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아(李治亞)
동한말기에는 많은 신동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코끼리의 무게를 잰(稱象) 조충(曹沖), 배를 양보한(讓梨) 공융(孔融), 와빙구리(臥氷求鯉)의 왕상(王祥)등이 있다. 기실 동오(東吳)에도 신동이 많았다. "팔세회길(八歲懷桔)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육적(陸績), 9살때 대전에 올라 부친의 체면을 되찾아온 제갈각(諸葛恪)이 있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사람도 신동이다 그러나 그는 동오의 황제였다. 이름은 손량이라 한다.
손량은 10살때 황제가 된다. 재위기간동안 다른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당시 동오에는 손아귀에 중병을 장악하고 있던 대신들이 아주 많았다. 태자태부 제갈각, 태상 등윤, 시중 무위장군 손준 등이 모두 노황제의 곁에 있던 중신들이고, 요직을 겸하고 있어, 어린 황제를 아예 눈에 두지 않을 정도였다. 여러 대신들이 서로 내분에 빠져, 제갈각은 손량의 즉위후 출병하여 북벌을 하여 위나라를 공격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오나라군대는 패배하여 사상자가 참혹했다. 조야에서 제갈각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건흥2년(253년) , 손준은 손량의 동의를 받은 후, 정변을 일으켜, 제갈각을 죽여버린다. 그후 손준이 승상대장군을 맡는다.
만일 손준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더라면 손량도 괜찮은 군주로 삶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손량은 기실 아주 총명했다. 당시에 신동이라 불리웠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손량을 무시했다. 그리하여 어린 태감마저도 흑백을 전도하고 시비를 뒤집어서 보고했다. 한번은 손량이 매실을 먹고 싶어, 황문관에 분부하여 창고로 가서 꿀로 절인 밀즙매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 황문관은 마음이 바르지 못하였고, 마음이 좁았다. 그는 원한을 반드시 풀려고 생각하는 소인이었다. 그는 창고를 장악하고 있던 관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 사람은 만나면 항상 말다툼을 벌였다. 그는 이를 가슴에 품고 있었고,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 그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창고관리로부터 밀즙매를 받은 후, 몰래 약간의 쥐똥을 섞어넣는다. 그리고 나서 손량에게 바쳤다. 그는 정말 악독한 노비였다. 그가 예상한대로, 손량은 몇 입을 먹지 않아 꿀 속에 쥐똥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과연 대노하였다. "누가 이렇게 대담한가. 감히 나까지 속이려 하는가. 이는 반란이나 다름이 없다." 황문관은 급히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창고관리가 직책을 다 하지 못아고 항상 놀러 다녔습니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놀았으니 반드시 그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아니하여 쥐똥이 꿀 속에 들어간 것일 것입니다. 주공의 흥을 깼을 뿐아니라 주공의 건강까지도 해쳤으니 이는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에게 죄를 내리셔서 교훈을 주시기 바랍니다." 손량은 즉시 창고관리를 불러서 쥐똥에 관한 상황을 물어본다. "조금 전에 황문관이 네 창고에서 꿀을 가져온 것이 아니냐?" 그 말을 듣자 창고관리는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는 머리를 바닥에 찧으면서 겨우겨우 답한다: "그렇습니다. 그럴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줄 때는 안에 분명히 쥐똥이 없었습니다." 황문관이 말을 가로막고 말한다. "아닙니다. 창고관리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쥐똥은 일찌감치 꿀 속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계속하며 모두 자신이 옳다고 우겼다. 시중관 조현과 장분이 아이디어를 냈다. "황문관과 창고관리가 서로 우기고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도대체 누구의 조인지 알 수 없으니, 그들 둘을 모두 가두어서 함께 죄를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총명한 손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사실 쥐똥을 누가 넣은는지와 같은 일을 확인하는 것은 간ㅆ다. 손량은 웃으며 말했다: "만일 쥐똥이 일찌감치 꿀 속에 있었다면 침습된 시간이 길어서 반드시 모두 습해졌을 것이다. 지금 안은 마르고 바깥만 습하니 이는 황문관이 막 집어넣은 것이다. 이런 짓을 하다니 이는 용서할 수가 없다." 그제서야 황문관은 깜짝 놀라서 바닥에 꿇어앉아 사실대로 창고관리를 모함했다는 것을 자백한다.
아쉽게도 이렇게 총명한 일대제왕의 일생은 불운했다. 황궁에 분쟁이 많았고, 대신을 죽인 승상대장군 손준은 얼마후 전사한다. 당제인 손림이 그의 자리를 계승했다. 그는 더욱 음독한 인물이다. 태평3년(258년) 그는 손량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부대를 이끌고 어린 황제의 심복 전상(全尙)을 체포한다. 그리고 동생 손은을 보내어 황제 곁의 시위 유승(劉承)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포위하고 손량을 폐위시켜 회계왕으로 내린다. 그리고 손권의 여섯째 아들인 낭야왕 손휴를 황제로 올린다. 그리고 중서랑 이숭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궁에 들어가게 하여 인새를 탈취하고 손량부부로 하여금 궁을 떠나게 한다. 장군 손경이 그를 압송하여 회계로 보낸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6살이었다. 영안3년(260년), 손량의 봉지에 유언비어가 돈다. 손량이 건업으로 돌아가 복벽을 꾀할 것이라는 것이다. 손량의 시종도 손량이 제사를 지낼 때 나쁜 소리를 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얼마후 손량은 피살된다. 죽을 때 그의 나이 겨우 17살이었다. 이렇게 하여 젊고 총명한 괴뢰황제는 그의 비참한 일생을 끝마친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통(龐統): 삼국연의에서 가장 고평가된 인물 (0) | 2013.04.27 |
---|---|
악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패전신 (0) | 2013.04.13 |
하후연(夏侯淵)의 뛰어난 아들들 (0) | 2013.03.30 |
손호(孫皓): 동오의 마지막 황제 (0) | 2012.09.20 |
마균(馬鈞): 제갈량보다 뛰어난 발명가 (0) | 2012.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