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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편집광(偏執狂)과 살인광(殺人狂): 주련십족(誅連十族)

by 중은우시 2012. 2. 6.

글: 향비(向飛)

 

황제가 반역죄를 저지른 자들을 죽일 때면 자주 "주련구족(誅連九族, 구족을 주살한다)"이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족"은 일반적으로 "부계4족, 모계3족, 처계2족"을 말한다. 여기서 '부계4족"이라 함은 부모, 형제, 자매, 아들; 출가한 고모와 그 아들; 출가한 자매와 외조카; 출가한 딸과 외손이다. "모계3족"이라 함은 외조부 일가; 외조모의 친정일가; 이모 및 그 아들이다, "처계2족"이라 함은 장인의 일가; 장모의 친정일가를 말한다.

 

"주련구족"은 이미 공포스럽다. 그러나, 방효유(方孝孺)역사상 유일무이한 "십족"이 주살당한 인물이다. 즉, 종친의 구족외에 그의 제자 친구들까지 추가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연루된 사람이 부지기수가 된다.

 

방효유는 도대체 무슨 죄를 범했기에, 이처럼 "십족"이 주살당하는 벌을 받았는가?

 

방효유(1357-1402), 자는 희직(希直), 절강 영해 사람이다. 명나라때의 대신이며 저명한 학자 겸 산문가이다.

 

홍무9년(1376년), 이십세의 방효유는 자신이 쓴 입신지도(立身之道)의 글 <잡계(雜誡)>를 송렴(宋濂)에게 가져가고, 송렴을 스승으로 모신다. 송렴은 오랫동안 이렇게 잘 쓴 문장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기쁘게 방효유를 제자로 거둔다.

 

전해지는 바로는, 명태조 주원장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송렴이 출석했다. 명태조는 송렴에게 <영지감로론>을 한편 쓰라고 하면서 다음 날 새벽까지 제출하라고 얘기한다. 송렴은 집으로 돌아온 후 이 일을 방효유에게 말한다. 자신은 연회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잠이 들자 다음 날 새벽이 되어야 깼다.

 

아침 조회에 참석하려고 준비하다가, 송렴은 비로소 <영지감로론>에 관한 일을 떠올렸고, 대경실색한다. 방효유는 자신만만하게 송렴에게 말한다: "스승님. 놀라실 것없습니다. 제가 이미 스승님을 대신하여 1편을 썼습니다. 스승님께서 살펴봐 주십시오." 송렴은 글을 본후 아주 만족하여 수정하지 않고 직접 명태조에게 올린다. 명태조가 읽어본 후에 글의 스타일이 송렴과 달랐다. 그래서 묻는다: "이것이 학사가 쓴 글인가?" 송렴은 할 수 없이 사실대로 고한다. "이것은 저의 제자인 방효유가 쓴 것입니다." 태조는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한다. "이 학생은 그대보다 낫구려."

 

방효유는 송렴의 문하에서 3년을 지낸다. 이는 그의 평생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홍무15년(1382년), 동각대학사 오침등의 추천으로 26세된 방효유는 남경으로 와서 명태조 주원장을 알현한다. 명태조는 그의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학문이 심후한 것을 보고 그를 얻기 힘든 인재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방효유는 인정(仁政)을 베풀고, 교화(敎化)를 중시하도록 주장하여, 주원장의 치국이념과 거리가 멀었다. 주원장은 쓸 수 없는 재주라면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황태자에게 말한다: "이 자는 재능있는 정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는 그를 쓸 때가 아니다. 그가 더 단련하여 성숙되면 장래 너를 잘 보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방효유에게 후한 하사품을 내리고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나중에 방효유는 원수집안의 모함을 받아 소송에 휘말려, 구금된 후 경성까지 끌려온다. 주원장은 사건기록에서 방효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즉시 풀어주게 한다.

 

그러나, 방효유에 있어서, 일신에 광세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쓸 곳이 없으니 유감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후 10년간 그는 고향에 은거하여, 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이론을 세우며, 청고한 생활을 보낸다. 그는 <주역고차> <송사요언> <문통>등 여러 작품을 저술한다. 그리고 많은 시가를 남긴다. 홍무25년(1392년) 다시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고, 주원장은 비로소 그에게 한중부학교수의 직을 내린다. 이는 구품의 학관이다.

