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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청류오국(淸流誤國) - 대예의(大禮儀)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불요이분법(不要二分法) 

 

한비자의 저작중 <난(難)>은 상당히 별다르다. "난"은 반박이다. 먼저 이미 정설도 되어 있는 역사이야기를 한 후에, 다시 반박하는 것이다. 즉, 먼저 과녁을 고정시킨 후 다시 무너뜨리는 것이다. 

 

먼저 '대예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예의'는 소위 청류인 사대부와 황제,내각정치와 황권정치의 투재이 격화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당연히 이 사건의 결말은 황권의 승리로 끝난다. 

 

"대예의"는 명나라 가정연간 명세종의 선부(先父)인 흥헌왕(興獻王) 주우원(朱祐杬)의 존호(尊號)를 놓고 다툰 논쟁이다. 조정의 예법중 큰 것이므로 대예의라고 불렀다. 정덕16년(1521년) 저명한 황매희의 장면인 <유룡희봉>의 북경성에 사는 명무종 주후조가 죽는다. 주후조는 후사가 없었다. 자수황태후와 수보대학사 양정화는 '형종제급'의 조훈(기실 당시 최선의 방법은 명무종의 조카중에서 한 명을 골라서 무종을 잇게 한 후, 무종의 아들 신분으로 황위를 승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만든 명무종의 유조중의 '유언'에는 '흥헌왕의 아들 후총'이 황제위를 승계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후총이 등극하니 그가 명세종이다. 양정화는 유가의 윤리를 임의로 고쳐서 주후총이 명효종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주후총에 타격을 가하고 자신의 권위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후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의 황위의 합법성과 관련되는 일이다. 그래서 주원장이 4대선조까지 황제로 봉한 사례를 본떠서, 이미 죽은 부친을 황제로 추존한다. 이 조치는 조정대신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온다.

 

명세종이 명무종의 당제의 신분으로 황위를 계승하는 것은 양정화등이 초안한 명무종의 유조에서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정제는 외번에서 황제로 즉위했으므로 자신의 황위의 합법성을 보호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지위가 불안정하게 된다. 이 소년황제는 여러번에 걸쳐서 차라리 황제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친생부친을 황제로 추존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는 양정화와 여러 신하들의 강렬한 반대를 불러온다. 여러 대신들은 전례없이 단결하여, 반대하는 상소문으로 명세종은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된다. 명세종은 어쩔 수 없이 양보할 생각을 한다. 이때 장총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가정제를 도와준다.그는 글을 써서, 가정제가 자신의 부모를 추존하려는 것은 여러가지 이론적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경전에서 인용하여 여러 신하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가정제는 여기에 고무를 받는다. 장총도 관직이 오르고 작위를 받는다. 그는 의례파(議禮派)의 우두머리가 된다(반대파대신들은 호례파(護禮派)라 불렀다).

 

1524년(가정 3년), 주후총은 예부에 칙유(勅諭)를 내리는데 내용은 "오늘로 흥헌왕을 본생황고공목헌황제로 한다"는 것이다. 반대파 200여명은 좌순문에 꿇어앉아 새벽부터 정오까지이른다. 명세종은 여러번에 걸쳐 신하들에게 물러가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은 여전히 땅바닥에 엎드려 항의를 한다. 주후총은 대노한다. 금의위로 하여금 오풍이하의 관리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곤장을 때리게 하여 그중 17명이 목숨을 잃는다. 나머지는 모조리 조정에서 축출한다. 그리고 각각 감옥에 가두고, 녹봉을 박탈하고, 관직을 강등시키며, 변방의 부대로 좌천시키는 등 처벌을 내렸다. 무력으로 이 3년에 걸친 '황고'지쟁을 종식시킨다. 그후 주후총은 대례를 고쳐서 명효종을 황백고(皇伯考)라고 하고, 생부 흥헌왕을 황고공목헌황제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족보계통을 완성한다. 이 사건을 역사는 '대예의'라 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보기에 정말 무의미한 짓이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당파지쟁이 숨어 있다. 그러나 당파들은 이것을 상대방을 타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를 보면 당시에는 중대한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명세종이 정치권모술수의 고수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파를 이용하여 다른 일파를 제압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모조리 제거한다. 자신은 궁궐 속에 숨어서 장생불로의 황로지술을 연구한다. 그리고 장총, 엄숭을 통하여 정치를 통제한다. 장총, 엄숭의 꼬리가 길어지자, 하언, 서개등을 통하여 장총, 엄숭을 타도한다. 그의 신하들을 거느리는 능력은 이후의 명신종이 따르지 못할 정도이다.

 

대예의 논쟁은 명나라 중후기 붕당정치의 시작이다. 이 때 같은 기의 진사들이 결당하고, 같은 고향사람들도 결당한다. 비록 많은 사대부들이 청류라고 불리웠지만, 개인이익을 위하여 명나라조정을 망친 것이다. 명나라는 이들 손에 무너진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명나라때의 사대부들은 역대 가장 세속화된 지식분자들이다. 그러나 인문이상과 세속의미가 통일되지 않았다. 지식인들의 정신사명과 현실이익이 모순되었다. 그리하여 ㅅ속권력과의 대립을 가져오게된다. 세속인들의 눈으로 볼 때, 이들 지식인들은 왕왕 성격이 괴벽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을 못읽었으며, 보는 눈은 높으나 실력은 없었고, 고집이 심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멀리하고 심지어 멸시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