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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서달(徐達)의 두 딸: 영락제 일생의 두 기녀(奇女)

by 중은우시 2010. 5. 31.

글: 상전(商傳)

 

영락제의 애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있다. 영락제의 일생에 있어서 영향이 가장 컸던 여자를 따지자면 서황후(徐皇后)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명성이 자자한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딸이다. 이 서황후는 문,무에 모두 능했다. 사서에 따르면, "어려서 정정(貞靜)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여자수재라고 불렀다" 이렇게 재주가 있는 여자이다보니 당연히 주원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래서 하루는 주원장이 서달을 찾아간다. "너와 나는 포의 시절의 친구이다" 결국 두 사람의 사이는 현재의 군신관계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물며 자고이래로, 군신이 서로 가까우면 서로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너의 장녀를 나의 넷째에게 주면 어떻겠는가?" 주원장과 서달을 어려서 같이 소를 기르던 친구이다. 나중에 함께 천하를 얻었고, 서달은 최고의 개국공신이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들의 관계는 어려서부터 함께한 친구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두 사람의 신분이 달라져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고, 하나는 비록 전공이 혁혁하지만 여전히 신하였다. 주원장이 황제인데, 스스로 찾아와서 자식의 혼사를 요청하니, 그의 말이 곧 성지이다. 신하인 서달로서야 어길 수가 없다. 물론, 그로서도 이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혼사는 이렇게 결정된다.

 

이해에 영락제 주체는 16살이었고, 서씨는 그보다 2살이 어려서 14살이었다. 서달의 딸은 장수집안의 여인이지만, 글을 읽고, 예절을 배워서 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홍무9년에 연왕비(燕王妃)에 봉해진다. 그리고 그녀는 고황후의 총애를 받는다.

 

이 서왕비의 몸 속에는 대장군 서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어쨌든 장수집안의 딸이다. 영락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서는 이경륭(李景隆)을 파견하여 북경을 공격하게 했다. 그런데, 이때 주체는 영왕 주권에게 도움을 청하러 떠난 상태였다. 북경성은 비어있었으니,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서왕비는 갑옷을 입고 나서서, 북경을 구해낸다.

 

당시 이경륭의 군대는 10만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가 북경성을 밤낮으로 공격하여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북경은 원나라의 수도로, 성벽이 높고, 호성하가 넓으면서도 깊었다. 수비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이다. 그리하여 이경륭은 군대에 북경의 9개 성문을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정남방의 여정문은 바로 지금의 정양문(속칭 전문)이다. 이 곳이 공격의 핵심이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완강히 버티면서, 서왕비에게 위급함을 고했다. 서왕비는 성안의 남자들이 모두 전투에 참가하여 더 이상 남은 남자가 없는 것을 알고는 친히 성안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성벽에 올라가서 전투를 도운다. 그녀가 성벽에 올라오자, 수비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고, 즉시 조정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사기를 눌렀다.

 

북경 서쪽의 부성문도 조정군대가 공격하는 중요대상이었다. 일부 조정군대는 한때 구능 부자의 지휘하에 성문을 돌파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경륭은 그들이 최고의 전공을 차지할 것이 두려워서 대군이 도착하면 함께 공격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체의 병사들이 밤중에 성벽에 물을 뿌려서, 성벽에 얼음이 얼어버렸다. 그리하여 다음날 전투를 개시하자 성벽을 기어오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명이 지키는 북경성이 십만명의 밤낮없는 공격을 견뎌낸다.

 

나중에 영락제가 황제에 오른 후, 서왕비도 자연스럽게 서황후가 된다. 서황후는 글도 썼다. <<여헌>>, <<여계>>를 참고하여 <<내훈>>24편을 쓰고, 고대인들의 선행과 좋은 말을 모아서, <<권선서>>를 써서 간행한다. 그녀는 46세때 병으로 사망한다. 영락제는 애통해하며 그녀에게 인효황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영락제의 생명에서 또 하나의 깊은 인상을 남긴 여자는 바로 그의 처제인 서묘금(徐妙錦)이다. 이 여인은 서달의 작은 딸이다. 서황후가 사망한 후, 영락제는 그녀를 새로운 황후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서달의 두 아들과 두 딸은 아주 재미있다. 장남 서휘조(徐輝祖)는 건문제 주윤문을 지지했고, 사남 서증수(徐增壽)는 연왕 주체를 지지했다; 큰 딸은 연왕 주체에게 시집갔고, 작은 딸은 건문제 주윤문을 지지했다. 서달의 작은 딸 서묘금은 건국영웅의 기백이 있었다. 주체는 그녀를 그리워했으나, 그녀는 주체의 반대편에 섰다. 나중에 주체가 황위를 빼앗고 그녀를 취하려고 하자, 그녀는 결연코 그에 따르지 않는다. 주체가, "네가 나에게 시집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시집가는지 보겠다."고 하자, 서묘금은 아예 머리를 깍고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주체가 남경을 공격했을 때, 서묘금은 주윤문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어디도 가지 말고, 이 황궁대전에서 주체를 기다려라. 그가 너를 어떻게 하는지 봐라." 그러나 주윤문에게는 그런 담량이 없었다.

 

영락제가 가장 총애한 권비(權妃)는 주체가 원정을 나갈 때 항상 데리고 다녔다. 이를 보면 그녀를 아주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권비가 사망했을 때, 주체는 상심하여, 그녀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여기고, 후궁을 대거 죽여버린다. 이 권비는 서묘금과 닮았다고 한다. 한왕 주고후의 말에 따르면, "권낭낭은 (주체)의 처제와 칠푼(七分) 닮았다."

 

주체는 잔혹했지만 그는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주체가 서묘금에게 정중하게 청혼했을 때, 그녀가 이를 거절하며 쓴 <<답영락제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정원의 예쁜 도화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감상하도록 하기 보다는, 산 속의 작은 풀이 되어 혼자서 피고 지겠다. 이제부터 패엽포단, 청등고불을 벗삼아, 청정한 여생을 지낼 것이다."

 

서묘금은 개성이 대단한 여인이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시집가지도 않았으니, 정말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