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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 대예의지쟁(大禮儀之爭)의 진상

by 중은우시 2013. 4. 13.

글: 자작자애2(自作自愛2) 

 

정덕제(正德堤)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가 오기까지 35일간, 양정화(楊廷和)는 실제로 대명제국을 통치한다. 그는 즉시 이미 죽은 황제의 조정을 해체하고, 변방주둔군을 불러들여 태감들을 제압하고 나서, 경사의 부대는 그들 원래의 지휘관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변방부대는 그들 원래의 주둔지로 돌아갔다. 외국의 사신을 돌려보내고, 황제 개인의 궁중승려들은 자신들의 절로 돌려보낸다. 북경에서 명령을 기다리던 장인, 악인, 선공도 고향으로 돌려보내진다. 완의국의 부녀들은 그녀들의 가정으로 돌려보내어진다. 모든 이들 조치는 정덕제의 유조를 집행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들 내용의 유조는 실제로 양정화가 쓴 것이다.

 

명세종(明世宗) 주후총(朱厚熜)에 있어서, 그의 즉위방식은 중국역사상 독특한 것이다. 선례가 없었다. 그는 당형(堂兄)인 명무종(明武宗)은 명효종(明孝宗)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명무종이 생전에 관련규정과 전통예제에 따라 자신의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으므로, 신황제를 세우는 일은 명무종의 모친인 자수황태후와 각신인 양정화등이 처리했다. 이런 특수한 배경하에, 가장 좋은 보완방식은 명무종의 조카뻘에서 한 사람을 골라, 명무종의 양자로 만들어, 명무종의 아들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최대한 신군주의 즉위시 정치적 혼란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정화등이 선택한 사람은 명무종의 당제(堂弟) 주후총을 선택한다. 이것은 명무종의 단자(斷子)를 정식으로 선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세종은 명무종의 당제의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한다. 이것은 양정화등이 초안한 명무종 유조에 명백히 규정한 내용이다. 아무도 바꿀 수가 없다. 황급히 주후총을 선택한 것을 보완하고 명효종이 절손되는 유감을 보완하기 위하여, 양정화 등은 명세종이 합법적으로 계위한 이 법률문서를 무시하고, 명세종이 명무종의 당제라는 신분을 바꾸고자 한다. 명무종의 친동생이라는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하게 하려 한다. 나아가 부모를 바꾸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대예의"지쟁이 벌어진 것이다.

 

"대예의" 자체를 말하자면, 그것은 간단한 예의지쟁이 아니다. 명세종 즉위의 합법성에 관한 논쟁이다. 특히 명무종 유조가 실제로 집행되느냐의 중대한 정치논전이다. 이 논쟁에서, 양정화집단은 예의를 명목으로 하여, 명세종 즉위의 특수성과 명무종 유조의 명문규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결정했다. 소위 만세불변의 "예(禮)"로 명세종으로 하여금 양정화의 주장을 인정하고 굴복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7살때부터 <효경>을 읽은 소년천자 명세종은 자신의 효심을 보이기 위하여, 그리고 명무종 유조의 법률지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양정화집단과 싸움을 전개한다. 그리고 결국 대예의의 승리를 거두고 명무종 유조의 존엄을 지켜내고, 자신의 독립적인 자태를 확립한다.  

 

번왕인 주후총은 경성에 들어올 때 세력이 없고 외로웠다. 고립무원이었다. 양정화집단과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예의가 이렇게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황제인 명세종이 잠시 모든 황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대예의는 명나라때 황권이 명무종에서 명세종으로 흘러갈 때 반드시 거처야 하는 길이다. 즉 명나라 정치질서를 회복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다. 명세종은 대예의에서 하나하나 승리를 거두는데, 이는 기실 황권을 조금씩 회복하고 질서를 하나하나 되찾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이 논쟁은 명나라때 다른 논쟁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예제방면에서 경전의 근거를 찾는 것은 각자 할 말이 있다. 모두 대예의의 본질적인 특징 및 명나라때의 정치의 긴 역사에서 가지는 진실한 정치작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학자는 대예의지쟁에서 명세종의 승리와 양정화의 실패를 세종황권의 횡포의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자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양정화집단을 명나라정치의 핵심대표와 가정제시대의 당연한 주도역량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명무종 황권을 어떻게 전부 명세종의 수중으로 이전시킬 것인가 하는 기본문제와 명나라정치의 현실규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사실상 양정화등의 사람들은 명효종과 자수황태후를 빌어 대예의의 명목으로 명세종을 압박하려 했다. 이는 명세종이 황권을 완전히 보유하는데 장애를 설치하는 것이고 간섭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명세종은 마음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후에 여러 장소에서 대예의기간동안 사람들에게 당한 것에 대한 분개를 드러냈다. 이 현상은 명세종 개인의 느낌처럼 보이지만, 기실 황권체제가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명세종이 보기에, 양정화집단은 대예의를 빌어 자신의 황위의 합법성을 부정하려고 하고,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양정화의 대예의관 옹호자들은 명나라의 정치실정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각신과 황제가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명나라정치에 얼마나 거대한 부정적작용을 할 것인지도 보지 않았다. 비록 양정화집단의 사람이 비교적 많았지만 그들의 대예의주장은 헛점이 많았고, 기껏해야 일방적인 견해일 뿐이었다.

