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만루(金滿樓)
조병균은 직예총독의 직을 받은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돌연 천진독서에서 급사한다. 그가 죽기 1개월전 '송교인사건'의 또 다른 흉범인 응계형도 기차에서 칼에 난도질당해 죽었다. 이 일련의 연속흉안은 모골송연하고 궤이하게 여겨졌다. 여기에 무슨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천진 <대공보>의 보도에 따르면, 조병균은 부임한 이래, 병을 안고 일을 봤다. 그동안 여러번 북경으로 가서 원세개를 만난다. 이상한 일은 없었다. 1914년 2월 26일 오전, 조병균은 도독부에서 부하와 일을 논의하였고, 저녁에 사저로 돌아간 후, 식사전에 중약을 한 제 먹었다. 식사후에는 문서를 살펴봤다. 그날 저녁에 무슨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다만 새벽 5시경, 조병균은 돌연 복통을 호소하고, 그후 구토와 설사를 한다. 상황이 아주 위급했다. 집안사람들이 급히 천진에서 가장 유명한 군의관 굴영추(屈永秋), 서덕순(徐德順)과 명의 왕연년(王延年)을 부른다. 이 세명의 명의가 도착한 후에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비록 연속하여 조병균에게 강심제를 놓았지만, 결국 목숨을 구하지 못하고, 그날 오전 조병균은 사망한다.
조병균의 사후, 원세개는 육군상장의 규격으로 장례를 치르게 한다. 치상비로 은1만원을 보낸다. 그리고 차남 원극문(袁克文)을 보내어 천진에서 장례식을 치르게 한다. 그후, 원세개는 다시 육군상장 음창과 비서장 양사이를 보내어 애도한다. 그리고 "창회양좌(愴懷良佐)"라는 네 글자를 써서 보낸다. 1916년 원세개가 황제를 칭한 후, 조병균을 1등충양공에 추존한다. 이렇게 예우한 것은 조병균에게 잘 대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병균 사후의 영예는 얻기 힘든 것이다. 다만 당시에 이런 소문이 있었다. 조병균은 병사한 것이 아니라 중독사한 것이다. 더더구나 어떤 사람은 그가 칠교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까지 말했다. 원세개가 살인멸구를 위해 조병균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독살했는지에 대하여는 최소 3가지 판본이 있다: 하나는 민국신문인 장사쇠가 말한 "독포도" 판본이다. 조병균은 포도를 잘 먹었는데, 원세개가 독즙을 침으로 포도속에 넣고 포도를 조병균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조병균은 원세개의 여러해동안 부하였고, 포도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그래서 조병균은 이를 먹었고, 얼마후 복통이 와서 화장실내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대하여 조병균과 사적 교분이 있고, 마찬가지로 내각에서 내무총장을 지낸 주계검은 비록 독살이라고 하더라도, '진문전언"의 '요리사버전'이다. 즉 조병균의 요리사가 매수된 후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조병균은 밤중에 화장실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토한 모습은 없고, 더더구나 '칠공유혈'은 없었다.
원세개의 명을 받들어 천진으로 조문하러 간 원극문은 <신병비원>에서 또 다른 판본을 제공한다. 조병균이 죽은 후, "눈은 감겨있고, 입은 벌려져 있으며 얼굴의 피부는 청회색이다" 그외에 손톱, 입술, 손은 청자색 혹은 흑자색이다. 입에서는 약간 침이 흘러나왔다. 원극문이 알아보니, 조병균은 그날 밖에서 식사를 하지는 않고 단지 차만 한잔 마셨다고 한다. 차를 마신후 집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하지도 않고 돌연 발병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병균은 부하 즉 경찰청장 양이덕(楊以德)과의 갈등으로 독살되었다는 것이다.
