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수양제)

대운하의 죽음

중은우시 2012. 3. 18. 02:50

글: 홍촉(洪燭)

 

1980년대, TV다큐멘터리중에 <화설운하(話說運河)>라는 것이 있었는데, 옛날을 그리워하는 필치로 겅항대운하(京杭大運河)의 성쇠와 시말을 그렸다. 촬영팀이 대운하일선을 직접 다녀보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옛날이라면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신발이 닳아 없어지고, 노가 닳아 없어지겠는가. 분명히 촬영팀은 자동차같은 류의 현대화 교통도구를 이용하여 운하를 찍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 화면에서 휘발유냄새가 나는 듯하다. 이 오래된 항선은 광서27년(1901년)에 새로 건설된 철도에 패배하여 무너지고 만다. 혹은 그때부터 대운하는 중국역사에서 '은퇴한 노간부'가 되었다. 그저 집안에 앉아서 혼잣말을 하고, 혼자서 놀며, 더 이상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게 된 것이다.

 

그 다큐멘터리는 내가 비교적 완전하게 운하의 전설을 들은 마지막이다. 내가 목도한 것은 TV모니터에서 흐르는 운하였다. 질감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색채도 약간은 사실적이지 않았다. 해설에서는 비장한 말투를 사용했다. 마치 열사를 위한 추도문을 읽듯이. 어떻게 말하든 나는 간접적으로 운하와의 포옹을 한번 한 셈이다.

 

그때이후, 운하의 소식은 점점 드물게 들렸다. 마치 전사회가 잊어버린 듯했다. 세상사람들의 시야에서 소실된 것처럼, 물보라조차 남기지 못했다.

 

운하. 운하. 그래도 운하는 아직은 말할 거리가 있다. 사실 운하 자체는 옜날이야기를 하는 노인처럼 시작부분은 항상 이렇다. "옛날옛적에...." "옛날예적에 황제가 있었는데, 수양제라고 하지.." 이런 유형들이다.

 

동북지방의 빠오르지 위안예(鮑爾吉原野)는 아주 멋진 글을 남겼다: "조건웅(趙健雄)이 있는 공신교(拱宸橋)로 가는데, 공공버스를 한참 차야 했다. 도중에 한 강과 나란히 갔는데, 강물을 하얗고 탁하며 더러워서, 피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기동선이 오가면서 시멘트판같은 것을 실어날랐다. 한마디로 이 강을 별 볼 일이 없었다. 깨끗하지도 않고, 장대하지도 않고, 경치가 좋지도 않았다. 저녁에 조부(趙府)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밤은 깊어 고요했고, 창밖에는 낮고 느린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씨에게 이 강의 이름을 물어본다. 조건웅은 야생국화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담담하게 말했다: 운하일세. 운하! 이게 바로 운하란 말인가? 나는 그제서야 '경항대운하'의 '항(杭)'의 의미를 알았다. 그리고 수양제등등을 생각해냈다. 스스로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였지만, 마음 속에는 운하가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운하를 보았으니, 당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숙연했어야 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동안 운하를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을 운하를 우연히 만난다(빠오르지 위안예처럼). 그러나 운하를 찾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운하가 공원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니며, 오락장도 아니기 때문일까? 운하사업이 이미 버려지고, 아무도 그 더러운 물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까?

 

