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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현종)

당현종(唐玄宗)이 좋아했던 4명 여가수의 랭킹은?

by 중은우시 2009. 3. 5.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개원(開元)연간에 사회는 안정되고, 정치는 깨끗했으며, 경제는 번영해서 당나라가 태평성대에 들어섰다.그리하여 후세인들은 이 시기를 개원성세(開元盛世)라고 부른다. 이 기간동안 당현종은 강산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했으며, 미인은 더욱 사랑했다. 사람이 부유해지면 방탕해지는 법이다. 당현종 이융기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천보(天寶)연간에 이르자, 태평성대의 명성은 남았지만, 그는 향락에 탐닉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하다보니 당나라의 정국은 날로 엉망이 되어갔다. 이때의 그는 더 이상 스타군주가 아니다. 그저 미녀를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할 뿐, 강산은 돌보지 않는 엉터리황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시국의 변화도 당현종의 작곡연주가로서의 명성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그는 횡적(橫笛)을 불고, 갈고(鼓)를 두드리고, 비파를 연주하며, 음악을 작곡했는데, 그 수준은 당시 오락계의 고수들보다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구당서. 음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현종은 정사를 돌보는 사이의 짬을 내어 태상악공자제 삼백명에게 사죽(絲竹)의 놀이(戱)를 가리켰다. 음악소리가 함께 울려퍼지는데, 한 소리라도 틀리면 현종은 반드시 골라내서 바로잡아 주었다" 이로써 볼 때, 그의 음악에 대한 감상수준은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전문적이었다. 그저 요란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남자의 절반은 여자라고. 당현종이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은 후, 그는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생활영역에서 미녀지음(美女知音)과 홍안지기(紅顔知己)을 찾는다. 음악에 미쳐있던 다재다능한 황제 당현종은 노래로 여자를 골랐다. 그가 좋아하는 기준은 가무에 능하고 음률을 아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의 추구이자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으로 그의 고독한 심령을 채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당시 음악계는 사상유례없는 번성을 이루고, 궁중에 여자가수가 넘쳐났다. 그렇다면 누가 당시 당태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가수일까?

 

"가무를 잘하고, 음률에 통했던" 양귀비(楊貴妃)는 아마도 첫번째로 꼽아야할 선수일 것이다. 그녀는 당현종과 취미가 같고, 음악에 대한 조예도 상당했다. 그리하여 당현종이 그녀를 더욱 좋아했다. 백거이는 "완가만무응사죽, 진일군왕간부족(緩歌慢舞凝絲竹, 盡日君王看不足, 느린 노래 나른한 춤 여운 긴 가락 황제는 넋을 잃고 온 종일 바라보네)"라고 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당나라 엔터테인먼트계 내에서의 표현으로 보자면, 비파, 춤, 격경(擊磬)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것 외에, 그녀의 노래부르는 솜씨는 삼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료를 보면, 그녀의 세가지 뛰어난 분야에 대하여는 자세히 쓰고 있지만, 그녀의 노래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녀의 노래에 대하여 당현종이 좋다고 평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이는 확실히 그녀는 용모와 공연에 있어서 당현종이 보기에 일류였지만, 그녀의 노래부르는 것에 대하여는 당현종이 그다지 일류로 평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양귀비와 총애를 다투다가 패배한 강채평(江采萍)도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다." 특히 그녀는 춤을 추는 것과 시를 짓는데 있어서 뛰어났다. 이 두가지가 그녀의 장기였다. 그가 공연한 <<경홍무(驚鴻舞)>>는 특히 출중했다. 당현종은 일찌기 매비(梅妃, 강채평)에 대하여, "백옥피리를 불면서, 경홍무를 추니 자리에 광휘가 빛났다"고 평하였다. 그녀는 매화를 좋아해서, 당현종이 그녀에게 "매비"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가무와 용모는 양귀비에 비견할만하였지만, 풍류에 있어서 양귀비에 뒤졌다. 체중도 양귀비보다 많이 가벼웠다. 양귀비가 궁으로 들어와서 그녀를 암중 배척하자 금방 그녀는 밀려나게 된다. 그녀는 다른 여인에게 밀려난 여인이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여인이다. 하물며 그녀의 노래는 그다지 당현종으로부터 평가를 받지도 못했다. 당연히 그녀는 당나라 여가수의 왕관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

 

이제, 부득이 당현종시대에 가수계의 뛰어난 진산지보 염노(念奴)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대의 왕인유(王仁裕)는 <<개원천보유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염노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자색이 뛰어나고, 노래를 잘 불렀다. 하루도 황제의 곁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 매번 판(板)을 들고 자리를 잡고 곁눈질을 해서 뒤둘아보면, 황제는 후궁들에게 말했다: 이 여인은 요염하고 예쁘다. 눈이 사람을 홀린다. 매번 노래를 부르면 목소리는 아침안개위에서 나오고, 다른 여러 악기의 잡소리도 그녀의 목소리를 막지 못한다" 궁기(宮妓)중에서 황제가 가장 좋아했던 여인이다.

