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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예쉔닝(葉選寧): 시진핑(習近平)의 군부내 핵심인물

by 중은우시 2012. 8. 16.

글: 방효(方曉)

 

중공18대에 중공총서기에 오를 시진핑은 2010년 군사위 부주석에 선임된 후, 금방 군대내의 태자당세력을 형성했다. 그의 친한 친구인 예쉔닝의 적극적 도움하에, 시진핑은 군부를 장악해가고 있다.

 

시, 예 두 집단은 2대에 걸쳐 사이가 좋다. 예쉔닝은 시진핑을 도와 군부대의 여러 인물들을 시진핑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여기에는 군사위 부주석 쉬차이허우(徐才厚) 및 2포정위(二砲政委) 장하이양(張海陽)과의 관계를 가깝게 이어준 것이 포함된다. 보시라이사건에서 예쉔닝은 시진핑이 후진타오, 원자바오측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하는데 핵심역할을 했다. 그리고 3천의 중국공산당 해외간첩네트워크의 명단을 시진핑에게 건넨다.

 

금년2월, 시진핑이 미국방문하기 전날, 충칭 부시장 왕리쥔이 미국 주청두영사관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미국은 왕리쥔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시진핑이 국방부 펜타곤에 도착했을 때, 미국측은 완전군장의 예로 맞이하여 체면을 세워주었다.

 

외부에서는 이것을 미국의 명확한 의사표시로 본다. 시진핑이 미래에 중공의 군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시진핑은 일찌기 중앙군위 비서장 겅뱌오(耿飙)의 비서를 지내, 군대의 운용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태자당의 사람들 사이에 인맥이 좋다. 일단 군위주석을 물려받으면, 효과적으로 군대를 장악할 수 있다.

 

고관자제들은 오랫동안 군대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같은 원로의 후대인 시진핑이 군위의 대권을 장악한다면, 18대이후 고관자제들은 계속하여 군대내에서 강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진핑은 샨시(陝西)성 웨이난(渭南)시 푸핑(富平)현 사람이다. 조적(祖籍)은 허난(河南)성이다. 그는 베이징에서 출생했다. 시진핑은 시중쉰(習仲勛)의 차남이다. 그가 출생했을 때, 시중쉰은 이미 관직이 중공중앙 선전부 부장으로 있었다.

 

1969년 1월, 15살의 시진핑은 샨시성 얜촨(延川)현의 원안이공사(文安驛公社) 량자허대대(梁家河大隊)에 삽대(揷隊)했다. 1975년 10월, 그는 추천을 받아 칭화대학에 입학하여, 공농병학원(工農兵學員)이 된다.

 

시중쉰은 일찌기 국무원 부총리와 전국인대상임위 부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예젠잉(葉劍英)과 시중쉰은 모두 중공원로이고, 두 사람은 얜안에서 처음 만났다. 중공의 개혁개방초기에 예젠잉은 시중쉰이 광동을 담당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본다. 예젠잉은 시중쉰으로 하여금 '남대문을 지키게' 하도록 힘을 써주고 적극 지지한다.

 

1978년 12월 11일, 시중쉰은 중앙에서 정식으로 광동성위 제1서기, 성혁명위 주임으로 임명한다. 시중쉰은 광동에 도착한 후 6일째 되는 날, 예젠잉이 광동으로 업무시찰을 와서 휴식을 취한다. 그후에도 여러번 광동으로 시찰을 간다.

 

당시 예젠잉의 아들인 예쉔닝은 시중쉰의 부하였다. 상사와 부하관계에 2대에 걸친 정의가 있다. 예쉔닝은 시진핑을 적극 도왔고, 군대내의 많은 인물들을 그의 편으로 만들어준다.

 

2010년 시진핑이 중궁군사위 부주석에 추가선임된 후, 금방 군대내의 태자당세력들은 류샤오치(劉少奇)의 아들 류위안(劉源)을 해방군총후근부 정위로 발탁하고, 리센넨(李先念)의 사위인 류야저우(劉亞洲)를 국방대학 정위로, 전 국방부장 친지웨이(秦基偉)의 아들인 친웨이장(秦衛江)은 남경군구 부사령관이 된다. 후야오방의 사위인 류샤오장(劉曉江)은 해군 정위가 된다. 시중쉰의 옛부하인 천팡런(陳仿仁)의 아들인 천용(陳勇)은 총참모장조리로 발탁된다.