위안예는 아무 생각없이 버드나무를 꽂은 것이다. 우연히 운하와 해후한 것이다. 운하는 그에게 운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그러나 일부러 운하를 방문했다. 통저우(通州)에서 텐진(天津)에 이르는 구간으로 역사상 '북운하(北運河)'라고 불리웠던 곳이다. 대운하는 모두 5개의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운하의 머리를 본 것이고, 위안예는 운하의 꼬리를 본 셈이다. 나는 그리하여 '경항대운하'의 '경(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북으로 통저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경항대운하는 북경, 천진의 두 직할시와 하북, 산동, 강소, 절강의 4개 성을 지나고 절강, 장강의 두 강(江)과 회하, 황하, 해하의 세 개의 하(河)를 관통하며, 전체 길이가 3400여리이다. 운하를 건설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2400여년이 흘렀다. 역사가 길고, 규모도 크고, 공사도 거대했으며, 역할도 위대했다. 감히 세계 최고라고 할 만하다. 만리장성과도 나란히 이름을 떨칠 정도이다. 그리고 중화민족의 상징이다." 저우량(周良) 선생의 이 묘사는 강개하고, 극력 추천하는 의미가 있다. 듣고서 온 몸이 달아올랐다.

 

통저우는 북경동쪽의 수읍(首邑)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북운하의 개발로 인하여 얻은 명예이다. 현지에서 나를 맞이한 친구는 내가 운하를 보러 간다고 했더니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보는게 좋을 거라고 했다. 그래야 실망하지 않는다고. 어찌 안볼 수 있는가? 여러해전에 나는 남쪽의 학생이었다. 지리교과서에서 이 경항대운하를 배웠다. 당연히 그 때는 종이에 쓰여진 것이다. 종이위의 운하는 건륭하강남등의 이야기를 수반했다. 나는 꿈 속에서 대운하를 다녔다. 통저우의 옛날 부두는 분명 황제의 용선을 정박했던 곳이다.

 

현지의 친구는 연신 오해하지 말라고 했다. 봉건시대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천년의 조운역사에서, 옛날의 영광은 이미 암담한 마침표를 찍었다. 조백하의 물이 끊어진 이래로 항운은 정지되었다. 그후 북운하는 배수하도가 된다. 주로 전답에 물을 댄다. 물이 죽어버렸으니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할 수가 없다. 북운하 유적지는 통저우성내에 현존하는 문화유적중 하나이다. 유적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관광객들을 절망시키는 것이지만, 어쨌든 정확하다. 생각해보라. 빈 캔, 식품포장지, 썩은 나무와 채소이파리로 가득찬 더러운 수면을 보면, 너는 그것이 대운하라고 믿겠는가? 그래서 완고하게 아름다운 상상을 남기고 싶다면, 가서 보는 것은 자애로운 짓이 아니다.

 

필자가 남경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은 진회하에는 가보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다. 옛날의 영화는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저 심각하게 오염된 더러운 도랑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냥 문을 지나가더라도 들어가지는 말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혼자서 밤에 가본 적이 있다. 나중에 여관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우니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대운하가 나의 눈아래 흐르고 있다. 물러서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나의 영혼은 통저우의 성문앞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아주 갈등하면서.

 

위진(魏晋) 시대에 어느 명사는 눈오는 밤에 기발한 생각을 했다. 배를 몰아서 강을 거슬러 대(戴)씨성의 친구를 만나러 갔다. 문앞에까지 갔다가 조용히 되돌아오면서, 스르로를 안위한다. "흥이 일어서 찾아오고, 흥이 끝나자 되돌아갔다. 굳이 대씨 친구를 볼 필요가 있겠는가?" 대운하의 문제에서, 그 괴이한 방식은 확실히 배울만했다. 그래야 풍도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북운하유적지가 도대체 어떤 모습인지 나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운하는 정말 죽었는가? 나는 마음 속으로 이런 의문을 품고 있었다. 파도처럼 오르내렸다. 나는 대운하으 곁에까지 갔지만, 그의 호흡을 탐색해보지는 감히 못하고 있다. 혹시나 죽은 모습이 가슴이 아플까봐서인가 아니면 그것이 죽음에서 깨어나게 할까봐서인가? 이것은 혹시 너무 유약하거나 겁이 많은 것이 아닌가. 가실 눈으로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보더라도 그저 지나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최소한 하나의 유감으로 다른 유감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은 항상 유감스럽다.