 

촉헌왕 주춘은 주원자의 제11자이다. 그는 일찌기 방효유의 인품과 학식에 대하여 들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후한 예를 다하여 촉왕세자의 스승으로 모시고, 아주 존경한다. 방효유가 글읽는 집을 "정학(正學)"이라고 명명한다. 방효유는 이로 인하여 후세인들에 의하여 "정학선생"이라고 불린다.

 

홍무31년(1398년), 주원장이 붕어할 때, 아들이 일찌감치 죽다보니, 황태손 주윤문이 황위를 계승하니 바로 건문제(建文帝)이다. 건문제는 유가의 인정을 중시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상무(尙武)의 기풍응ㄹ 바꾼다. 연호를 '건문'으로 확정하여, 조부의 '홍무'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할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준비해둔 인재들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가을 칠월, 한중부교수 방효유를 불러 한림원 시강으로 삼는다." 방효유는 마침내 유학경전이 가득찬 '정학'서재에서 명나라정치의 무대로 나가게 된 것이다. 다음 해, 다시 시강학사로 승진하여 건문제의 가까운 신하가 된다.

 

<명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건문제가 글을 읽다가 의문이 있으면, 즉시 방효유를 불러서 설명하게 했다고 한다. <태조실록>등 사서를 편찬할 때도 방효유를 총재로 임명하고, 당시 조정의 조서, 격문은 대부분 방효유의 손을 거친다. 건문제는 방효유를 아주 존중하고, 군신관계는 아주 좋았다.

 

이때, 건문제는 조정의 대권을 두 명의 책벌레에게 맡긴다: 병부상서 제태(齊泰)와 태상시경 황자징(黃子澄)이 그들이다. 그들은 하루빨리 성과를 내고 싶어했다. 건문원년(1399년) 새로운 황권이 아직 공고해지기도 전에, 전체 명나라역사상 가장 위험한 도박을 시작한다: 삭번(削藩).

 

주원장의 재위기간동안, 두 번에 걸쳐 아들들을 번왕에 봉했다. 번왕은 각자 중병을 가지고 있었고, 한 지방을 다스렸다. 명나라초기에, 번왕들은 주씨왕조의 절대통치를 강화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홍무시대가 끝나면서, 이들 처럼 중병을 거느리고, 한 지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의 여러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제태, 황자징등의 의도는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왕조의 실력을 너무 높게 평가했다. 처음에 '삭번'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주왕, 대왕, 민왕, 상왕, 제왕등 번왕은 선후로 삭탈된다. "상왕은 스스로 불을 질러 자결하고, 나머지는 모두 서인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중 세력이 가장 컸던 번왕 연왕 주체를 삭번하면서 골치거리가 나타난다.

 

북경에 주둔하고 있던 연왕 주체는 "청군측(淸君側, 황제의 곁에 있는 간신을 제거한다)"의 명분을 내세우며 정난(靖難)을 표방하며, 군대를 이끌고 남경으로 남하한다.

 

정난지변에서 방휴유와 주체는 세불양립이다. 건문제의 연왕을 토벌하는 격문은 대부분 방효유의 손으로 쓰여졌다. 주체는 일찌기 두번에 걸쳐 파병(罷兵)을 미끼로 완병지계(緩兵之計)를 썼지만, 방효유가 이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건문제에게 그의 말에 미혹되지 말도록 권한다. 그리하여 주체의 계획은 계속 성공하지 못한다. 방효유는 여러번 건문제를 위하여 계책을 내놓고, 심지어 반간계를 써서 주체 부자를 이간질하기까지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전방의 전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4년에 걸친 전쟁에서 건문제와 방효유등은 점차 절망적인 지경에 처한다. 주원장은 자손후대의 영원한 태평을 위하여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많은 공신장수들을 거의 죽여버렸다. 지금 위로는 문약한 건문제가 있고, 아래로는 시서를 잘아는 방효유등이 있다. 기세등등하게 밀고오는 연왕 주체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었다.

 

주체가 출병할 때, 그가 가장 믿던 모사인 요광효(姚廣孝)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신이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주체가 묻는다: "뭔가?"