 

대학사 양정화는 그가 1524년에 어쩔 수 없이 이직할 때까지, 마음대로 일체의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조정신하들에게 강제했다. 그리고 황제에게도 강제했다. 다만 이 아이와 그 모친은 만만치 않은 적수였다. 양정화는 이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조정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고, 대학사들의 권한을 확대하고자 했으며, 한림원 및 그 구성원의 위신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는 무정하게 고급기관에서 그를 반대하는 사람을 배척했다. 1521년 5월, 그는 가장 세력이 큰 적수인 이부상서 왕경(王瓊, 1459-1532)의 관직을 박탈하고, 가둔다. 그리고 제국에서 먼 서부변경으로 유배를 보낸다. 마찬가지 책략으로 직급이 비교적 낮은 수백명의 관리들을 처리한다. 그는 특히 대예의에서 그의 주장에 반대한 모든 사람을 배척한다.

 

양정화집단이 패배하는 과정에서, 신생역량이 신속히 굴기한다. 전력으로 명세종을 지지한 일반관리인 장총(張璁), 계악(桂萼), 방헌부(方獻夫), 석서(席書), 곽도(霍韜)등이 있다. 대예의논쟁초기, 장총등은 양정화집단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인신공격에서, 보복타격에 암살공포까지, 아주 악랄한 정치적환경에 처했다. 장총등에 대응하기 위하여, 양정화집단은 모든 수단방법을 다 썼다. 발호하고 미친 듯한 행적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황제로서 명세종은 대예의초기 장총등의 사람을 보호할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양정화집단은 그들에게 마음대로 보복할 수 있었다. 다만, 장총등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작은 힘과 정심한 예학의 소양으로 명세종을 지지하고 여러 측면에서 양정화의 대예의관을 공격한다. 그리하여 피동적 입장에서 점차 주도권을 찾아가고, 마지막에는 그를 무너뜨린다.

 

이 논쟁에서, 장총등의 태도는 아주 자신있고 굳건했다. 거대한 압력을 받으면서 양정화집단과 불요불굴의 항쟁을 전개하고, 명세종의 존중을 받아냈을 뿐아니라, 쌍방의 이해를 강화시킨다. 그리하여 명세종은 자신이 의지할 수있는 진정한 역량을 발견하게 된다. 동궁의 옛 사람들을 지니지 못한 명세종은 그저 대예의과정에서 자신이 필요한 믿을만한 신하들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대예의과정에서, 명세종은 예의쌍방의 표현을 보며 대신을 취사선택하는 주요한 기준을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대예의 주장을 지지하느냐 여부이다. 누구든지 명세종의 대예의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명세종을 지지하는 것이 황제에 영합하거나 잘보이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황제에 아부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대예의에서 논쟁쌍방의 행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아니하고, 황제와 대항한 조정신하를 보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긍정하고 칭송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너무 편파적이다. 방대한 양정화집단은 3,4년만에 와해되고 붕괴된다. 그리고 철저히 제거된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명세종과 장총등 '대예의신귀족'을 한 마디로 견책해서도 안된다. 장총등은 양정화집단의 탄압속에서 유약변강(由弱變强)했고, 두각을 나타내어, 후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일부 연구자들처럼 양정화집단의 입장에 서서 그에 대하여 조롱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대예의는 명세종과 장총등의 전면승리와 양정화집단의 철저한 실패로 끝난다. 이는 명나라정치체제 자체의 요청이다. 명나라의 정치적 이익에도 부합한다. 명세종은 대예의를 빌어 성공적으로 인사교체를 이룬다. 그리고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인사국면을 조직한다. 가정3년, 명세종은 흠정대례(欽定大禮)한다. 이는 명나라 황권이 명무종에서 명세종으로 이전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명무종시대가 기본적으로 끝났고, 가정혁신시대가 진정으로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명세종은 대예의를 빌어 교묘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황권의 이전을 실현한다. 그리고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을 철저히 제거한다. 황제를 핵심으로 하는 완전히 새로운 인사구조를 건설한다. 이렇게 하여 명나라정치는 황위결위로 인한 혼란국면이 끝난다. 이 얻기 힘든 인사교체로 일련의 정치혁신을 이루고, 효과적으로 명나라때 정치를 쇄신하며, 가정제이후 명나라역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는 중국고대역사서에 쓰인 특수한 한 페이지이다.

