훼손시키는 계획이 최종적으로 유혈의 암살음모로 바뀐 것이다. 홍술조는 이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지막 몇통의 밀전밀함을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토론할 것은, 조병균이 "훼송"계획의 변화를 알았느냐는 것이다. 장국금이 말한 실태장면으로 보면, 그는 확실히 사전에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능성은, 조병균이 송교인암살의 음모가 자신의 직근상사인 원세개와 관련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자신이 속죄양이 될 것을 우려하였을 것이다.

 

장국금의 회고에 따르면, 조병균은 송교인암살을 듣고난 다음 날, 원세개에게 사표를 낸다. 그러나 비준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조병균은 장국금을 만나기로 약속한다. 만났는데 모습이 당황해보였고, 한가지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장국금이 무슨 일인지 묻자, 조병균이 말한다: "이런 때는 사직하는 것만이 죽음을 면하는 일이다." 장국금은 송교인암살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직감한다. 그래서 "송교인사건"이 도대체 어떻길래 그러냐고 물었다. 조병균이 말한다: "이 일은 지금 말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면직되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다.. 지천(芝泉, 단기서)은 군인이니 일하기 좋을 것이다." 장국금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다음 날, 조병균은 다시 친필로 장국금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사직에 대하여 도와달라고 말한다.

 

장국금의 이 기록은 고증(孤證)이고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조병균과 단독대명한 것이므로 조병균이 정말 그렇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조병균이 계속 사임하겠다고 한 것은 사실이다. 주목할 점은 이때는 응계형, 홍술조의 밀모가 아직 폭로되기 전이다. 조병균이 계속 사임을 고집한데는 다른 숨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송교안암살사건"이 발발한 후 민감한 시기에, 당시 내무부차장이던 왕치형(王治馨)은 공개연설에서 한 말은 적지 않은 풍파를 일으킨다. 당시 북경국민당본부느 호광회관에서 송교인추도회를 개최하였고, 조병균은 왕치형을 파견해서 출석시킨다. 왕치형은 회의에서 연설을 했는데, 대강의 뜻은 이렇다. 조총리는 송선생과 마음이 잘 맞았고, 이 일은 실로 의외의 사건이다. "송교인암살사건"에 내무부 비서 홀술조가 관련되어있지만, 홍술조는 내무부에서 통상적인 일을 처리하고, 조총리가 그와 특별한 관계는 없다. 암살사건이 발생한 후, 원총통은 조총리와 홍술조가 특수한 관계라고 여겼고, 조총리는 홍술조가 원총통과 특수한 관계라고 여겼다. 둘 다 추측이었고, 전일 조총리가 총통부로 가서 직접 만나 얘기해본 결과 오해임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송교인을 죽인 것은 절대로 총리가 아니다. 총리가 책임질 수 없다. 이 책임은 져야할 사람이 져야 한다.

 

왕치형은 조병균을 여러해동안 따랐고, 그의 이번 말을 도와주려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혼란을 부추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장국금의 기록에 따르면, 원세개는 보도를 본 후에 대노했다고 한다. 왕치형을 크게 욕했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경솔하고, 역겨울 정도이다. 조총리가 왜 함부로 말하도록 놔두었는가. 신문에 실린 후에도 경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지도 않고!" 그 말을 하는 원세개는 아주 날카로웠다고 한다.

 

원세개가 분노한 것은 이유가 있다. 왕치형의 이 말의 원래 뜻은 조병균의 책임을 벗겨주기 위함이다. 다만 부지불식간에 원세개의 혐의를 드러내고 말았다. 마치 원세개와 조병균이 서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각자 '송교인암살'이 상대방이 홍술조와 단독으로 연락하여 벌인 일로 생각했다는 것처럼. 만일 '송교인암살은 절대 총리가 아니고, 총리는 책임질 수 없다"면 거기에 담긴 뜻은 결국 원세개가 부담해야한다는 말인가? 1년후, 왕치형이 부정부패죄로 하옥되고, 곧 피살된다. 그가 부정부패한 것은 오백대양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 일이 '송교인암살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을 것이다. 다만 왕치형이 원세개에게 악감정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왕치형은 조병균의 심복부하였다. 조병균도 마찬가지로 원세개를 여러해동안 따른 중요부하였다. 나중에 내무총장을 이어받은 주계검(朱啓鈐)에 따르면, 조병균은 신체가 크고 건장하고 얼굴에는 약간 얽은 자국이 있다. 조병균은 어려서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어릴 때 유괴되어 자신의 성도 모른다. 그래서 백가성의 가장 앞에 있는 "조전손리"의 "조"를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정월 초하루를 생일로 했다. 어른이 된 후, 조병균은 군대에 들어가 좌종당의 대군을 따라 서정한다. 그동안 마술이 뛰어나, 장요의 부대에서 선봉이 되어 이름을 날린다.