요광효가 답한다: "남방이 방효유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학문이 뛰어납니다. 성을 함락시키면 분명히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의 독서인들의 씨를 말리게 될 것입니다."

주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한다.

 

주체가 남경을 점령한 후, 방효유는 과연 항복하지 않았다. 요광효가 이전에 부탁한 것이 있으므로 주체는 그를 죽이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둔다.

사실, 주체도 방효유같이 덕망있는 자를 기용하여 천하인의 마음을 얻을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연왕의 부대가 남경을 함락시킨 후, 주체는 여러번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효유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그에게 신황제 즉위조서를 초안하도록 요구한다. 방효유는 단연코 거절한다. 주체는 다시 방효유의 제자인 요용(廖鏞), 요명(廖銘) 두 사람을 보내어 권유하게 한다. 그러나 오히려 방효유에게 욕만 얻어먹는다. 결국 주체는 사람을 보내어 방효유를 궁전으로 끌고 오게 한다. 방효유는 상복을 입고 들어간다. 그는 비통하게 울어 곡성이 대전을 울린다.

 

주체는 용상에서 내려와 그를 달래며 말한다: "방선생을 그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주공이 성왕을 보좌한 것을 본받으려고 할 뿐입니다." 여기서 성왕은 건문제를 비유하는 것이다.

"그럼 성왕은 어디 있습니까?" 방효유가 묻는다.

"그는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왜 성왕의 아들을 세우지 않습니까?"

"나라의 군왕은 나이가 있어야 한다." 주체도 말문이 어느 정도 막혔다.

여기서 "성왕의 아들"이라 함은 건문제의 두 아들을 말한다. 장남은 주문규(朱文奎)인데, 나이가 7살이었다. 성이 함락될 때 행방불명된다. 아마도 성이 불탈 때 불에 타 죽어서 시신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아들은 문규(文圭)인데 갓 2살이었다. 나중에 주체는 그를 중도 광안궁에 연금시킨다. 그를 "건서인(建庶人)"이라고 부른다. 황제가 다섯이나 바뀔 동안, 모두 55년간 연금상태로 있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담장바깥의 인간세상을 접촉해보지 못하여, 명영종이 복벽한 후 그를 석방하였을 때, 그는 백치와 같았다. 돼지와 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방효유가 반문한다: '그럼 왜 성왕의 동생을 세우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주체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우리 집안 일이다'

 

곧이어 그는 주위에 명하여 필묵을 대령하게 한다. 그리고, "천하에 조서를 내리는 것은 선생이 쓰지 않으면 안된다."

방효유는 붓을 받아들고는 "연적찬위(燕賊纂位)"라는 몇 글자를 크게 쓴다. 그리고 붓을 땅바닥에 던져버린다. 그리고 곡을 하며 욕을 했다: "죽으면 죽었지, 조서는 절대로 쓸 수가 없다."

주체는 얼굴색이 변한다. 그리고 겁을 준다: "너는 구족이 멸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십족을 죽이면 또 어떤가?"

"좋다" 주체는 무섭게 말한다. "내가 너의 십족을 멸하겠다."

그리하여, 주체는 방효유를 계속 감옥에 가둬놓게 하고, 그의 친척가족등을 체포하게 하고, 그의 제자들도 체포하게 한다. 이들 십족을 남경으로 압송해온다.

 

그해 육월 이십오일, 즉 주체가 황제에 오른지 8일째 되는 날, 남경의 취보문에서 방효유의 앞에서, 주체는 '십족'을 하나하나 죽여버린다. 한명을 죽일 때마다 방효유에게 묻는다.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고. 방효유는 그의 동생 방효우가 자신때문에 연루되어 목이 베어지게 되자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방효유는 형제 3명이 있었고, 서로간의 우애가 아주 좋았다. 형인 방효문은 일찌감치 방효유가 한중부에 임직할 때 이미 병사했다. 방효유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비통해 했다. 이제 동생마저 겁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방효유의 내심의 아픔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의 동생 효우는 그러나 그를 전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죽기 전에 형을 위로하며, 시를 지었다:

 

아형하필루산산(阿兄何必淚潸潸), 취의성인재차간(取義成仁在此間)

화표주두천재후(華表柱頭千載後), 여혼의구도가산(旅魂依舊到家山)

 

방효유의 십족을 주살하여죽은 자가 873명에 이르고, 처형은 7일만에 끝난다.

