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왕기재연(王氣在燕): 명나라의 수도가 북경으로 정해진 경위는?

중은우시 2013. 3. 13. 23:55

글: 우좌(于左) 

 

명성조 주체(영락제)가 등극한 후, 공신들에게 크게 상을 하사한다. 장신(張信)도 봉상(封償)을 받은 사람중 하나이다. 그는 융평후(隆平侯)에 봉해지고, 식록(食祿) 1천석을 받았다. 자손들은 융평백(隆平伯)을 세습할 수 있다.

 

장신이 중요한 순간에 한 선택은 자신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부귀를 가져다 주었다. 이런 선택의 관건은 장신이 그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왕기재연'(연의 땅 즉 북경지역에 왕기가 있다)을 믿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때의 최초 도읍지는 응천부(應天府)이다. 즉 나중의 남경(南京)이다. 남경의 옛 이름은 금릉(金陵)인데, 전설에 따르면 전국시대 초위왕(楚威王)이 이곳에 왕기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금을 묻어서 그 기운을 눌렀다(埋金以鎭之). "금릉"이라는 명칭은 이렇게 생겨났다고 한다. 금릉의 왕기는 진시황도 어느 정도 눈치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진시황이 동쪽을 순유한 것은 바로 몰래 금릉의 왕기를 누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진시황은 명을 내려 진회하(秦淮河)를 파는데 이는 왕기를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한나라에 이르러, 금릉은 말릉(秣陵)으로 개칭된다. 삼국시대에는 다시 건업(建業)으로 불리고 진(晋)나라때는 건강(建康)으로 고치고, 집경로(集慶路)에 귀속시켰다. 원순제 지정16년 주원장은 집경로를 응천부로 개명한다. 24년, 주원장은 응천부에서 왕에 오른다. 즉 오왕(吳王)이다. 그리고 아들 주표(朱標)를 세자로 세운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유기(劉基)와 친구들이 항주 서호에서 놀다가 돌연 서북방향에서 괴이한 구름이 이는 것을 보였다. 광채가 빛나고 호수를 비추었다. 모두 황급히 이 보기좋은 구름으로 시를 짓는데, 유지는 한켠에서 계속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는 천자의 기운이다. 분명히 금릉이다. 10년후에 왕이 그 아래에서 일어날 것이니, 내가 보좌해야겠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헛소리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 유기는 과연 응천부로 가서 주원장의 중요한 모사(謀士)가 된다.

 

주원장이 응천부를 선택한 것은 이런 경위가 있다. 그는 일찌기 채석기(采石磯)에서 한 유생을 만난다. 그의 이름은 도안(陶安)이다. 그에게 가르침을 구하자, 도안은 주원장에게 먼저 금릉을 차지해서 왕업을 도모하라고 건의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주원장이 원나라의 한 대신을 만났는데, 그 대신이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만일 당신이 패도를 성취하고자 하면 나는 많은 돈과 재물을 바칠 수있다. 만일 당신이 왕도를 성취하고자 하면, 선주(宣州)로 가서 이승(異僧) 한 분을 찾아라. 그의 이름은 금벽봉(金碧峰)이다. 그가 분명히 전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대신이 언급한 금벽봉의 속세 성은 석(石)씨이다. 6살때 출가하여, 운적온법사(雲寂溫法師)를 스승으로 모셨고, 아미산에서 수련하며 곡기를 끊고 수련했다. 나중에 금벽봉은 선주성으로 돌아오는데, 스스로 추가집을 지어서 조용히 수양한다.

 

주원장이 선주로 가서 한 초가집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노승을 만난다. 주원장은 장검을 들고 걸어가서, 승려에게 이름을 물었다. 노승은 편안히 정좌하고 앉아서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주원장은 대노하여, 검으로 노승을 핍박한다. 그래도 노승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목을 길게 뻗으며 다가왔다. 주원장은 그 모습을 보고 눈앞의 노승이 보통사람이 아니란 것을 안다. 그리하여  웃으며 말한다: "당신은 사람을 죽이면서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장군을 본 적이 있는가?" 