 

운하와 스쳐지나가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용기를 내어 잔화패류의 제방에 섰다. 무엇을 보았는가? 퇴적된 하상과 퇴락한 부두, 그리고 잡초와 썩은 물 사이에 있는 여러가지 쓰레기. 고운하는 이미 죽은 물이 되었다. 내가 본 것은 영광스러운 시체였다.

 

북운하는 확실히 죽었다. 따뜻한 부귀의 꿈을 꾼 후에 호흡이 정지되었다. 그곳에서 많은 배들이 앞다투어 운행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석양의 마른 잡초들 틈에서 대운하를 애도하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 이 광경은 볼 만하지 않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당, 송, 원, 명, 청 심지어 더 이전(북운하는 진, 한부터 파기 시작했다. 진시황은 이를 통하여 병력과 군량을 운송하여 북방의 방어를 강화했다), 운하의 수로는 남북교통과 운수의 주요도로였다. 당시 통저우는 북경성의 양식보관소 겸 대창고였다. 거의 매일 배들이 식량, 비단, 염철, 벽돌, 도자기, 나무 및 기타 화물을 강남에서 싣고 와서 부두에 내려놓았다.

 

특히 북경이 원나라 대도가 된 후, 강산을 통일하고, 천하의 진귀한 물건들은 칸의 소유였고, 마음대로 가질 수 있었다. 곽수경이라는 수리학자는 명을 받들어, 대도성의 통혜하와 산동이 회통하를 판다. 그리하여 운하는 진정으로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동맥이 된다.

 

"원나라때 통혜하를 파서 식량운송선이 적수담까지 왔다." 먼곳에서 온 화물은 통주까지 와서, 부두에서 내리거나 환승할 필요없이 통혜하(쿠빌라이가 명명함)를 통하여 대도성의 아래까지 갔다. 대부두는 이미 통저우의 장가만이 아니었고, 이미 적수담으로 옮겨갔다. 배들이 가득해지니 적수담에서 종루,고루일대까지는 졸지에 시장이 들어서고 주루가 빽빽한 상업중심지가 된다. 통혜하는 이조하(裏曹河)라고 사람들이 불렀다. 북운하는 사람들이 외조하(外曹河)라고 부렀다. 이조하는 동편문에서부터 내성의 호성하와 연결된다. 이를 보면 고대인들은 수상운송에 많이 신경썼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대대로 조운하로 사용된 통혜하는 지금은 그저 북경성의 주요 배수하도가 되었고, 더 이상 노젓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원나라는 운하의 수로를 천자의 발아래에 있는 적수담까지 연결시켰다. 이것은 꿈을 크게 확장시킨 것이다.

 

홍무2년(1369년), 정로대장군 서달은 수십만의 북벌군을 지휘하여 더저우(德州)에 집합시킨다. 보병, 기병, 수군의 삼군은 대운하를 따라 북항한다. 일거에 통저우를 함락시킨다. 원왕조는 대도에 건국하여, 대운하라는 보급선이 명맥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대운하에서 보내오는 것이 양식과 비단, 주보와 옥기가 아니라, 복수의 전선이었다. 백년의 파티가 끝이 난다. 원왕조의 황제가 책임질 때가 된 것이다. 병사들이 성아래로 몰려들자, 원황제는 말을 타고 사막으로 되돌아간다. 이때부터 대운하의 물소리는 그의 꿈 속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되고, 그의 상심한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명나라가 경성을 개축한 이래, 대운하는 둘로 나뉜다. 적수담은 이미 옛날같지 않았다." 대운하의 종점은 남쪽으로 이전한다. 더 이상 적수담이 아니었다. 그저 북경성 동남쪽의 대통교에 정박하여 물건을 내렸다. 전문바깥은 이로 인하여 새로운 상업중심지가 된다.

