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북경청년보
당나라때 장안(長安)에서부터 북송의 개봉(開封)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대도시는 방시제(坊市制)에서 가시제(街市制)로 바뀌었다. 이 배후에는 관청이 금가와 백성의 침가가 있다. 즉 관과 민의 도시공간쟁탈전이 하나하나 벌어진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관청의 도시에 대한 관리가 점점 느슨해졌다.
금가와 침가는 당나라이래 관청과 백성간의 대도시공간을 놓고 벌이는 쟁탈전이 반복하여 벌어지는 중요한 내용이 된다.
당나라의 장안성은 중국고대도시의 방시제의 모범이자 최고봉이다. 궁성(宮城)은 황제가 기거하고 사무를 보는 장소이다. 황성(皇城)은 중앙각급 관청이 집중된 지역이다. 외곽성(外郭城)은 주로 주민거주지역, 상업지역 및 사찰등의 건축지구이다. 외곽성의 주간(主幹) 가도(街道)는 남북으로 11개, 동서로 14개가 있었다. 가장 넓은 것은 남북방향으로 건설된 중앙의 어가(御街)인 주작대가(朱雀大街)이다. 너비가 155미터에 이른다; 가장 좁은 것은 순성가(順城街)로 약 20미터에 이른다. 외곽성의 각 성문과 통하는 가도는 너비가 50미터 이상이었다. 외곽성은 100여개의 방구(坊區)와 3개의 시구(市區)로 나뉘어 있었다. 방에는 방장(坊墻, 방의 담장)이 있고, 시에는 시장(市墻, 시의 담장)이 있었다. 출입하는 곳은 각각 방문과 시문이 있었다. 관청, 사묘와 삼품이상 관리의 주택을 제외하고 방내의 주택은 일률적으로 도로쪽에 문을 낼 수가 없다. 상업활동은 반드시 정해진 시장에서 행해져야 한다.
매일 저녁이면, 북소리가 울린 후, 성문, 방문, 시문은 규정에 의하여 닫힌다. 전체 성은 야간통행금지(宵禁)를 실시한다. 관청의 특수한 증명이 없으면 길거리를 다닐 수 없다. 위반한 자는 체포되고 처벌받는다. 가도에는 아무렇게나 건물등을 세울 수가 없다. 매전 황제가 출행할 때면 의장을 성대하게 갖추고 연도는 사람을 다니지 못하게 한다. 지나가는 기정, 시루는 모두 커튼을 내려 막아야 한다. 더더구나 보통백성이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장안성은 비교적 크기 때문에, 주민의 생활공간과 상품의 교역활동은 모두 극히 불편했다. 당나라중엽이 되어, 도시인구가 팽창하고 상업이 번성하자, 각종 '침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떤 주민은 도로로 문을 낼 수 없는 규정을 위반하여, 주택의 대문을 도로쪽으로 내기도 한다. 어떤 주민은 벽에 구멍을 뚫어, 건물을 가도까지 확장하기도 한다. 어떤 주민과 장군은 원래 경위부대가 길거리에서 법집행을 하기 위한 건물을 점용하고, 대거 개조, 확장하기도 했다. 가도에서 소상인 잡상인들이 날로 활발하게 장사를 하기 시작한다. 호떡을 파는 사람, 생선을 파는 사람이 나타난다. 더욱 심한 경우는 아침 북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방문을 미리 열어버리고, 저녁 북이 이미 울렸는데도 방문, 시문을 여전히 닫지 않고, 길거리에 행인들이 오가면서 시끌벅적하기도 했다. 또 어떤 주민은 금령을 무시하고, 도로에서 흙을 파가기도 한다.
당시 가도관리와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관리는 주로 좌우가사(左右街使)와 어사대(御史臺)이다. 관련관리가 여러번 상소를 올려 상황을 보고했고, 여러가지 조치가 취해졌으며, 여러번 철거명령이 내리기도 하고, 사사로이 지은 건물을 강제로 철거하기도 하고, 관련된 관리를 처벌하기도 하고, 법을 어겨 도로로 난 문은 막아버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람이 부족하다보니, 모조리 금지하기는 어려웠다. 경성이외의 대도시의 침가현상은 더욱 심각했다. 예를 들어, 양주(揚州)의 경우, 수륙교통요지에 위치애 있어서 각지의 공상업자들이 이 곳에 운집했다. 가도를 침범하여 건물을 짓는 것이 아주 보편적이었다. 그리하여 도로는 좁고 붐벼서 수레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금가와 침가의 다툼 과정에서, 북송의 개봉은 방시제에서 가시제로 바뀌게 된다. 금가의 법령은 이미 상당히 느슨해졌다.