노승이 말한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화상을 본 적이 있는가?"

 

원래 이 노승이 바로 금벽봉이었다. 주원장은 태도를 바꾸어, 그와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금벽봉은 이렇게 말해준다: "선생이 왕도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내가 몇 마디 선생에게 해줄 말이 있다."

 

주원장은 귀를 씻고 공손히 들었다. 금벽봉은 짧은 한마디만을 했다: "건강은 왕이 될만한 땅이 있다. 이곳은 진짜 제왕이 거주할 곳이다."

 

응천부에 도읍을 정한 후, 주원장은 취보문 밖에 사원을 하나 만들게하여 금벽봉이 거주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이름을 벽봉사(碧峰寺)라고 불렀다.

 

그러나, 주원장 자신은 응천부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곳의 가장 큰 문제는 위치가 지나치게 남쪽에 치우친 것이다. 오왕의 왕부로서는 괜찮으나, 대명왕조의 제도로서는 북부, 서북부의 변강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강남의 형세는 절대 서북을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국가의 강역이 확대된 후, 이곳은 도성으로서 최선의 위치는 아니게 되었다.

 

명나라때 어떤 사람은 금릉의 형세가 산란(散亂)하고, 장강은 흘러가고 머물지 않으므로 제왕의 도읍이 될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주원장의 계획에서 응천부는 도읍의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는 홍무원년의 한 조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금릉, 대량(大梁)을 남경, 북경으로 삼는다.

 

이곳에서 말하는 대량은 곧 변량(汴梁)이다. <국초사적>의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과거 응천부(즉, 금릉)를 도성으로 한 육조는 국운이 창성하지 못하고 짧게 존속했다. 그러므로, 천도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적합한 장소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변량을 탈취한 후, 주원장은 친히 가서 형세를 살피고나서 내린 결론은 변량은 방어하는데 험준한 장벽이 없어, 사면에서 적을 맞이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변량 낙양일대가 도성으로 적합한지에 대하여 역대이래로 여러가지 의견이 있었다. <북사.제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북위때, 권신 고환(高歡)은 황제에게 업(鄴)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한 바 있다. 도성으로서 낙양은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 왕기가 쇠하였고 주위형세가 비록 산하로 굳건하지만 토지가 편협하다는 것이다. 고환이 낙양을 이렇게 평가한데는 그 자신의 사심이 물론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본거지가 진양(晋陽)이므로, 모든 문제를 고려할 때 자신의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하다.

 

고환이 내세운 논리의 근거는 낙양의 형세와 물산을 고찰한 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소위 "왕기(王氣)"였다. 낙양의 왕기가 쇠하였다는 주장은 개략 이치에 들어맞는다. 북위이후, 정식으로 낙양을 도읍으로 삼은 왕조는 거의 없다. 수당시기에 낙양을 동도로 삼았다. 지위는 비록 중요하지만 정식의 도성과는 그래도 다르다.

 

변량일대를 제외하고 도성이 될 만한 곳으로 장안(長安)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일찌기 장안으로 천도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주원장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조운이 어렵고 또한 이미 끝났다(已之)"

 

제왕의 도읍지는 궁궐과 백관이 일을 해야 하고, 백성들고 신하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일상적으로 필요한 물산이 많다. 장안은 지리적으로 편벽되어 있고, 물산이 풍부하지 않다.조운의 노선도 멀고 힘들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한,수,당등 왕조가 장안에 도읍을 정하여 오랫동안 지났으니, 장안의 왕기는 일찌감치 쇠약하여 도읍으로 삼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홍무24년 8월에 이르러, 주원장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장안으로 천도하는 문제를 고려한다. 황태자 주표를 섬서로 보내어 관중의 형세를 고찰하며 적절한 도읍의 위치를 선정하게 했다. 같은 해 11월, 주표는 남경으로 돌아와서 고찰결과를 보고한다. 부자간에 당연히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달 후 젊은 주표는 병사하고 만다.