 

원나라의 수도이건, 명나라의 수도이건 아니면 청나라의 수도이건, 북경은 기생(寄生)의 도시였다. 완전히 대운하로부터 '수혈'을 받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하물며 명나라가 북경성을 건설하는데 드는 벽돌, 나무, 옥석, 유리기와등의 건축재료도 기본적으로 모두 남방에서 운반해온다. 심지어 황제가 능묘를 만들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북경성의 많은 '하드웨어'는 모두 대운하가 하나씩 옮겨준 것이다. 그 후에 화려한 풍경이 만들어진다. 대운하는 고대중국의 일꾼이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오가면서, 땀을 비오듯이 흘리고, 밤낮으로 다녔다. 이것은 얼마나 온유하며 강건한 민족의 척추인가?

 

북운하는 노하(潞河)라고 불리웠다. 조백하, 유하, 혼하, 갑하의 여러 물을 끼고, 남으로 흘러서 남운하와 만난다. 진한때 조운이 개통된 후, 거의 쉬어본 적이 없다. 진시황은 북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양식을 운하로 날랐고, 한나라때도 장성바깥의 오랑캐 기병이 침입하는 것을 밖기 위하여 그리고 육로로 힘들게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운하로 병사들을 운송했다." 온유하는 거용관 일대부터 관구로 흘러나와, 남구, 창평, 통주등지를 지난다. 이 항로는 평원으로 군수물품을 연산지구까지 운송할 수 있다.

 

수양제의 고구려공격, 당태종의 고구려공격, 요나라 소태후의 '동경량(東京糧) ' 운송, 금나라 해릉왕의 남침은 모두 북운하의 덕을 본 것이다. 특히 이 수양제는 운하를 판 것으로 유명하다. 대업4년(608년), 하북의 여러 군에 명하여 백만의 백성들로 하여금 영제거(대운하 북단)을 파게 한다. 거기에 단 지역에 팠던 통제거, 강남하, 산양독등을 합하여 일거에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대수계를 관통하게 된다.

 

"수나라때 기수, 변수를 준설하고, 태행산을 팠다. 수나라의 백성은 그 해를 견디지 못했고, 당나라의 백성은 그 덕을 많이 보았다." 대학사 피일휴는 수양제의 공과와 시비에 대하여 공정하게 평가했다. 수양제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고, 그저 대운하만 남겼다. 그는 바로 운하를 파다가 망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피와 땀이 스민 유산은 아주 가치가 있었다. 진시황은 장성을 쌓고, 수양제는 대운하를 팠다. 이 두 대공사를 좋아하는 황제는 자신을 위하여 글자없는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북경은 서북에 장성이 있고, 동남에 운하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산물이고, 하나는 평화의 화신이다. 운하의 번화는 여러 태평성대를 충실하게 기록한다. 당연히 부유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꿈은 대부분 장성의 보호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전쟁과 평화의 관계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역사이다. 그래서 나의 기억에서 장성과 운하는 서로 보완하는 것이다. 장성이 무너지지 않으면, 운하도 죽지 않는다. 그들은 일찌기 기나긴 봉건시대에 가장 중요한 명맥(정맥과 동맥)이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회고하는데 침묵의 증언을 한다.

 

그러나, 운하는 죽었다. 청나라말기 기차가 새로운 사물로 나타나면서, 운하는 역사무대에서 퇴출된다. 조백하의 물을 끊기고, 배의 항해가 중지된 후, 더 이상 준설하지 않은 북운하는 배수하도가 되어 버린다. 주로 농지관개에 쓰인다. 수많은 배들이 식량과 화물을 운송하던 장관은 더 이상 없다. 마치 원시시대의 아련한 추억처럼. 지금 대운하의 북쪽 옛 구간을 바라보면, 그저 얕은 더러운 물만 남았다. 자그마한 배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이다. 그곳이 옛날에 놀라운 역사의 짐을 부담했을 것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북운하 유적지는 이미 볼거리가 없는 관광지가 되었다. 관광객이 없는 명승고적이 되었다. 이것은 구제할 길이 없다.