공식소식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러니 유언비어가 각양각색으로 펴진다. 소문이 많을수록, 진상에서는 더욱 멀어진다. 만일 조병균이 독살되었다면, 그 가족과 의사가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병균의 손자인 조순우(趙純佑)도 선조 조병균은 그저 병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후인들이 전을 지으며 함부로 가지를 추가하고 원세개의 혐의를 추측하여 기록한 혐의가 있을 분이다. 기실 조병균은 중풍으로 죽었다. 오늘날의 병명으로 말하면 "뇌일혈"이다. 죽기 전에 침실 침대옆에 쓰러졌다. 칠공유혈현상은 없었다. 이것은 당시 가족들이 친히 목격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병균이 원세개에게 독살당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헛소리이다. 그저 사망시간이 응계형의 피살과 지나치게 접근되어 있어서 여러가지 견강부회적인 소문이 돈 것이다.
독자들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응게형은 상해에 갇혀 있지 않았냐고? 어떻게 북방으로 도망쳐와서 피살되냐고. 원래, "2차혁명"이 발발한 후, 응계형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도망친다. 북경으로 도망친 후, 원세개에게 송교인을 암살한 보수를 달라고 한다. 그 결과 돈을 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협박을 받는다. 응계형은 형세가 좋지 않다고 보고, 급히 기차를 타고 천진으로 도망간다. 반쯤 갔을 때, 누군가 기차칸안에서 그를 칼로 난도질해 죽인다. 조병균은 이 소식을 듣고 원세개를 원망하는 말을 한 마디 했다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하면, 이후 누가 너와 같이 일한단 말인가?"
조병균이 이런 말을 했는지 여부는 이미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부회자들은 이 말을 인용하여 원세개가 조병균을 죽여 살인멸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논어에 말한 것처럼, "군자악거하류(愴), 천하지악개귀언(天下之惡皆歸焉)"(군자는 하류에 기거하기를 싫어한다. 일단 하류에 기거하면 천하의 모든 오명이 그에게 돌아온다). 원세개를 싫어하므로 모든 관련이 있건 없건 모조리 원세개에게 뒤집어 씌웠다. 많은 역사의 진상은 이렇게 왜곡되었고, 나아가 완전히 논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송교인암살사건"을 예로 들면, 현재의 주류견해는 원세개가 송교인모살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살인멸구를 위하여 그는 다시 무사영을 독살하고, 응계형을 죽여버리고, 조병균도 독살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원세개가 일찍 죽는 바람에 다행이지, 아니면 나중에 홍술조의 죽음도 그에게 뒤집어 씌웠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원세개는 나쁜 놈이고 모든 악행은 그와 관련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논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지만, 세부적인 점을 따져보면 헛점이 너무나 많다. 먼저, 살수 무사영은 상해호독군영에서 죽었다. 당시 상해는 북양계의 힘이 미치는 곳이 아니었다. 원세개는 상해의 조계에서 하고싶은대로 할 능력이 없었다. 만일 무사영이 모살되었다면 배후의 주모는 오히려 응계형이나 진기미일 것이다. 조병균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적인 우연으로 사망사건의 하나로 끼어들었지만, 실은 현임 대총통이 전임 총리를 모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조병균이 직예총독이라는 당시 가장 중요한 지방군정장관을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는 혁명당이 이미 무너졌고, 기세도 꺽였다. 원세개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원세개가 송교인과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상한 것처럼 그런 대립관계가 아니었다. 각종 소문은 왕왕 역사의 오해와 와전이 있다. 민국기자 황원용의 기록에 따르면, 원세개는 송교인암살소식을 들은 후 첫번째 반응이 극히 의외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후에 즉시 전보를 보내어 위문하고 강소 및 상해에 흉수를 붙잡으라고 명령한다. 다음날 오후 4시, 원세개는 낮잠에서 깨어난 후, 비서가 와서 송교인사망소식을 보고하자, 원세개는 깜짝 놀라면서, "그런 일이 있단 말인가? 빨리 전보를 가져와라." 전보를 다 보고난 후 원세개는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어쩌면 좋으냐. 국민당이 송교인을 잃으면, 사리를 잘 아는 수뇌를 하나 잃은 것인데, 이후 말하기 더 어렵겠구나." 이 말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송교인의 태도로 보더라도, 그는 암살한 후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국민당 영수인 손중산이 아니고, 북경의 원세개였다. 이 태조는 전체 사건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일정함 참고작용을 한다. 원세개에게 보낸 전보에서 송교인은 그저 부탁을 할 뿐 시종 암살혐의대상으로 원세개를 꼽지 않았다. 아마도 송교인의 직관으로 원세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봤을 것이다.
