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와 서역(西域)의 관계

by 중은우시 2012. 2. 1.

작자: 미상

 

 

종객파

 

토번(吐蕃)과 중국은 오래된 적수이고, 교분이 오래된 친구이기도 하다. 당왕조가 멸망한 후, 토번도 내란에 빠진다. 이때부터 쌍방간의 교류는 적어진다. 남송시기에, 징기스칸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토번은 부득이 복종하여, 원나라의 종주국지위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자주 몽골의 귀족들에게 불법을 강의하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후, 토번의 세력은 갈수록 커진다. 정치적으로, 토번의 실권을 사원의 귀족들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원나라도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가 없었다. 사상적으로, 머리가 비어있던 몽골인들은 부득이 토번라마의 교육을 받아들였다. 갈마파(噶瑪派)는 원나라조정에서 거대한 세력을 지녔다. 살가파(薩迦派)는 협상을 통하여 자신들의 토번13개성의 제사(帝師) 지위를 확보한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들의 사적(死敵)인 지공파(止貢派)를 격패시킨다.

 

1332년, 토번에 내란이 일어난다. 승려들은 각각 관병을 이끌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서로 죽고 죽인다. 몽골의 원나라는 날로 쇠약해져,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눈을 감는다. 전쟁후, 야루(雅魯) 영주 강곡견찬(絳曲堅贊)이 토번을 지배한다. 원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제사(帝師)로 임명한다. 이 야심만만한 인물은 송찬간포(松贊干布)의 기업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질병이 나타난다 - 내부투쟁. 교단간에 수시로 무장충돌이 발생한다.

 

1370년, 명나라의 장군 등유(鄧兪)가 멀리 감숙을 정벌한다. 그리고 하주(河州)까지 간다. 곧이어 얼음과 눈이 가득한 설역(雪域)으로 가서 토번과 오사장(烏斯藏)을 복종시킨다. 1377년, 등유는 다시 정벌길에 오른다. 목영(沐英)과 삼로의 대군을 이끌고 곤륜산에서 전투를 벌인다. 오랜만에 토번인들과 한바탕 전투를 벌인 것이다. 푸른 청해호의 가에서 한 토번의 추장은 수천의 남자병사를 잃고, 십여만마리의 가축은 명군의 전리품이 된다. 승리후, 주원장은 등유에게 남경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돌아가는 길에, 등유 장군은 불행히 사망하니, 나이 겨우 40살이었다. 그때는 추운 납월이었다.

 

그후, 명나라와 토번의 관계는 완화된다. 주원장은 사절 종륵(宗泐)을 멀리 고원까지 파견하여 중국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된 불교전적을 찾게 한다. 이를 통하여 토번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쌍방의 갈등은 상호방문으로 철저히 개선되지는 못했다. 토번은 접시 위의 모래알과 같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익이 다른 유파들이 계속 말썽을 부렸다. 명왕조의 우호적인 제스처는 그저 일방적인 바램이었다. 주원장은 더 참을 수 없게 되자, 전쟁으로 토번의 소동을 진압하고자 결정한다.

 

1378년, 조주(洮州)십팔족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목영은 다시 갑옷을 입고, 토번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선다. 진,예,경,로의 사병들은 용감히 앞장섰고, 토문협에서의 첫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감숙의 조주에서 중국군대는 전승을 거둔다. 조주십팔족의 우두머리는 모두 패배한다. 명군은 적군 3만명을 획득하고, 소양 20만마리를 획득한다. 전적이 휘황하다고 할 만하다. 대명제국은 이로써 영토를 천리나 확장하였다. 주원장은 조주위를 설치하고, "조주는 서번의 문호이다. 지금 성을 쌓아서 병사를 보내 지키는 것은 그 인후를 막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목영은 싸움에 재미를 붙여서, 해를 지나 다시 황하를 건넌다. 하란산에서 북원(北元)을 사로에서 포위합공하여 국공(國公) 탈화적(脫火赤)을 생포한다. 얼마후 대장 이문충(李文忠)이 명을 받아 조주위를 인계받는다. 그는 현지의 두목 남수절(南守節)에게 대거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명령하고, 조주위를 확장건설한다. 그리고 많은 군인가족들을 불러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이들을 고정된 주민으로 삼으려 했다. 이문충의 수하사병들은 병사이면서 농민이었다. 근면하게 농사를 지을 뿐아니라, 훈련도 엄격했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부변방에 명성을 떨친다. 토번인들은 점차 의식하게 된다. 이런 중국인들은 당나라사병들보다 더욱 용맹하고 전투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도검을 느슨하게 한다.

 

고원에 살고 있는 토번인들을 대함에 있어서 전쟁이 방법은 아니다. 명왕조는 이들을 통제할 정책을 정교하게 구상한다. 먼저 우의를 건립한다: 주원장은 계속 사람을 서장의 동남쪽에 있는 갈마파의 대주지에게 보내어 연락한다: "원나라에서 관직을 받았던 자는 대명제국에서도 일률적으로 관직을 주겠다" 유필다길(乳必多吉) 4세 활불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사신을 파견하여 남경으로 보내어 황제를 알현하게 한다.