마지막에 방효유를 죽일 때, 방효유는 욕설을 마구 해댔다. 주체는 먼저 사람을 시켜 방효유의 입을 두 귀까지 찢게 하고, 혀를 자르게 했다. 그 후에 능지의 형을 시행한다.

죽기 전에 나이 겨우 46살인 방효유는 기우헌앙하게 <절명사>를 한 수 짓는다:

 

천강난리혜숙지기유(天降亂離兮孰知其由)?

간신득계혜모국용유(奸臣得計兮謀國用猶)!

충신발분혜혈루교류(忠臣發憤兮血淚交流)!

이차순국혜억우하구(以此殉國兮抑又何求)?

오호애지혜서불아우(嗚呼哀哉兮庶不我尤)!

 

청나라초기의 사학가인 곡응태(谷應泰)는 이렇게 탄식했다: "슬프다. 포악한 진나라의 법도, 죄는 삼족까지만 미쳤다; 강경한 한나라의 법률도 오종을 넘지 않았다...세상에서 이르기를 하늘의 도리는 돌아오고, 사람의 목숨을 가장 무겁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씨를 말릴 수가 있단 말인가?"

 

명나라이래로, 사람들은 모두 방효유가 일개서생으로 충정불굴(忠貞不屈)하여 잔혹한 도살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담담히 죽었으니, 독서인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첫째, 방효유는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방효유는 사생취의(舍生取義)하여 천고에 영명(英名)을 남겼다. 만일 그가 조서를 써주었더라면, 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을 것인가? 방효유가 명성조(주체)를 위하여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절개를 잃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족이나 적국에 투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봉사하는 대상의 성씨도 바뀌지 않았다. 명성조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그들의 '집안일'인 것이다.

위징은 당태종 이세민이 정권을 빼앗기 전에, 태자 이건성을 보좌했었다. 즉 당태종의 적수편이었다. 이건성이 피살되고, 이세민이 즉위한 후, 그는 이세민을 위하여 계책을 내고, '정관지치'에 중요한 공헌을 세운다. 이렇게 하여 그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명재상이 된다. 그가 죽은 후, 이세민은 아주 슬퍼하며 말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 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다. 옛일을 거울로 삼으면 흥망교체를 알 수 있다.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위징이 갔으니 거울 하나를 잃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청렴한 관리도 집안 일은 처리하기 어렵다고. 방효유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위징처럼 새로운 주공을 보좌하여 불세의 공을 세울 수도 있었다. 당나라이후 누가 위징을 비웃는가? 아무도 비웃지 않는다. 오히러 찬미하는 말이 적지 않다. 주씨의 집안일 때문에 목숨을 바치다니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둘째, 방효유는 어떻게 죽어야 했는가?

 

그렇다. 민족은 정신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라면 시비관이 있어야 하고, 기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견지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초개처럼 여기는 사나이를 찬미한다. 그리고 민족이 위난에 처했을 때 떨쳐 일어나서 국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민족영웅을 찬미한다. 방효유선생이 '충신불사이군'의 유가정통관념을 선택했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존경을 받을 만하다.

사서를 뒤져보면, 신앙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위진시대의 혜강은 사마집단의 담담하게 죽으며 광릉절향(廣陵絶嚮)을 남긴다. 무술육군자중 담사동은 옥중에서 벽에 이렇게 쓴다: "아자횡도향천소(我自橫刀向天笑), 거류간담양곤륜(去留肝膽兩崑崙)" 모두 비장하며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금천문이 부서졌을 때, 방효유선생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항(降), 도(逃), 사(死).

 

"항"은 방선생이 생각도 않는 것이다.

"도"는 진퇴자여의 선택이다. 청산이 남아있는데, 땔감을 걱정하겠는가? 주공인 건문제조차 도망을 갔는데, 왜 도망가지 않아야 하는가? 도망가면, 요광효에게 약속한대로 주체는 끝까지 추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세가 불리하면, 심산에 은거하고, 띠집을 짓고 살면서 경전을 읽고 제자를 기르며 살아갈 수도 있다. 목마르면 산속의 샘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야채를 뜯어서 먹으면 된다. 시기가 좋아지면, 다시 팔을 떨치고 일어나면 되고, 아마 사방에서 호응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기구한 운명의 '건서인'을 위하여 천하를 얻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도망치는 것이 지혜있는 사람이 당시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방선생은 지혜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선생은 마음 속에 '충성'을 품고 있었지, '지혜'를 품고 있지는 않았다. 이것은 방선생의 비극을 낳는다.