 

황태자가 요절하자, 주원장은 큰 타격을 입는다. 관중으로 천도하는 일은 이렇게 하여 사실상 포기된다. 방효유가 황태자 주표를 위하여 쓴 만시(挽詩)를 보면 이 일이 언급되어 있다:

 

상택도방헌(相宅圖方獻), 환궁질거침(還宮疾遽侵)....

관중제부로(關中諸父老). 유망취화림(猶望翠華臨)

 

실제로, 주원장은 천도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홍무27년, 어느날 아침조회후 주원장은 화개전에서 국자박사 전재(錢宰)등 몇몇 노신들을 불러서, 웃는 얼굴로 모두 자리에 앉으라고 한 후, 함께 금릉의 형세를 논의한다. 토론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토론의 주제는 당초 금릉을 수도로 정한 것이 적절하였느냐는 것이고, 주씨강산이 영원히 이어질 수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때는 명나라가 건국된지 이미 이십여년이 흐른 뒤이다. 주원장은 여전히 대신들과 이 이슈를 토론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마음 속으로 남경을 수도로 삼은데 대하여 의혹이 깊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재는 돌아간 후, 그는<금릉형세론>을 쓴다. 주원장이 금릉에 도읍을 정한 것은 주(周)나라가 낙읍에 도읍을 정한 것이나, 한나라가 장안에 도읍을 정한 것과 비교하여 금릉의 형세와 기운이 낙읍과 장안보다 낫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종산은 용이 서린 것같고, 석성은 호랑이가 웅크린 것같다. 이는 왼쪽과 오른쪽을 모두 돌보는 것과 같다. 이 곳은 황도로 삼아 기반이 튼튼하다. 진회의 물, 현무의 호수는 위사반선(委蛇盤旋)하며, 대강이 흘러들어 그 옷깃을 굳게 감싸안고 있다. 강,한의 두 물이의 조종, 금, 초 두 산의 대치는 웅위굉려(雄偉宏麗)하기 그지없다. 그 땅의 형세가 뛰어남은 천지간에 위대하다고 할 만하다.

 

명나라때 양대 도성인 남경과 북경의 선택은 두 인물과 관계가 밀접하다. 하나는 금벽봉이고, 다른 하나는 이지강(李至剛)이다. 그래서 <칠수류고>에는 이런 말이 있다:

 

"태조가 남경에 도읍을 건설한 것은 화상 금벽봉이 알려준 것이고, 성조(영락제 주체)가 북경으로 천도한 것은 상서(尙書) 이지강이 알려준 것이다."

 

이지강은 송강(松江) 화정(華亭) 사람이다. 사람됨이 기민하고, 홍무, 건문, 영락, 홍희의 4황제의 아래에서 모두 관리를 지냈다. 관운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심지어 여러번 죄를 받거나 변방으로 쫓겨나거나 하옥되거나 강등되기도 했다. 항상 문제가 터졌고, 힘든 편이라 할 수 있다.

 

명성조가 즉위한 후, 이지강을 우통정(右通政)에 기용하여 <태조실록>의 편찬을 맡긴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지강은 자주 명성조와 접촉을 했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예부상서로 임명된다.

 