 

명나라는 토번에 대하여 아주 교묘하게 통치했다. 청장고원에서, '제사'는 정치,문화적인 영향력이 컸다. 이 봉호는 원래 몽골인들이 책봉한 것인데, 명왕조가 이 칭호를 단속한 후, 서장의 정채핵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몽골인은 두뇌가 없었다. 항상 어떤 세력을 도와주어 토번을 관리했다. 그러나, 누구를 도와주든간에 항상 하나의 강대한 세력이 자신들에 대항했다. 명나라는 여러 명을 책봉한다. 동쪽에 있는 종교지도자에게 봉호를 주고, 서쪽에 있는 지방세력에게는 관직을 높여주었다. 광활한 고원에서 도처에 명나라가 심어놓은 세력이 생긴 것이다. 그들은 서로간에 잘 지내고, 직접 조정의 지휘를 받았다. 누구도 너무 강해해질 수는 없었다. 그들 각자의 세력범위는 속속 대명제국의 부속국이 되었다. 일찌기 홍무초기, 주원장은 원래 원나라에 충성하던 서장의 수뇌를 자신의 속하로 받아들인다; 토번선위사 하쇄남보(何鎖南普)를 하주위지휘로 임명한다. 공가견장복은 원지묘각홍교대국사가 된다. 원섭제사 남가파장복은 치성불보국사로 봉한다. 답력마팔랄은 관정국사로 봉한다...홍무6년-7년, 주원장은 더욱 대거 관직을 내린다. 토번측도 아주 기뻐한다. 속속 칭호를 요청한다. 중국의 관직으로 안되면, 원나라의 것을 썼다. 그러자 모두 결심을 표한다: "관직에 있는 자는 조정의 법을 따르고 한 지방을 안정시키고, 승려가 된 자는 사람들을 교화하여 백성들을 선하게 만든다." 어쨌든 쌍방이 모두 기뻐하게 되었다.

 

명성조때, 분봉제가 약간 개혁된다. 그는 사람을 보내면서 비단, 차엽을 가지고 봉파죽(封帕竹)의 찰파견찬(札巴堅贊)을 보러 간다. 수인(綏印)에는 여전히 "준정국사천화왕(準頂國師闡化王)"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활불의 계승자 합립마(哈立麻)와 명나라의 접촉은 더욱 밀접해진다. 이 사람은 한 가지 큰 특징이 있다. 바로 법술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1403년, 명성조가 등극한다. 그는 즉시 인고고승 반지달(班地達)의 제자인 지광(智光)으로 하여금 사절단을 이끌고 토번으로 가게 한다. 그는 합리마에게 남경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한다. 합리마는 그저 사절단만 보낸다. 나중에 더 이상 사양하기 어렵게 되자, 1407년에 친히 간다. 사람이 도착하자 즉시 융중하고 열정적인 환영을 받는다. 20여일의 시간동안, 합리마는 감로를 살포하고, 웅사를 호환하고, 여러가지 현묘한 법술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망한 주원장 부부를 위하여 종교의식을 거행한다. 수도를 떠나 산서로 가기 전에, 명성조는 그에게 관직을 주어 존경을 표시한다. 그후, 합립마는 다시 명나라와 세번에 걸쳐 예물을 교환한다.

 

합립마가 사망한 후, 통와돈단(通哇頓丹)이 즉위한다. 그도 여전히 명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이 두뇌가 영민한 인물은 이미 명성조가 토번을 합병할 뜻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경고하여 말한다. 토번을 칠 생각은 하지 말라. 그러나, 우호교류의 갑문은 이미 열렸다.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었다. 갈마파의 각 우두머리들이 공개적으로 분열된 것은 명성조의 야심을 더욱 부추겼고, 쌍방의 왕래는 더욱 빈번해진다. 1413년, 살가파의 우두머리는 요청에 응하여 북경으로 간다. 같은 해 격로파(格魯派)의 창시자인 종객파(宗喀巴)는 제자 석가야실을 남경으로 보내어 융중한 예우를 받는다. 명성조는 오늘은 이쪽을 초대하고, 내일은 저쪽을 초대했다. 그러면서 세속통치자인 파목주파왕(帕木主巴王)만은 인정하지도 않고 상대하지도 않는다. 중국에 의존하여 세력을 유지하려는 두령들이 제기하는 귀순요구는 모두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토번에 대한 합병은 점차 현실이 되어 간다.