 

PS:

 

인류간의 투쟁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엘리트중의 엘리트이다. 실패한 측의 절대다수는 그들이 총명하지 않아서 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난 상대방이 그들보다 총명해서이다; 본래 투쟁에서 우세를 점령한 총명인측이 실패하는 것은 그들이 충분히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절대다수의 상황은 상대방의 총명과 능력을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이다.

 

왜 양정화는 가정을 선택했을까? 양정화가 가정제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정화는 누구를 선택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통제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적계황제이자 전국의 문관이 모두 다루기 힘들다고 생각한 명무종마저도 자신에 의하여 죽었는데, 다른 명분이 충분하지도 못한 방계황제는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총명은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의 총명은 외투(外鬪)에 능하다. 바로 명무종과 같은 사람이다. 명무종의 실패는 그가 문관집단이 명나라를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모델에 도전했다. 그는 드러내놓고 무장의 지위를 제고시켰다. 이는 문관집단이 전체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때의 양정화는 권력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의 병치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의 총명은 내투(內鬪)에 능하다. 이는 가정제(명세종)와 같은 사람이다. 가정제는 아주 총명하다. 가정제의 행위는 바로 내가 황제이면 나에게 좋은 일이 있어야 한다 너희 문관들이 나 개인의 이익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너희 문관집단이 변방군대를 불러들이고, 진수태감을 취소시켜도 모두 좋다. 나는 이견이 없다. 다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우두머리만 아니면 된다.

 

가정제가 막 즉위했을 때의 태도를 보면, 양정화는 중국최대의 간신이고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양정화는 먼저 가정제로 하여금 부친을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 즉, 지록위마식의 시험이다. 양정화의 이처럼 황제를 제대로 정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식, 황제로 하여금 자신의 부친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은 원래 '지록위마'이며 황위찬탈의 전주이다. 단지 가정이 아주 총명해서, 간신이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쉽게도 양정화는 두 가지를 잊었다. 첫째, 비록 양정화가 조정을 통제하고 있지만, 군대를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사모반을 일으킬 수 없었다. 둘째, 명나라황제는 일처리를 할 권한은 없었지만, 관리를 승진시킬 권리는 있었다. 그래서 일단 이 황제는 국가가 좋은지 나쁜지는 관여하지 않았고, 너희 문관집단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문관중 누구든지 나를 황제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만 신경쓴다. 양정화라는 이 문관집단(직업경영인)의 우두머리는 문관집단과 황제(동사장)의 모순을 이용하여 황제를 견제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관집단의 이익이 어쨌든 최대화된 상황하에서, 누가 우두머리가 되느냐가 첫번째 문제이다. 외부에서 위협이 없는 상황하에서, 내부에서 우두머리를 다투는 것이 자연히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이익법칙이다. 명무종은 적극적으로 군인의 지위를 제고시켰고, 자주 평민사회로 들어가서 민생을 이해하려 했다. 이것은 문관기득이익집단의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 문관집단의 돈을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양정화는 가볍게 문관집단을 단결시켜 명무종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정제는 충분히 수중의 권력과 법칙을 이용하였고, 그가 계속 황제로 있을 수있도록 지지하는 사람을 우두머리가 되도록 도왔다. 그저 그가 황제가 되어 마음대로 즐기게 놔두기만 하면, 너희 문관들이 부정부패하려면 하고, 당파를 만들려면 만들어라.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렇게 하여, 문관집단과 가정제는 이익충돌이 없어진다. 오히려 내부투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양정화와 충돌한다. 그래서 가정제는 졸지에 하나로 뭉쳐 있던 양정화의 문관집단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명무종이 싸워서 쓰러뜨려야 할 것은 당시 명나라의 통치계층이었다. 가정제가 쓰러뜨려야 할 사람은 다른 뜻을 가진 양정화였다. 쌍방의 중량은 차이가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