 

조병균은 친히 주계검에게 말한 바 있다. 서정때 성성협 고비사막에서 대풍설을 만났다. 사람과 말도 눈 속에 3일주야를 갇혀 있었다. 다행히 말의 배에는 여온이 있어서 약간의 따스함이 있었다. 그래서 얼어죽지 않을 수 있었다. 조병균에 따르면, 이때 인마중 거의 절반이 죽었다. 나중에 몽골군의가 발견하여 말과 사슴피를 먹여주어서 비로소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조병균은 이때 늑골에 상처를 입어, 일생동안 병이 많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못한다. 오로지 아편을 친구로 삼아서 살았다.

 

서정이 끝난 후, 조병균은 장관 장요를 따라 산동으로 가서 관리를 지낸다.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1899년말 원세개가 산동순무를 맡은 후, 조병균은 원세개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이때부터 경찰업무를 책임지고, 원세개 주변에서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된다. 경자국변후, 열강이 <신축조약>의 규정에 따라 천진에 주둔한다. 이미 직예총독이 된 원세개는 3천신군을 조병균에게 준다. 간단한 경찰훈련을 거친 후 배치된다. 열강들은 깜짝 놀란다.

 

다행히 조병균의 경찰부대는 확실히 우수했다. 당시의 신문에 따르면, 천진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경찰제도를 보유한 도시"가 되었다. 반년동안 도둑질하는 자가 없었다. "서양사람들마저도 탄복했다 이것은 아마도 조병균의 운이 좋아서일 것이다. 청나라말기 신정을 시작한 후, 원세개의 지원하에, 조병균은 중국최초의 현대경찰계통을 창립하낟. 중국현대경찰제도가 이렇게 시작된다. 원세개를 따라서 계속 승진하여 조병균은 청나라말기에 경부우시랑, 민정부대신등 중요직무를 맡는다. 그의 역사를 보면 조병균은 기술관료이고,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것은 없다.

 

현재의 주류견해는 조병균이 송교인모살에 참가한 동기가 송교인이 곧 북상하여 조각하면, 그의 총리직위를 지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송교인에게 손을 썼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실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북양시기의 내각해체율은 당시 세계최고였다. 반년 혹은 2,3개월에 총리가 한번씩 바뀌었다. 육정상은 민국성립 1년도 되지 않아 파면되었다. 만일 조병균이 송교인을 죽이면 자신의 총리지위가 안정적일 것아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국민당이 새로운 후보자를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송교인암살을 자신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외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상해에서 계속하여 조병균을 심문하라고 요구하자, 조병균은 머리가 아팠고, 원세개도 골치아팠다. 이때 총통부 비서장 양사이가 건의한다. 이번 풍파를 종식시키려면, 먼저 조병균의 총리직을 면직시키고, 당소의로 하여금 조각하게 하여 남방혁명당의 노기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조병균이 혐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국민의 평가를 받게 하고 다시 완화시키자. 원세개는 양사이의 건의를 받아들여,조병균의 사직을 비준한다. 그러나 당소의가 후임을 맡는 일은 늦추어진다. 나중에 육군총장 단기서가 대리국무총리의 직을 맡는다.

 

"송교인사건"의 바람이 지나간 후, 조병균은 그해연말 풍국장을 이어 직예도독이 되어 다시 관직에 나선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1914년 2월 26일 조병균은 돌연 천진독서내에서 급병으로 사망한다. 1개월전에 "송교인암살사건"의 주범인 응계형은 기차에서 사람에게 칼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이때는 송교인 암살시로부터 1년도 되지 않은 때이다.

 

한 풍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또 다른 풍파가 생긴다. 독자들은 아마도 물을지 모르겠다. 조병균은 왜 돌연 사망했는가? 응계형은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이 일련의 흉안은 혹시 누군가 그들을 살인멸구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