 

홍콩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장전(張震)의 아들인 장하이양 상장은 그중 대표인물이다. 원래 시진핑과는 교분이랄 것이 없었는데, 예쉔닝이 중간에 다리를 놓아서 친한 친구가 된다.

 

특히 '이포' 전략유도탄부대를 장악한 것은 더욱 중임중의 중임을 맡은 것이다. 시진핑은 '이포'의 정위를 교체하였고, 심복인 태자당 장전의 아들 장하이양에게 맡긴 것이다.

 

홍콩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이 군사위 부주석을 맡은 후, 2011년부터 몇달동안, 이미 7대군구 사령관 정위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친히 베이징, 선양, 란저우, 지난, 청두의 5대군구를 방문하고, 무경(武警) 및 이포 총사령부를 방문했다. 광저우, 난징 양대군구의 지휘관은 북경에서 만났다. 최소한 그가 방문한 5대군구는 현재 모두 본부의 관병들에게 시진핑이 부대를 시찰할 때 얘기한 정신을 교육시키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군사위 부주석이며 선양군구 출신인 쉬차이허우는 몰래 시진핑을 따라 선양군구를 한바퀴 돌았다는 점이다. 이는 암중으로 선양군구이 간부들에게 시진핑에 충성하라고 지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양군구에서 시진핑이 부대를 시찰할 때 접대한 바 있는 단위의 한 정위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시진핑은 전혀 폼을 잡지 않았고, 그들에게 아주 친절했으며, 부대상황을 잘 이해했고, 말도 적절하게 하였다. 일부 수장들이 시찰을 형식적으로 하면서, 그들과의 대화도 벽을 하나 두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 정위는 전혀 숨김없이 말했다. 아래의 간부전사들은 모두 시진핑을 환영했다. 어쨌든 그는 부대출신이고 부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돌아온 후, 시진핑은 쉬차이허우와의 관계를 가깝게 끌어당긴다. 기실 이전에, 쉬차이허우는 시진핑과 약간의 개인적 교분이 있었다. 시진핑이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온 후,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는 날로 분명해졌다. 두뇌가 영민한 쉬차이허우는 그와 교분을 맺으려고 여러가지로 궁리했다. 그러나 당시 시진핑은 아직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아니었고, 두사람은 직접적인 업무관계가 없었다. 그저 정치국회의 같은 특별한 정식의 공식경우에만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거저 악수하고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정도였다.

 

한번은 한 역사사건의 기념활동에 참석했다. 일찌기 중공해방군총정치부연락부 부장을 맡은 바 있는 예쉔닝이 적극적으로 시진핑과 쉬차이허우를 한 자리로 끌고왔다. 쉬차이허우에게 자신의 '형제'인 시진핑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이때부터 쉬차이허우는 시진핑에 접근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쉬차이허누도 기꺼이 수시로 시진핑의 집안을 드나들었고, 서로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게다가 쉬차이허우는 총정치부계통을 책임지고 있다. 그래서 펑리위안(彭麗媛, 시진핑의 부인)이 단장을 맡고 있는 총정문공단이 그의 관할하에 있었다. 어떤 때는 큰 일이 아닌 경우에는 평리위안도 같이 참석하여 자신의 상사와 얘기를 나누곤 했다.

 

왕리쥔의 망명사건이 터진 후, 예쉔닝은 먼저 중앙에 서신을 보내 보시라이의 사직을 요구한다. 태자당의 입장표명에서 앞장선 것이다. 예쉔닝은 이번에 시진핑이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편을 들게 하는데 관건적인 역할을 했다.