경력으로 보면, 원세개와 송교인의 교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시간도 아주 짧았다. 청말 "간도문제"의 교섭과정에서 원세개는 송교인의 "이름만 들었지, 만나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송교인의 재능과 애국심은 원세개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민국성립후, 송교인은 당소의내각의 농림총장이 된다. 그가 매번 총통부에서 원세개를 만날 때. 원세개는 그를 존중했고 잘 대해주었다. 장국금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당시 국무원 비서장을 맡고 있었는데, 매일 총통부에 들어가 일을 봤다. 원세개는 가끔 송교인을 얘기할 때 좋은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송교인이 처음 원세개를 만났을 때, 원세개는 그가 입은 옷이 낡은 것을 보고, 송교인의 제복이 일본유학생시절에 구매한 것인지 묻는다. 송교인은 그렇다고 답한다. 원세개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원세개는 사람을 시켜 고급양복을 만들어 송교인에게 보낸다. 송교인이 입어보니 몸에 딱 들어맞았다. 원래 원세개는 얘기하면서 몸의 칫수를 살펴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왕왕 원세개가 송교인을 매수한 증거로 얘기되어진다. 그러나 만일 정말 그랬다면 원세개가 인간관계를 처리하는데 확실히 고수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그외에 원세개가 송교인에게 50만원 수표를 보내준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근거가 없다. 이 이야기는 혁명당인 채기구의 역사연의 <악주혈사>에 나오다. 그중 소위 송교인의 "치원세개서"가 있는데, 원총통이 오십만원을 하사하였는데, 실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송)교인은 임하에 물러나서 농사짓고 글읽으며 혼자 즐기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쓸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수표를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이 서신은 기실 채기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북경정부의 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이, 설사 원세개의 통이 컸다고 하더라도, 당시 50만대양은 거금이다. 부대 하나를 무장시킬 수 있는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것이 아마도 원세개가 송교인에게 준 업무경비일 것이라고. 그러나 어투로 보면, 송교인은 이미 농림총장의 직무를 벗어났다. 설사 총장의 업무비라 하더라도, 50만은 이미 너무 큰 금액이다. 하물며 이것은 공비이지 개인증여가 아니었다. 절차나 재정상으로 보더라도 한꺼번에 50만의 거금을 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당연히, 원세개와 송교인간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국금에 따르면, 처음 국회선거기간, 송교인이 남방 각성에서 연설하며 표를 모을 때, 계속 북경정부를 공격했다. 한번은 원세개가 신문에서 송교인이 황주에서 한 연설문을 보고, 얼굴색이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입이 어찌 이렇게 날카롭단 말인가." 다만 송교인에 대한 불만의 소리는 이때 한번 뿐이었다.
국민당인이 국회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것에 원세개도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세개는 어쨌든 관료사회에서 수십년을 구른 사람이다. 여러가지 흉험한 장면도 다 보았다. 젊은 국민당에 놀라 자빠질 정도는 아니다. 원세개의 대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청말입헌파로 구성된 공화당, 민주당, 통일당과 연합하여 새로운 신당을 만든다. 즉 나중에 양계초가 지도하는 진보당이다. 이를 통하여 국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감쇄시킨다. 둘째는 금전, 관직등으로 국민당의원을 매수한다. 이렇게 하여 국민당을 분화, 약화시킨다. 국민당은 동맹회와 기타 소정당이 합병한 것이므로, 당을 확장할 때 니사구하(泥沙俱下)한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원세개의 이 방식은 효과를 많이 나타낸다. 많은 국민당의원들이 속속 탈당하여, 국민당은 중의원내에서 금방 우세한 지위를 잃어버린다. 이렇게 보면, 원세개의 두 가지 대책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모두 법률, 정치구조가 허용하는 범위내에서였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송교인을 암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다.