이 기간동안, 이지강은 명성조를 화나게 하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이지강이 관복을 빼앗겨서 민간복장으로 있은 적도 있었다. 당시 이지강은 아직 실록을 편찬하고 있을 때였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관(史館)에 드나들었다. 문을 지키는 사람은 그가 관복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그의 신분을 의심했다. 그래서 항상 그를 가로막고 몇마디 물어보곤 했다. 이지강은 아주 난감하였다. 자신은 당시 우통정도 아니어서 그저 자신을 "수사인(修史人) 이지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강은 남방사투리가 아주 심했다. 이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면 듣기에 "수사인(羞死人, 부끄러워 죽겠는 사람) 이지강"으로 들렸다. 사관의 동료들이 그의 말을 들으면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명성조가 가장 이지강을 신뢰할 때, 그는 처음으로 북경천도를 공개적으로 건의한다. 이지강의 건의는 자연히 명성조에 의하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명성조 자신의 뜻인지, 아니면 이지강의 독자적인 견해였는지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지강이라는 사람은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품은 별로였다. <명사>에 그를 이렇게 썼다: "기득상삼(旣得上心), 무위녕유(務爲佞諛)". 아마도 그의 아첨하는 모습이 너무나 노골적이었던 것같다. 그가 가장 득의만면할 때도, 그의 많은 건의들은 명성조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천도를 주장하는 것을 그가 명성조의 마음을 추측하여 먼저 나서서 황상의 뜻에 맞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 명태조 주원장은 남경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북경은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북경이 수도가 된 것은 주체(영락제) 자신 때문이었다.

 

다만, 일부 대신들은 북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영락19년 사월, 즉 북경으로 천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의 황궁에 있는 봉천전, 화개전과 근신전에 화재가 발생한다. 여러 대전이 화재로 모조리 소실된다. 하늘이 재앙을 내렸다고 하여 명성조는 스스로 깊이 반성했고, 조서를 내려 직언을 하라고 한다. 대신 소의(蕭儀)등은 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북경으로 천도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조는 명성조를 대노하게 하였다. 당초 천도전에 자신은 대신들과 비밀리에 오랫동안 상의를 했었고, 마지막에 결정을 내린 것이므로 절대 경솔하게 한 조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성조는 소의를 죽이라고 명령내린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오문의 밖으로 가서 꿇어앉아 논쟁을 벌이도록 한다. 천도에 대한 이견은 이렇게 점차 평정된다. 그후 명영종 정통6년, 건청궁, 곤녕궁, 봉천전, 화개전등 궁전이 완공되고, 북경은 마침내 정식으로 도성이 된다. 문무각부서가 더 이상 '행재(行在, 행재는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영락제는 즉위후 남경의 공식정부조직외에 북경에 행재6부를 두었다)"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한 왕조의 도성을 선택하는 것은 건국자들이 중시한 일이다. 지리형세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역시 건국입도(建國立都)이다. 그래서 명나라때 인물인 장황(章潢)의 <도서편>에서는 "논제도(論帝都)"라는 부분까지 두는 것이다.

 

"무릇 지리의 크기는 건도입국에 우선하는 것이 없고, 고대의 선현, 철인, 제왕을 살펴보면, 도읍을 경영하는데 그가 거처할 땅을 함부로 정하지 않았고, 그 길흉을 살펴서 했다."

 

북경의 동,북,서의 삼면은 변방(塞)에 이웃하고 있다. 감여(풍수)의 각도에서 보자면 형(形)과 기개(氣慨)가 있고, 웅혼후중(雄渾厚重)하다. "왕기재연"이라는 말은 북경의 거대한 기세를 잘 나타낸다. 송나라때부터 이미 이곳의 풍수가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주희(朱熹)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冀都, 북경)는 천지의 중간에 좋은 풍수이다. 산맥은 운중에서 출발하는데 운중은 마침 높은 등성이(高脊)에 처해 있고, 등성이로부터 서쪽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들어가 용문의 서하가 되고, 등성의 동쪽의 물은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앞에는 황하가 둘러싸고 있고, 오른쪽은 화산이 우뚝솟아서 호랑이(虎)이고, 화산에서부터 가운데로는 숭산이 있고, 앞이 전안(前案)이다. 지가가면 태산이 왼쪽에 솟아 있으니 용(龍)이다. 회남의 여러 산은 제2의 중안(重案)이고, 강남의 여러 산은 다시 제3,4의 중안(重案)이다."

