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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 해군(海軍)의 역사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중국해양보 

 

중국고대에 수상부대를 주사(舟師), 수군(水軍) 혹은 수사(水師)로 불렀다.  곽말약(郭沫若)이 주편한 <중국사고>에 따르면, 상(商)나라 후기, 상왕 무정(武丁)은 일찌기 사람을 배에 태워서 해상으로 도망친 노예를 추격하여 붙잡게 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선박의 품질이 좋아지고 수량이 증가하면서 선박은 대규모로 전쟁에 사용된다. 무왕(武王)와 주(紂)를 토벌하기 위하여 맹진(孟津)을 건넌 것이, 중국사적에서 선박을 군사운수용으로 사용한 첫번째 기록이다. 기원전 1070년 정월, 주무왕은 병력을 이끌고 주왕을 토벌한다. 전투참가부다는 47척의 큰 선박으로 운송했고, 맹진에서 강을 건너 동으로 진군한다. 목야(牧野)에서 결전을 벌여 상나라군대를 대파하고 직접 상나라의 수도인 조가(朝歌, 지금의 하남 기현)로 진격한다. 이번 도하작전은 조직이 엄밀하여, 선박을 지휘하는 사람을 별도로 두어, 규모가 사상유례없었다. 그러나 이들 선박은 어쨌든 임시로 징발한 배들이고, 수전에 쓰는 병기와 인원은 없었다. 그래서 아직은 주사(舟師)라고 부를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춘추시기, 철기의 사용은 조선기술과 조선능력을 유례없이 발전시킨다. 남방의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와 바다에 가까운 제나라는 전선을 건조, 개소한다. 관병을 뽑아서 수상작전을 훈련시킨다. <좌전.양공24년>에 따르면, "초자위주사이벌오(楚子爲舟師以伐吳)"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보면 기원전549년 이전에 초나라에는 이미 주사가 있다는 것이다.

 

진한시기에 수군은 이미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다. 한나라때의 유명한 전선은 누선(樓船)이다. <사기>, <한서>에는 누선장군, 누선교위, 복파장군(伏波將軍), 과선장군(戈船將軍), 횡해장군(橫海將軍), 횡해교위등의 칭호가 나온다. 한무제 유철은 일찌기 훈련이 잘되고 장비를 잘 갖춘 10여만의 상비병력의 대형 누선수사를 보유한다. <사기>에는 "누선은 높이가 10여장이고, 깃발을 그 위에 꽂아서 아주 장대했다."고 적었다.

 

두함(斗艦)은 동한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전선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에 처음 나온다. "유표치수군(劉表治水軍), 몽충두함(蒙沖斗艦), 내이천수(乃以千數)" 삼국시대 오나라에서는 조선업이 아주 발달한다. 3000명이상을 실을 수 있는 상하 5층짜리 대선도 만들었다. 230년 오나라는 만명이 수사를 파견하여 이주(夷州), 현재의 대만에 보내기도 했다.

 

송나라때, 중국의 병기발전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유럽인들이 검술을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 때, 남송의 전선은 이미 화전(火箭), 화구(火球), 벽력포, 돌화창(突火槍)등을 갖춘다. 1161년 10월 27일, 세계해전사상 첫번째로 화약병기를 사용한 해전이 황해 해역에서 벌어진다. 남송의 장수 예포(禮包)는 수군 3천명, 전함120척을 거느리고 산동 황도의 금나라 수사 대본영으로 직접 돌진한다. 남송 수군은 선진적인 화기장비를 가지고 금나라 수군함대를 격파한다.

 

원나라초기 수군전함은 17900척에 이른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전선 5천척의 건조를 명령하고, 수군 7만명을 훈련시킨다. 원나라군대는 화기를 개선하여, 최초의 "화포(火砲)"가 나타난다. 그리고 이를 전함에 장착한다. 1279년 4월, 원나라 수사는 남송 수사와 광동 애산의 근해에서 조우한다. 원군 전함의 대포격하에 남송수사는 결국 와해된다.

 

명나라때 중국의 조선업은 세번째 전성기를 맞이한다. 명나라 만력26년(1598년) 11월, 명나라와 조선의 수군은 일본수군과 한반도 남쪽의 노량의 서쪽해역에서 대규모 해전을 벌인다. 해전에서 명나라 조선 양국의 수군은 긴밀하게 협조하여 용맹하게 싸워 결국 승리를 얻는다. 일본군은 수만이 사망하고, 전선은 거의 전멸한다. 이번 전투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전후 조선은 200년간 평화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근대중국은 해권을 상실한다. 1875년 5월, 일본은 병력을 파견하여 대만을 점령하고자 한다. 청나라정부는 신속히 남양수사, 북양수사를 건설한다. 1888년 12월 17일, 북양수사는 정식으로 성립된다. 이때부터 근대중국은 아시아에서 규모가 제일 큰 해군함대를 보유하게 된다. 조정의 부패와 경비의 부족, 국내공업기반의 부족으로 북양수사의 전함은 항속, 사격속도등 분야에서 일본에 추월당한다. 1894년 청일갑오전쟁에서 북양수사는 전멸하고 만다.

 

1911년 신해혁명후, 손중산은 일찌기 "해군건설을 국방의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강대한 해군을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시대를 앞선 해양사상은 그저 지면에 응고될 수밖에 없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중국의 해군건설은 새로운 장을 연다. 처음에 근역방어형 해군에서, 점차 근해방어형 해군으로 발전한다. 다시 신세기의 발전을 거쳐 규모를 어느 정도 갖춘 해양해군의 역량을 갖추게 된다. "중화신둔" 유도탄구축함, 052C, 052D유도탄구축함, 039잠수정 및 쑤-30, 전략유도탄핵잠수함, 핵동력공격형잠수함 및 장거리유도탄, "요녕"호 항공모함, 비표등 전투기를 연이어 건설하면서, 중국해군은 만리집결, 원양작전의 공방능력을 갖추게 된다. 2012년 9월 25일, 중국의 제1호 항공모함 "요녕"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되었다. 이는 중국해군건설사상 새로운 이정표이다. 중국해군이 원양해군으로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