한걸음 물러나서 말하더라도, 설사 송교인이 암살되더라도, 국민당은 송교인의 사우에 여전히 새로운 대표를 총리로 추대할 수 있다. 한 사람을 없앤다고 정치국면이 바뀌지 않는다. 국민당내의 온건파인 송교인은 원세개의 이익에 훨씬 부합한다. 그리고 송교인은 혁명당중에서 원세개와의 개인교분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만일 송교인이 죽으면, 국민당이 격렬파를 추대하여 내각을 구성할 것이고, 이는 원세개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이에 대하여 원세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걸음 더 물러나서 말하더라도, 송교인이 내각총리가 되고, 국민당이 국회를 통제하더라도 그게 어쨌단 말인가? 원세개는 방법이 없는가? 이런 주장은 너무 낙관적일 수 있다. 사실상 원세개의 명망은 그의 역사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북양계외 지방실력파의 지지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군인과 관료의 역량은 젊은 송교인과 국민당이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원세개의 집권역사를 보면, 어느 내각총리든 원세개를 제약하는 작용을 하지 못했다. 총리도 없고, 국회도 없었다. 사실상, 전체 북양시기에 총리는 실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정치태도로 보면, 설사 송교인이 내각총리가 되더라도, 원세개와 격렬하게 충돌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경으로 가기 전에, 송교인은 말한 바 있다. 책임내각을 실행한다면, 대총통은 초연한 지위에 처하고, 정당은 조각을 다투지 총통을 다툴 필요는 없다고. 바꾸어 말하면, 송교인은 당시 국내에 원세개보다 더욱 대총통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세개가 왜 송교인이 총리를 맡는 것을 두려워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정치경험, 인맥등 각 분야에서 모두 송교인보다 나은 당소의도 3개월만에 낭패하여 물러갔다. 송교인이 총리가 된 후, 원세개가 지지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것은 미지수이다.
다시, 암살시기를 보자. 원세개도 송교인이 북상하려는 시기를 골라서 암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교인이 암살당하기 전날, 원세개는 막 4월 8일 국회를 개최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송교인에게 속히 북경으로 오라고 전보를 보냈다. 만일 이때 송교인을 암살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상해는 원세개가 장악한 지역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상해의 조계에서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만일 원세개와 원계형이 공모하여 상해에서 송교인을 암살했다면, 기능한 한 송교인이 상해에 있는 시간을 지연시켜야 했다. 왜 송교인에게 하루빨리 상해를 떠나도록 독촉했을까? 이 모든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여러가지 흔적을 보면, 원세개는 기껏해야 조병균과 마찬가지로 "훼송"(송교인의 명예훼손)에 대하여 알았을 것이다. 이 측면에서 "훼송"에서 "살송"까지는 아마도 응계형과 홍술조의 소인들의 계모일 것이다. 국민당인이며 당시 국회참의원 원장인 장계도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가 조병균을 만날 때, 왕치형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홍술조가 남하하기 전에 원세개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국사가 아주 어려운데, 이것은 2,3명이 반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방법을 강구하여 제거한다면 좋지 않겠느냐고. 원세개는 말했다. 한쪽의 혼란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양쪽을 교란시킬 것인가. 송교인이 암살된 후, 홍술조는 다시 원세개를 만난다. 원세개는 송교인이 도대체 누구에게 암살되었는지 묻는다. 홍술조가 대답한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총통을 대신하여 처리한 일입니다. 원세개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홍술조는 총통부를 나온 후 바로 병가를 내고 천진으로 요양을 떠난다.