 

예쉔닝은 일찌기 중공태자당계층 및 북경권력귀족권내에서 공인된 "태자당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예쉔닝은 외부에서 예쉔핑(葉選平)의 "군사(軍師)"로 알려져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예쉔닝은 극지 정명하고, 신비스러우며, 최고위직까지 잘 통하는 인물이다. 고위층과 군계 및 상계에서 활약이 대단하다. 그리고 인간관계가 아주 폭넓다. 태자당내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다성(智多星)"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총정연락부"는 중국공산당의 또 다른 특무기관이라고 한다. 예쉔닝은 중공3대정보계통중 하나를 장악하고 있다. 예쉔닝은 총정연락부에서 재직하고 있는 동안 한 가지 큰 일을 한다. 그것은 삼천명의 태자당 구성원들을 해외유학보낸 것이다. 나중에 태자당이 집권하는데 인재를 배양한 것이다. 지속기간이 길고, 관련된 국가도 많고, 파견인수도 많아서 사상유례없는 정도였다. 그래서 중공군정보사상 최대규모의 '잠복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당초 총정연락부의 안배에 따라, '맹주' 예쉔닝의 지령과 소환을 기다리고 있다.

 

시진핑은 중앙군위 부주석에 오른 후, 18대에서의 총서기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예쉔닝은 시진핑을 상당히 잘 보았다고 한다. 그에게 큰 희망을 건다. 그래서 그는 수하의 3천복병을 모조리 시진핑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시진핑이 지휘하도록 한 것이다.

 

2007년 8월, 중공17대전에 상하이의 1인자 천량위(陳良宇)가 낙마한다. 그리고 시진핑이 상하이의 1인자가 된다. 중공17대때, 시진핑은 정치국 상임위원에 선임된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중앙서기처 상무서기, 국가부주석, 당교교장, 홍콩마카오판공실조장, 기구편제위원회 부주임등이 된다. 2008년 북경올림픽통주조 조장이 된다. 올림픽이 끝난 후, 시진핑은 다시 "중공중앙안정유지공작영도소조"의 업무를 한다.

 

 

중공태자당은 수십년간 반복되는 정치투쟁에서, 이미 서로 다른 권세집단을 형성한다. 그들간에는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그들은 왕왕 부모의 계파 및 자신의 생활권으로 나뉘고, 서로 방파를 맺고, 각자 계보를 만들어간다. 이렇게 이익이 일치하는 계파가 형성되는 것이다.

 

중공태자당은 각각 예젠잉의 아들 예쉔닝, 후야오방의 아들 후더핑(胡德平), 덩샤오핑의 아들 등푸팡(鄧樸方), 왕전의 아들 왕쥔(王軍), 천윈의 아들 천위안(陳元)등이 우두머리이다. 그중 세력이 가장 큰 것은 덩푸팡일파이다.

 

북경의 각파 태자당의 균형을 위하여, 시진핑은 북경에 들어온 후 태자당의 각파의 우두머리들을 만난다. 시진핑은 후야오방의 미망인 리자오(李昭)와 후더핑을 집으로 찾아가서 만난다. 왜냐하면 예전에 시진핑이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위서기에서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부시장으로 옮겨간 것은 바로 후야오방이 친히 결정해준 것이었다.

 

1986년말 허페이(合肥), 상하이, 베이징등지에서 학생운동이 벌어진다. 후야오방은 진압에 반대했고, 대화를 주장했다. 덩샤오핑등은 "자산계급자유화를 반대하는데 힘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서기에서 파면한다. 그리고 후야오방비판대회를 거행한다. 회의에서 오로지 시중쉰만이 책상을 치면서 이와 같이 여전히 개인이 독단적으로 전횡하는 행위는 당내민주파면방법에 따르지 않은 것으로 마오쩌둥의 잘못을 다시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때부터 시중쉰과 덩샤오핑의 원한과 대립은 더욱 깊어진다.

 

시진핑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오기 전에, 덩샤오핑가와 관계가 밀접한 위정성(兪正聲)이 중간에서 알선한다. 시진핑은 덩푸팡을 식사에 초대하여 덩샤오핑, 시중쉰 양가의 역사적 은원을 풀고자 희망했다. 위정성은 총명한 사람이다. 즉시 덩푸팡에게 그 의사를 전달한다. 덩푸팡이 직접 식사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여동생과 매부인 덩롱(鄧榕)과 허핑(賀平)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화해의 의사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