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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역사상 아들의 처를 빼앗은 제왕은?

by 중은우시 2012. 1. 8.

글: 사지동(謝志東)

 

아들의 처를 빼앗은 제왕이라고 하면, 아마 바로 당현종 이융기(李隆基)를 떠올릴 것이다. 양귀비(楊貴妃)는 원래 그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였다. 나중에 백거이(白居易) 선생은 <장한가(長恨歌)>를 써서 이 일을 심금을 울리는 사랑의 이야기로 만들었고, 심지어 그들을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라고 까지 읊었지만, 본질적으로 난륜이라는 것을 덮을 수는 없었다.

 

사실, 아들의 처를 빼앗은 일은 당현종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일찌기 선례가 있었다. 춘추시대의 초평왕(楚平王) 기질(棄疾)은 아들의 처를 빼앗은 적이 있다. 기질은 젊어서 예법을 무시했다. 그가 국왕이 되기 전에, 일찌기 초나라의 속국인 채(蔡)나라에서 대부를 지낸 바 있다. 그는 채나라의 한 여자와 관계를 가져 결혼하기도 전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기질이 초나라 왕위에 오른 후, 그 채나라의 여자를 초나라로 불러온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앉힌다. 그가 바로 태자건(太子建)이다. 태자건이 15살이 되었을 때, 초평왕은 아들을 위하여 진(秦)나라 국왕의 여동생인 맹영(孟赢)을 처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태자소사(太子少師) 비무극(費無極)을 진나라로 보내어 맞이하게 한다. 비무극이 진나라에 도착한 후, 맹영이 뛰어난 미녀라는 것을 발견한다. 비무극은 초나라로 한번 돌아왔을 때, 이 소식을 초평왕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초평왕에게 맹영을 초평왕이 가지도록 건의한다. 초평왕은 이 후안무치한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비무극은 진나라의 호송인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초나라의 풍속에 따르면, 신부는 먼저 황궁으로 가서 시아버지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정식 혼례를 치를 수 있다고. 맹영은 이렇게 하여 왕궁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초평왕의 낭중지물이 된다. 그후 초평왕은 맹영을 따라온 시녀를 맹영이라고 하며 아들 태자건에게 시집보낸다. 1년후, 맹영이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제서야 이 스캔들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초평왕이 아들의 처를 빼앗아간 첫번째 제왕은 아니다. 그보다 200년전에 위선공(衛宣公)이야말로 중국에서 처음으로 아들의 처를 빼앗은 사람이다. 위선공은 젊어서 아주 음란했다. 그는 부친의 작은마누라인 이강(夷姜)과 사통했고, 그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는다. 아들의 이름은 위급자(衛急子)이다. 위급자는 난륜으로 낳은 자식이므로, 어렸을 때 민간에 맡겨서 기르게 된다. 위선공이 국왕에 오른 후에, 이강과의 애매한 관계가 드러나게 되고, 위급자는 태자에 오른다. 위급자가 16살이 되었을 때, 위선공은 그에게 제(齊)나라 국왕 제희공(齊僖公)의 장녀인 선강(宣姜)을 처로 맞이하게 하려 한다. 그는 사람을 제나라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는데, 사신이 돌아와서는 선강이 경국지색이라고 말한다. 위선공은 그 말을 듣고는 마음이 움직여서 사람을 시켜 기하의 가에 호화로운 궁전을 짓게 한다. 그리고 이름을 신대(新臺)라고 부른다. 그후 위급자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위급자가 떠나자, 위선공은 사람을 보내어 제나라에서 선강을 데려온다. 선강을 직접 신대로 맞이해서, 비(妃)로 삼는다. 위급자가 송나라에서 도라오자, 위선공은 위급자에게 서모의 예로 선강에게 대하도록 한다.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었으므로 위급자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따를 수밖에는.

 

이들 제왕은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의 눈에 아버지가 아들의 처를 빼앗는 행위는 시종 우스개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