<청명상하도>는 북송시대 동경(개봉)을 묘사한 화권이며, 생동감있게 폐쇄적인 방시가 개방적인 가시로 변화한 후, 제국수도의 번화함과 생기발랄함을 드러내준다. 화면으로 보자면, 길쪽으로 문을 낼 수 없다는 금지령은 이미 폐지되었다. 가도의 양측에 점포가 줄을 이었다. 더 이상 고정된 시장이 아니었다. 길거리, 다리 위, 골목 안에서 모두 장사를 하고 거래를 했다. 가고(街鼓)제도와 소금(宵禁)제도도 모두 폐지된다. 야시(夜市), 조시(早市)가 나타나고, 상품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특히 식품의 종류가 아주 많았다. 젊은 남녀가 길거리를 따라서 걸어가면서 먹고,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먹어도, 같은 것을 다시 먹지 않았다. 야시가 끝나면 조시가 열린다. 북송개봉부에서 이십여년을 생활한 맹원로가 쓴 <동경몽화록>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 널찍하고 양이 많은 것이 천하에 다시 없다. 사람들이 많아서 십수만을 더해도 많아보이지 않고, 빼도 적어보이지 않는다. 소위 화진주지(花陣酒地), 향산낙해(香山樂海)이다. 그리고 유방소항(幽坊小巷), 연관가루(燕館歌樓)가 만을 헤아린다."
가도의 관리가 느슨해 진 후, 침가현상은 날로 심화된다. 당나라의 장안에서의 넓은 가도와 비교하자면, 북송 개봉이 가도는 훨씬 좁았다. 규정에 따르면, 주요가도는 개략 30미터 너비가 되어야 한다. 도로의 양쪽에는 배수구와 녹화수림이 있어야 한다. 가도의 양쪽에는 점포가 줄줄이 늘어서 있고, 손님을 맞이하고 상업경영을 해야하기 때문에, 자주 경영범위가 도로중간까지 나오게 된다. 게다가 시민, 여행객이 많아서, 도로는 엄청나게 붐볐다. 황제가 나와도 더 이상 금가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전의 위엄은 상실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위로는 시종백사관속에서 아래로는 잡역부까지 모두 '길에 섞여서 지나갔다" "선비와 평민들 중 구경하는 자들은 행열을 뒤따라 갔고, 좁은 길을 달려가고, 서로 소리쳐도 이를 막지 않았다."
"침가"가 날로 심각해지면서 도시의 관리와 주민의 생활은 많은 문제가 나타난다. 첫째는 교통이 막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출행이 아주 불편하게 된다. 둘째는 길가의 점포가 도로를 침범하고, 배수구를 침범하고, 녹화지대를 침범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하여 도시생태환경이 악화된다. 셋째는 위법건축물이 대부분 목조로 되어 있어 쉽게 화재가 일어났다. 개봉성은 여러번 큰 불이 일어났고, 도로변의 점포는 모조리 잿더미로 변하여 손실이 참혹한 경우가 있었다. 넷째로 침가의 위법건축물은 관리가 쉽지 않다. 사람이 혼잡하여 치안사건이 증가했다.
날로 심화되는 '침가'현상에 대하여 북송조정은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처분하는 방법을 취한다. 먼저 황제의 출행의장대가 수행인원을 감소시키고, 규모를 축소시켰다; 다음으로, 위법건축물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백성의 기본생활과 관련되면 강제로 철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귀족, 관리, 상인의 불법침가행위는 강체절거하거나, 상인들의 증가된 상업이윤에 과세를 했다.
도시가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하여, '침가'현상은 금지시켜도 없어지지 않았다. 거리를 관리하는 관료들과 노점상들간의 다툼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중국대도시가 직면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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