 

주희의 시야는 아주 넓다. 남송과 대금국은 서로 적대국인데, 금나라의 해릉왕이 찬탈한 후, 연경으로 천도했고, 중도(中都)라고 개명한다. 주희는 적국의 도성풍수를 이렇게 찬미한 것이다. 이를 보면 그는 순수하게 풍수의 각도에서 한 말이지, 아부하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북경의 풍수에 대하여 대거 찬미하게 된다. <광지역>에는 이렇게 북경의 형세를 논한다:

 

"연의 땅(燕地, 북경을 가리킴)은 태행산이 서북으로 있고, 바다가 동남에 모여 있다. 기세는 진중, 진좌, 산우보다 크다. 바다는 공(空)에서 실(實)로 향하고, 연은 좌실조허(坐實朝虛, 실에 앉아서 허를 향하다)하니, 황화, 고북의 여러 관문이 험준하게 연결되어 있어 두텁기가 백리나 된다. 진은 이미 당, 우, 하가 발상한 곳이다 왕가가 어찌 연의 땅을 얻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북경의 천수산과 남경의 종산을 서로 비교하여, 더욱 먼 곳의 태행산에서 연면히 이어져 왔다고 한다:

 

"천수산은 서산동절(西山東折)해서 온 것이다. 용상봉무(龍翔鳳舞)의 장릉(長陵, 주원장의 무덤) 일맥은 실로 만년보장지지(萬年寶藏之地)이다.....태행은 먼저 하남에서 시작하여, 고리가 산과 바다를 돌아 수천리에 이른다. 그것이 경사에 이르니 이름을 서산이라 한다. 엣 이름은 제팔형(第八陘)이다. 연에서 두께가 수십,백리에 이른다. 세는 연산거판(連山巨阪), 지축천관(地軸天關)하고, 뛰어나기는 춘화하과(春花夏果), 추운동설(秋雲冬雪)이다. 아주 뛰어난 경관이다. 거용, 자형, 도마는 내삼관이고, 모두 태행에 예속되어 있다. 큰 물은 상건, 청, 탁장이 모두 태행을 뚫고 동으로 나온다."

 

<오잡저>에서도 북경의 형세는 개백웅대(氣魄雄大), 규모홍원(規模弘遠)하다고 하였다. 제국의 전체 강역가운데, 첫머리에 꼽히니 남경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거용(거용관)이 그 등을 막고, 하,제가 그 앞을 가리니, 산과 바다가 그 왼쪽을 막고, 자형이 그 오른쪽을 통제한다. 웅장한 산이 높이 솟아 대치하고 있고, 흐르는 강물이 띠처럼 놓여있다. 이는 하늘이 땅에 만들어준 것이고 우리 나라를 기다린 것이다. 경사를 건설함에는 사람의 머리를 두는 것과 같다. 뒤에는 베개가 있어야 하고 앞은 탁 트여 있어야 한다. 연의 아래로, 서주, 회주에 이르기까지 비옥한 들판이 철니레 이르고, 제, 진을 어깨로 삼으며, 오, 초를 배로 삼고, 민, 광을 다리로 삼을 수 있다. 절강의 앞바다가 동쪽으로 둘러쌓여 있고, 운남, 사천이 서쪽을 감싸안고 있다. 이는 천하의 목구멍을 누르며 그 등을 두드리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세가 웅대하고, 규모하 홍원하니 건강의 편벽된 땅과는 하늘과 땅의 처이가 있다."

 

당초 북평도사 장신은 "왕기재연"이라는 말만 듣고, 전투에 임하여 창끝을 돌렸다. 이는 명성조 주체 개인과의 관계가 더욱 컸다. <영성정의>에는 이렇게 말한다: "땅이 있고 사람이 없으면 함락시킬 수 없다. 사람이 있어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함락시킬 수 없다." 당초 주원장이 다른 아들을 연왕으로 삼았더라면 역사는 아마도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우주는 커서 닫히고 열리는데 기운이 중요하다. 산천은 진실한 성정이 있으니, 기세가 우선한다. 연왕 주체가 번저에서 거병하여 몇년간의 잔혹한 전투를 거쳐 피를 뿌리며 마지막에 사람들은 사적으로 반신반의하던 한마디 '왕기재연'을 주체는 차갑고 굳건한 방식으로 입증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