 

방선생이 "사(죽음)'을 선택했다면 자신이 순국하기로 하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방선생이 죽은 방식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방선생은 문을 걸어잠그고 나가지 않으며, 예를 올리고 향을 사른 후, 자기 집에서 자결할 수 있었다. 방선생은 청의소복을 입고 하늘을 향하여 앙천장소하며,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다. 방선생은 심지어 관복과 관모를 쓰고 금란보전에 나타나서,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선포한 후, 계단 혹은 기둥에 머리를 박아서 자살할 수도 있었다. 주체는 이미 방효유가 '성이 함락될 때 분명히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의 준비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런 몇 가지 자살방식을 의외라고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고, 화를 크게 낼 일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삼족을 멸하거나' '구족을 멸하거나' 심지어 '십족을 멸하는'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방선생은 죽을 곳에서 죽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주체는 선비들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조정의 문무대신을 위무하기 위하여, 방효유의 명망을 이용하기 위하여 그의 죽음에 대하여 아쉬워하고 탄식해주며 정표(旌表)를 세워주고 그의 가족들이 받아야할 위무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사한 사례는 왕조교쳬과정에서 수도 없이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방선생은 명성과 절개를 보전하고, 자손들도 그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셋째, 방효유는 왜 이렇게 죽는 방법을 선택했는가?

 

엄격하게 말해서, 방선생이 죽는 방법은 자신이 설계한 것이다. 그는 장렬한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명성과 절개를 높이고자 했다. 대전에 오를 때 상복을 입고, 대성통곡을 했고, 문답에서 서로 날카롭게 대치하고, 핍박했다. 그리고 연적찬위라는 글을 크게 쓴다. 그리고 붓을 땅바닥에 던진다. 주체로 하여금 부득이 선비들을 우대한다는 위장을 벗고, 핏발울이 떨어지는 칼을 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당시 대노한 주체는 '구족을 멸망시킨다'는 말로 협상했을 때, 방효유는 '십족을 멸하면 또 어떠냐'고 말한다.

방선생은 이미 자신이 주군을 위하여 죽을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873명의 무고한 생명까지 거둬갔는가?

명나라의 전사승은 <황명표충기>에서 방효유를 이렇게 질책했다: "효유의 십족이 주살된 것은 격(激)한 것이다, 격하면 할수록 더욱 죽인다. 죽이면 죽일수록 더욱 격해진다. 혀를 끊고 뼈를 부수었다" 여기의 '격(激)'은 방효유의 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가 노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한 것이고, 그가 죽이지 않을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그가 더 많이 죽이지 않을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더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주체의 죄악을 더욱 더 드러낼 수 있고, 더욱더 자신의 절개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일막이 피비린내나게 연출된 것이다; 하나는 무한히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살인광이고, 하나는 무한히 자신의 명성과 절개를 끌어올리고자 하는 편집광이다. 양강이 서로 부닥쳤으니 소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죽이고, 죽이고, 죽인다. 그저 하늘과 땅이 어두워지도록 죽이고, 피가 흘러 강을 이룬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친척, 친구, 제자들이다,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 머리를 꼿꼿이 들고 가슴을 쭉 편 사람도 있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떠는 사람도 있다. 부녀영아들도 있다...방선생의 앞으로 끌려와 하나하나 죽을 때는 피비린내나는 시신이 낮은 산처럼 방선생의 앞에 쌓였다. 그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색도 바뀌지 않았고, 심장도 뛰지 않았다.

 

하나는 감히 죽일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는 참을 수 있는 사람이다.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미친듯한 현상을 해석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둘은 모두 미치광이이다. '정신적인 변태이고, 심리적인 미치광이이다' 방효유는 이학의 해독이 너무 깊다보니 인성을 잃어버렸다.

방선생의 명성과 절개는 이루었다. 그러나 873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세운 명성과 절개는 너무나 많은 핏자국이 묻어있다.

오호, 애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