 

명나라는 널리 경제적 수단도 활용했고, 토번과의 무역을 발전시킨다. 이들 소프트병기의 공격으로 강인한 토번도 결국 신복(臣服)한다. 쌍방의 관계를 추가로 강화하기 위하여, 명나라는 다시 사절을 파견하여 고승 곤택사파(昆澤思巴)를 입경하도록 요청한다. 고승이 입경하자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장을 하사하고, 대승법왕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그후 대인(大印)을 받은 토번승려는 더욱 많아진다. 살가파의 도각(都却) 방장은 사달장보교왕에 봉해진다. 삭가야실은 서천불자대국사, 지선대자법왕이라는 호칭을 얻는다. 일시에 토번에는 봉호를 받는 열풍이 분다. 크고 작은 승려들이 속속 달려와서 칭호를 요청한다. 명성조는 기꺼이 그렇게 한다. 오는 사람은 막지 않았다. 국사, 선사, 법왕, 대국사...를 하나하나 그들에게 수여한다.

 

대인을 그냥 줄 수는 없었다. 토번 쪽에서도 당연히 예물을 주어야 했다. 조공의 명의는 가지각색이다. 3년에 1번씩 하는 정례조공에서 칭호세습자는 세습공, 그리고 사은, 경하의 조공도 있다. 고원에서 오는 사절단의 규모는 방대했다. 성화21년, 대보법왕등은 1479명을 파견한다. 다시 홍치12년에 오사장등이 파견한 사절단은 2800여명에 달하기도 했다. 대명제국은 병사를 보내어 주둔시킬 필요도 없고, 무력간섭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청장고원을 손에 넣은 것이다.

 

중아시아 일대도 중국이 주목하는 대상이다. 이기에는 중요한 상업로가 있다. 타림분지의 오아시스에 있는 성이 있다. 그러나 몽골인의 세력도 있었다. 원나라가 붕괴된 후, 하미, 투루판의 일부 고위층은 자신의 세력을 건립하고 싶어했다. 명나라는 간섭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장려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만일 중국이 한, 당과 같이 병력을 출동시켜 토벌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다. 만일 그들과 우호관계를 건립하면 이들이 오히려 준가르의 와랄(瓦剌)인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주원장이 1393년에 하미를 두번 친 적이 있지만, 쌍방은 여전히 우호적인 길을 선택한다. 1403년, 영략제(명성조)는 하미로 사신을 보내어 자신이 황제라고 전한다. 하미인들은 즉시 달려와서 축하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전마도 가져 온다. 영락제는 자연히 기뻣고, 하미에 위(衛)를 설치할 수 있는지 타진한다. 사신은 좋다고 대답한다. 그 결과 중국의 세력은 또 다시 한 걸음 더 확장된다. 그후, 하미인들은 거의 매년 영락제를 만나러 오고, 예물을 교환한다. 어떤 때는 1년에 여러번을 오기도 했다. 중국도 가볍게 타림분지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상업로를 확보하게 된다. 아마도 사람은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라, 명나라는 상업을 독점하고 싶어했다. 1480년에 외국인과 개인이 무역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러나 말로는 금지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투루판도 오아시스 위의 중요한 국가이다. 지리적 위치는 더욱 중요하다. 그들은 와랄과 준가르로 진입하는 통로를 지배한다. 명나라는 그들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낸다. 상대방도 당연히 답례가 있었다. 그러나 사신은 그다지 빈번하게 파견하지 않았다. 별실팔리(別失八里)는 더욱 멀리 있지만, 아주 중요한 무역도시이다. 그들은 일지기 홍무연간에 중국과 외교상의 분쟁이 발생한 적이 있다. 중국사신을 억류하였다. 영락제가 즉위한 후, 쌍방의 우호관계를 독촉한다. 별실팔리도 이에 호응하여, 납공관계를 건립한다. 1418년, 이 곳에서 정변이 발생한다. 국왕의 당형이 왕위를 찬탈한다. 명왕조도 이 새로운 국왕을 묵인한다. "이들 통치자들은 모두 명나라의 속국이라는 상징적인 지위를 받아들이고, 중국과의 긴밀한 상업관계에서 이익을 취했다. 그들은 이런 특권을 위하여 상대보다 낮은 지위를 받아들인 것이다." 즉, 신강은 당시에 중국판도는 아니지만, 그곳의 수령은 여전히 명나라의 명목상 신하였다. 독립성이 강했을 뿐이다.

 

영락제의 노력하에, 중아시아 각국은 빈번하게 중국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낸다. 합렬, 사마르칸트가 전후로 20개의 사절단을 중국에 보낸다. 투루판은 13번을 보내고, 하미는 40여회를 보낸다. 그외에 중앙아시아의 다른 32개 국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그들의 예물은 주로 백옥, 낙타, 사자, 화반표, 그리고 각종 보마와 귀금속이 있었다. 웃기는 점은 일부는 무역을 위하여 사신을 사칭하여 왔다는 점이다. 서신도 아무렇게나 써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중국은 모르는 척한다. 어쨌든 계약을 체결하면 서로 좋은 일이다. 양쪽 모두 돈을 버는 일이다. 중국은 이런 미묘한 외교수단으로 서북통상로에서 많은 재물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