 

나는 생각한다. 만일 건륭제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도 흐려진 눈을 비벼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분명히 물어볼 것이다: 누가 나의 운하를 훔쳐갔느냐고. 혹은 누가 나의 운하를 죽여버렸냐고. 건륭제의 여러번의 남순은 운하로 다닌 것이다. 용주(龍舟)는 오색찬란한 부속선단을 이끌고 강남으로 내려갔다. 수십리가 이어지고 위풍당당했다. 운하의 가에는 지금도 건륭제의 여러가지 풍류이야기가 전해진다. 먹거리에 대한 것도 있고, 미녀에 대한 것도 있고,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것도 있다.

 

대운하의 북쪽끝에는 연등(燃燈)으로 유명한 요탑(遼塔)이 있다. 구름 속까지 높이 솟아 있다. 이것은 통저우 대부두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뉴욕 항구의 자유의 여신상처럼. 날씨가 맑으면, 높은 탑의 그림자가 수백미터 바깥의 운하에까지 비치며, 멋진 광경이 된다고 한다. 남북을 왕래하는 뱃손님들은 멀리서 이 등이 없는 '등탑'을 보면, 자연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심지어 건륭제도 먼 길에서 돌아왔을 때 이 보탑을 보면 '집에 돌아왔구나'라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붓을 들어, "군성탑영낙파첨(郡城塔影落波尖)이라는 어시를 지어 고탑에 귀중한 선물로 하사했다.

 

연등보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운하는 죽었다. 그래서 고탑은 주름이 가득한 슬픈 묘지기와 같다. 허무한 장명등을 높이 들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원래 운하를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소리없는 제사가 되고 말았다. 퇴역한 인공하를 위한 제사. 이제는 어둠에 묻혀버린 지난 일들을 제사지냈다.

 

조설근의 집은 통저우 장가만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운하에 대하여 아주 잘 알았을 것이다. <홍루몽>에는 강남의 아가씨 임대옥이 북으로 와서 친척집에 의탁할 때, 경항대운하의 수로로 왔다고 했다. 종점은 통저우의 장가만이다. 거기서 다시 가마나 말로 갈아타고 북경성으로 들어간다; "임대옥이 배에서 내려서 강둑에 올랐을 때, 영국부에서는 가마와 짐을 끄는 가마를 보낸지 이미 오래 되었다."

 

임대옥은 기나긴 대운하를 항해하여 가보옥을 만난 것이다. 운하는 어느 정도 은하수와 비슷하다. 가보옥은 상류에서 무의식중에 그녀를 기다린다. 마치 그림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중에 임대옥이 집으로 가서 병이 위중한 부친 임여해를 만나려고 할 때, 가보옥의 모친은 가련을 딸려보낸다. "배를 타고 양주로 돌아갔다." 이때 임대옥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운하에는 임대옥의 눈물도 적지 않게 떨어져 있으리라. 누가 그녀를 그렇게 울게 만들었는가? 임대옥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지금 또 누가 운하의 운명에 상심하여 눈물을 흘릴 것인가? 운하 자신은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다.

 

북경의 당대 문인들 중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 류샤오탕(劉紹棠)과 하오란(浩然)이 통저우 사람이다. 특히 류샤오탕은 소년시절에 운하에 대한 글을 써서 유명해졌다. 나는 기억한다 그의 대표작에 <운하의 노소리>가 있다. 그의 운은 운하가 준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운하의 '운(運)'은 내 생각에 '운영'의 '운'이 아니라, '운명'의 '운'인 것처럼 느껴진다. 비록 운하의 탄생은 하늘의 뜻이 아니었고, 운하 자체도 사람들이 인공으로 팠다. 생활은 국어교사가 아니다. 이런 아름다운 착각 자체는 필자의 운하에 대한 최고의 찬미이다. 운하는 그대에게 그리고 나에게 좋은 '운'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절대로 평벙한 강물이 아니다.

 

운하는 죽었다. 역사는 그러나 영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