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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현종)

당현종은 왜 감진(鑒眞)의 동도일본(東渡日本)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08. 4. 28.

글: 사지동(謝志東)

 

감진은 당나라때의 고승이며, 불교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전인이다. 감진은 만년에 일본승려의 요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서 율법을 전한다. 온갖 고생을 겪고, 두 눈이 실명하면서 마침내 6번만에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성공한다. 일본에 도착하여 나중에 일본불교 율종의 개산조사가 된다. 감진의 동도일본은 일본의 불교, 건축, 조각, 의약, 문화, 음식등의 여러 방면에서 중대하면서도 심원한 영향을 남긴다. 그리하여 이는 "중일문화교류사상의 한 개의 밝은 등"이라고 칭송되고 있다.

 

그러나, 감진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당나라정부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그의 몇차례에 걸친 동도는 실제로 모두 밀항이었다. 앞선 몇번의 동도일본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당나라정부의 방해와도 관계가 있다.

 

당나라는 중국역사상 가장 강성하고 가장 개방된 시기였으며, 대외교류가 아주 빈번했다. 당나라때의 서적에 의하면, 당나라초기부터 당현종때까지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번국'이 근 400개에 달한다. 그 중간에 스스로 망하거나 죄를 지어 멸망당한 300여개를 제외하고도, 개원연간에 약 70여개국이 남아 있었다. 당나라정부는 넓은 도량으로 외국의 사신과 상인들을 맞이했다. 당시에는 대량의 외국사절이 조공을 바치러 왔을 뿐아니라, 당나라정부도 자주 관리를 번국에 파견했다. 일본은 당나라에 십여차례의 견당사를 보냈고, 당나라도 여러번 일본사절을 파견했다.

 

당나라정부의 일관된 개방정책에 따르면, 감진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율종을 전하겠다고 하는 것은 조정에서 지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감진은 시종 당나라정부의 비준을 받지 못했을까?

 

당나라의 불교사를 뒤져보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원래, 불교는 당나라에서 시기마다 대우가 크게 차이난다. 초당(618-712)에 태종과 무측천은 불교를 지지했다. 불교의 지위는 그리하여 매우 높았다. 당승 현장이 서역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당태종은 현장을 위하여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했고, 스스로, "황제보살계제자"라고 칭하며, '오로지 붉은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한다'고 맹세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현장과 불법을 논했다. 성당(712-762)시기에 당현종은 불교에 대하여 '억압하되 폐지하지는 않는(抑而不毁)' 정책을 취하였다. 과도한 발전은 견제하고, 불교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중당(762-827)의 헌종시기에 불교는 다시 흥성하고, 사상유례없는 사리영접행사를 펼치기도 한다. 그리하여 불교는 최전성기에 이른다. 그러나, 만당(827-859)에 이르러 문종과 무종시기에, 불교의 지위는 일락천장하여, 타도대상이 된다. 회창5년(845)에는 당무종의 지휘하에, 불교에 대하여 청소작업이 벌어진다. 천하의 절은 불에 타고, 승려는 속속 환속한다. 이 불교훼멸운동은 후에 "회창법난(會昌法難)"이라고 불린다.

 

감진의 동도일본은 성당인 현종시기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불교는 비록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지위는 초당시절만 못했다. 당현종은 도교를 중시하였으므로, 불교에 대하여는 억제정책을 쓴다. 개원2년(714년) 당현종은 증국 승려와 비구니의 수량을 삭감하도록 명한다. 1만2천여 승려와 비구니가 환속당하고, 새로운 사원을 증설하는 것을 금지하고, 불상을 주조하는 것도 금지하며, 불경을 필사하는 것도 금지하고, 관리와 승려비구니와의 내왕도 금지한다. 이런 정치배경하에, 당나라정부가 감진의 동도일본을 비준하지 않은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감진은 일본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몰래 밀항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감진의 앞의 몇번에 걸친 밀항이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753년 일본의 제11차 견당사가 귀국하기 전에, 견당사는 정식으로 당현종에게 감진을 초빙하여 일본에서 계율을 전하겠다고 요구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현종은 당시에 한마디로 견당사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부 도사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에 도교를 전수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불교는 외래문화이고, 도교는 당나라 본토문화이다. 당현종은 아미도 이 기회에 일본에서 도교를 흥성하게 하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 제안은 원래 과도한 것이 아닌데, 견당사는 완곡하게 거절한다. 도교를 추앙하던 당현종은 분명히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그리하여 감진을 초빙하여 일본으로 가겠다는 요구도 통과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견당사는 이것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도중에 양주를 지나면서, 몰래 이미 66세의 고령이 되고, 두 눈이 실명된 감진을 배에 태운다. 견당사가 당나라 고승의 밀항을 도운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인재에 대한 갈구이지만, 실제로는 당나라에 대한 불손이었따. 이런 방식은 지금 보더라도 외교예의에 어긋난다. 그리하여, 현재 어떤 사람들이 감진의 동도일본과 중일우호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아무래도 견강부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