이 기록을 보면, 홍술조와 원세개의 관계는 조병균이 얘기한 것처럼 삼엄하지 않았던 것같다. 오히려 조병균과의 관계보다 더욱 밀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교인이 암살되었다는 말을 듣고, 조병균은 내각회의에서 실태를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원세개와 홍술조가 이 일을 기획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죄를 뒤집어 써야할 것이라고 우려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더욱 기이한 주장이 있다. 홍술조는 원세개가 가장 신임하는 육이태(六姨太, 즉 洪姨)의 근친이라는 것이다. 채동번이 <민국연의>에서 말한 것처럼 "원세개는 1처 15첩이 있는데, 홍이는 원세개의 여섯째 첩으로 용모가 극히 아름답고, 성격이 교힐하여 원세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송교인사건의 흉수인 홍술조의 여동생이다" 이어서, 책에서는 홍술조가 어떻게 원세개의 진영에 들어가고 어떻게 여동생을 원세개에게 바쳐서 자신의 앞길을 닦았는지를 그리는데, 그것은 후안무치한 권색거래의 스캔들이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채기구가 <악주혈사>에서 '홍이'를 송교인암살의 주범으로 아예 묘사한다는 것이다. 송교인이 오십만수표를 거절한 후, 홍이는 원세개의 분노하에 한마디로 종용한다: 당당한 대총통이 송교인 하나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까.' 이 말은 마치 후궁이 정치에 간섭하는 듯한 맛이 있다.
사실이 그러했는가? 그건 알 수가 없다. 원세개는 일생동안 1처 9첩을 두었다. 1처 15첩이 아니라. 그중에 홍씨성의 첩은 없다. 이것은 모두 확인가능하다. 그리고 원세개는 처첩과 자녀들을 상당히 엄격하게 관리했고, 정치에 간여했다는 것은 증거가 없다.
전체 사건으로 보면, 홍술조는 원세개, 조병균의 신임을 받은 것이지 인척관계 혹은 정색거래를 통한 것이 아니다. 논공행상으로 비범한 실적을 내서 중용된 것이다. 아쉽게도, 원세개, 조병균은 모두 사람을 잘못 보았다. 그들은 홍술조의 뛰어난 재능과 업무처리능력만 보았지, 이 자가 담대망위하고 부정부패하는 나쁜 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홍술조와 같이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고, 오로지 이익만 탐하는' 소인은 모든 시기에 다 있었다. 이런 사람이 일을 맡으면, 그것은 시한폭탄과 같다. 언제든지 터질 수 있다.
원세개를 여러해동안 따른 기요비서장 장일린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송교안암살사건의 시작은 홍술조가 스스로 나서서 그를 명예훼손시킬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그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알았다. 홍술조는 무사영을 교사하여 송교인을 암살함으로써 큰 돈을 받아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큰 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원세개도 이를 말할 수 없다. 소인과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간단하지만 힘이 있다. 아마도 '송교인암살사건'의 진상에 가장 가까운 말일 것이다.
주목할 점은, 원세개가 죽은 후, 원극문이 상해 <정보>에 부친이 억울하다고 쓴 글이 있다. 송교인암살때 그는 상해에 있었고, 친히 진기미와 응계형이 송교인을 모해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 것이다. 부친 원세개는 '송교인암살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아니라, 송교인의 죽음을 아주 안타까워했다고 하였다. 원극문은 특별히 원세개의 두 마디 말을 강조했다. 하나는 앞에는 단방이 죽고, 뒤에는 송교인이 죽으니 이는 실로 큰 불행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송교인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송교인은 나빼문에 죽었다.
원극문은 말한다. 그는 일찌기 부친에게 친히 전통을 내려 해명하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 쓴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도 스스로 변명한 적이 없다.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자연히 생각할 것이다. 내가 만일 송교인을 죽이려면 왜 그를 불러서 오라고 했을 때 손을 쓰겠는가? 왜 그가 도착한 후 죄명을 뒤집어씌워서 죽이지 않았겠는가? 내가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다. 왜 하필 그 때인가. 그건 다른 사람에게 책잡히는 짓이 아닌가. 바보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물며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많다. 손문, 황흥, 진기미 등등 있지만, 나는 죽이지 않는다. 어찌 나에게 유리한 송교인을 죽이겠는가? 이 일은 내가 변명할 필요가 없다. 반드시 진상이 드러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반드시 응계형을 죽여서 송교인의 복수를 할 것이다.
원극문은 부친을 위하여 좋은 말로 감싸주었다. 이것은 상리이다. 그러나 그는 자칭 당시 상해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진기미, 응계형이 송교인을 모살했다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이 주장은 도대체 얼마나 탐구할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면 원극문의 주장은 얼마나 신뢰성이 있을까? 그는 상해에서 도대체 어떤 기밀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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