 

원진(元)의 <<연창궁사(連昌宮詞)>>에서도 이 여인을 이렇게 썼다: 비상구천가일성, 이십오랑취관축(飛上九天歌一聲 二十五郞吹管逐, 그녀의 노랫소리가 하늘로 울려퍼지면, 이십오랑이 피리를 불어 따라간다). 그리고 <<연창궁사>>의 뒤에는 특별히 주석을 달았는데: 매번 누각아래에서 술자리를 펼치면 여러 날이 지난 후 엄안지, 위황상등이 더 이상 연주할 것이 없고 모든 음악연주가 끝날 때, 당현종은 고역사를 보내어 이렇게 누각위에서 소리쳤다: 염노를 보내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십오랑을 나누어 작을 피리로 따라가게 하라. 들어보겠는가. 황제의 명을 듣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염노는 용모가 예뻤을 뿐아니라, 소프라노 가수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바로 당현종이 찾는 그런 여가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 <<개원천보유사>>에 "하루도 황제의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당현종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이지도 않았는데, 아마도 그 주요한 원인은 양귀비가 질투하여 방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탕천을 가거나 동도 낙양으로 순유할 때, 수행인원으로 그녀를 몰래 데려가서 우울할 때믄 무료한 시간을 때웠던 것같다. 하물며 당현종의 그녀에 대한 평가는 용모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보면 당현종의 마음을 끄는 첫번째 요소는 바로 잘 생겨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이 바로 노래를 잘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당현종은 염노의 용모를 더욱 좋아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당현종의 일생중 가장 높이 평가했던 여가수는 허화자(許和子)라고 할 것이다. <<개천천보유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궁기중 영신(永新)이라는 자는 노래를 잘했다. 당현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매번 황제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황제는 좌우에 말했다: "이 여인의 노래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歌直千金)" 허화자는 이름을 자화(子和)라고도 하는데, 당현종 개원12년(724년)에 영신(永新)에 사는 한 악사의 딸로 태어난다. 당나라 개원29년(741년)에 궁녀로 들어오는데, 관적인 "영신"을 예명으로 삼는다. 그녀는 당나라 가무단 의춘원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예술가였다.

 

당나라사람인 단안절(段安節)이 쓴 <<악부잡록>>을 보면 그녀를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아름답고 총명했으며, 노래를 잘했고, 변화가 있고 새로운 소리를 잘 냈다" 이를 보면 위에 적은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악부잡록>>을 그녀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하나 적고 있다: "하루는 근정루에서 보는 사람이 수천명이고 서로 얘기하며 시끄러웠다. 각양각색의 소리가 났다. 황제가 노하여 연회를 끝내려고 하자. 환관 고역사가 영신을 불러 노래를 한곡 하게 하면, 조용해질 것이라고 아뢴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영신이 나와서 머리를 쓰다듬고 소매를 들고 느릿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광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기분이 좋은 자는 기운이 났고, 우울한 자는 가슴을 찢는 듯했다"

 

시끄러운 와중에 나타나서 노래 한곡으로 장안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허화자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노래실력이다. 그녀의 음색, 성량, 음역이 모두 새로운 경지와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 역사현장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는 고수인 당현종의 인정을 받았을 뿐아니라, 평민백성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명나라때의 저명한 희극가인 탕현조는 일찌기 허화자를 위하여 시를 지어 찬미한 적이 있다: "막향남산경일곡, 천금원시영신인(莫向南山輕一曲, 千金原是永新人, 남산을 향하여 가볍게 노래를 하지 말라. 천금은 원래 영신 사람이다)" 역사는 공인하고 있다. 허화자의 노래실력은 한아(韓娥), 이연년(李延年)이래 이천년간 아무도 따라올 수 없던 실력이라는 것을. 당현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허화자가 당현종이 가장 아끼던 여가수라고 말하는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평가가 가장 높다. 당현종은 그녀에 대하여 "노래가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당현종이 당나라의 가수들을 평가한 것중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이다. 유일하다.

 

둘째, 그녀는 혁신을 했다. 그녀는 새로운 것을 만들고 옛것을 뜯어고치는데 뛰어난 재녀였다. 당현종을 도와서 여러가지 지루한 노래들을 고쳤고, 당나라의 노래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셋째는 그녀의 생활기록이 가장 단순하다. 당현종과 스캔들이 없다. 이는 그녀가 노래실력으로 천하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넷째, 고금이 공인했고, 군중들의 신뢰도도 높다.

 

만일, 당현종의 곁에 있던 네 명이 여가수들에게 랭킹을 매긴다면, 허화자가 1위이다. 염노가 2위이고, 양귀비가 3위이며, 전설상의 매비는 겨우 4위, 즉 꼴찌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게 랭킹을 매기더라도, 그녀들은 모두 당현종의 곁에 있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녀들에게는 부녀절도 없었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도 없었다. 현대여성과 같은 반열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