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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하후연(夏侯淵)의 뛰어난 아들들

by 중은우시 2013. 3. 30.

글: 섭지추(葉之秋) 

 

 

 

하후연은 조위(曹魏)진영의 명장이다. 일찌기 조조에 의하여 호보관우제일인(虎步關右第一人)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인물이다.바로 이 하후연은 얼마후, 조조에게 초포장군(草包將軍, 바보, 멍청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라고 욕을 먹는다. 왠 일일까?

 

조조가 한중(漢中)의 장로(張魯)를 토벌한 후, 주력을 이끌고 업성으로 돌아갔다. 한중을 지키는 중책을 하후연에게 맡긴다. 얼마후, 유비가 장비, 황충을 이끌고 한중쟁탈전을 벌인다. 유비에게는 삼국역사장 1류의 모사인 법정(法正)이 있었다. 그러나 하후연에게는 얘기할만한 사람이 겨우 장합(張郃) 뿐이었다. 조조 본인은 업성에서 내부반란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아들 조창(曹彰)은 북방에서 오환(烏丸), 선비(鮮卑)를 몰아내고 있었으며, 조인(曹仁)은 급히 완성(宛城)으로 달려가서 병변(쿠데타)를 진압하고 있었다. 장료(張遼)는 합비(合肥)에 주둔하며 오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조위는 전체 전선에서 전투가 붙었고, 조조는 하후연을 도와줄만한 여력이 없었다. 사느냐 죽느냐는 온전히 하후연 자신에게 달려버린 것이다.

 

하후연은 처음에 잘 싸웠다. 유비와 1년간을 대치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하후연은 점점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중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유비가 하후연의 진영을 공격할 때, 하후연은 진영의 앞15리 지점에 녹각(鹿角, 동근 나무의 앞부분을 뾰족하게 깍아서, 교차시켜 고정함으로써 적군의 진공을 저지하는 것)을 깔아놓았다. 유비의 대군이 전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파견하여 하후연이 깔아놓은 일부 녹각을 불태우게 했다. 하후연은 녹각에 피해를 입자 친히 400명을 이끌고 진영을 빠져나가 전선에 나가서 새로 설치한다. 유비는 산 위에서 조나라군대의 총사령관인 하후연이 전장에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즉시 기병을 출동시켜 체포하게 한다. 하후연은 철수할 시간을 놓쳐 촉나라군대와 싸움을 벌이게 된다. 하후연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촉나라군대는 이미 하후연의 퇴로를 막고 있었고, 위나라 사병들은 급히 진영으로 도망친 후에야 총사령관인 하후연이 아직도 뒤에 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하장수들은 병력을 이끌고 도처로 하후연을 찾아나섰고, 죽기를 다하여 싸워서 겨우 하후연을 구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하후연이 용병술을 전혀 모른다고 욕을 했고, 그를 "백지장군(白地將軍)"이라 부른다. 전군의 총사령관이 친히 전투에 나설 필요도 없는데, 하물며 녹각을 보충하는 것같이 모험스러운 최전선의 일을 직접 하느냐는 것이다.

 

"백지장군"은 무엇인가? 고대에 곡식을 심지 않는 못쓰는 땅을 '백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막과 같이 식물이 아예 자라지 않는 땅을 백지라고도 불렀다. 결국 하후연은 가슴에 무슨 전략이나 생각도 없고, 전투에 대한 기본 상식조차 없다는 말이다.

 

이전에 조조가 하후연을 칭찬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하다. 하후연은 분명히 멍청이는 아니다. 그는 장수의 재능이 있는 총명한 사람이다. 그러면 그렇게 총명한 사람이 왜 이렇게 멍청한 일을 했을까? 그저 한가지 가능성이다. 하후연은 유비와 1년여를 대치하면서 마음 속에 교만이 생긴 것이다.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녹각도 내가 친히 나서서 교체하겠다. 너 유비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후연은 유비를 가볍게 보았고 그래서 유비의 매복에 걸린 것이다.

 

유비는 조나라군대와 여러번 싸웠기 때문에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양초가 어느 정도인지 공성기계가 어느 정도인지 다 알고 있었다. 이런 것으로 비교하면 촉나라군대는 조나라군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중을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저 재삼 방어하고 퇴각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하후연은 유인한 것이다. 만일 야전으로 싸운다면 촉한군대는 승산이 있다.

 

조조가 하후연을 어떻게 욕했는지 원래의 말을 지금 알 수는 없다. 하후연의 귀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하후연은 이렇게 혼이 나고도 다시 법정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노장 황충에 의하여 정군산에서 죽임을 당한다.

 

하후연이 죽고 일곱 아들이 남았다. 그의 이 아들들은 모두 하후연의 품행을 물려받아서, 아주 총명했지만, 어떤 때는 멍청한 일을 벌이기도 했다. 그중 몇몇은 아주 뛰어났다.

 

하후형(夏侯衡)은 부친의 복록(福祿)을 얻었고, 하후패(夏侯覇)는 부친의 수욕(壽辱)을 얻었고, 하후칭(夏侯稱)은 부친의 용무(勇武)를 얻었고, 하후위(夏侯威)는 부친의 협의(俠義)를 얻었고, 하후영(夏侯榮)은 부친의 기굴(奇崛)을 얻었고, 하후혜(夏侯惠)와 하후화(夏侯和)는 그의 용록(庸碌)을 얻었다.

 

큰아들은 하후형이다. 이 아들은 가장 재미가 없다. 일생을 평탄하고 특별한 일이 없이 살았다. 당연히 그 본인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은 행복한 일생이었다. 하후형의 모친은 조조의 당매(堂妹)이다. 하후형이 자란 후, 조조는 자신의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낸다. 조조와는 집안이 결혼으로 얽혀있다고 할 수 있다. 조조는 하후연의 마음을 잡기 위하여, 적지 않게 마음을 썼다. 이 하후형이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그는 평생 영화부귀를 누린다. 하후연이 전사하자, 하후형은 장남으로 작위를 물려받는다. 조비가 즉위한 후에는 그를 안녕정후(安寧亭侯)에 봉한다. 기록을 보면 하후형은 조비가 재위하던 시기에 사망한다. 아마도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고 서른살 가량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아들은 하후패이다. 하후패는 힘들게 살았다. 스무살가량때 부친 하후연이 유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후패는 항상 이빨을 갈며 촉나라를 멸망시켜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비, 법정, 황충은 그후 2년도 지나지 않아 모두 죽어버린다. 복수를 하려면 촉국을 멸망시키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중에 조예가 즉위한 후, 하후패는 갈수록 더 잘나갔다. 조상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시기가 최전성기였다. 우장군에서 정촉장군(征蜀將軍)까지 그는 조나라군대에서 촉한과 싸우는 총사령관이 된다. 원래 하후패의 일생은 아마도 이렇게 평범하게 끝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조상이 사마의에게 죽임ㅇ르 당하고, 하후패의 친구는 하나둘 사마의에게 주살을 당한다. 나이 오십을 넘긴 하후패는 사마의의 칼날이 자신의 목에 내려쳐질 것을 걱정해서 마음 속으로 두려워했다. 게다가 사마의는 심복인 곽준(郭準)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서 하후패의 직속상사로 보낸다. 하후패와 곽준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후패는 곽준의 전횡을 멸시했고, 곽준은 하후패가 걸핏하면 옛날 경력을 들먹이는 것을 멸시했다. 이제 하후패가 곽준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니, 죽는 길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하후패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조위,촉한이 모두 깜짝 놀랄 일을 벌인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의 부친을 죽인 원수인 촉한으로 투항하기로 한 것이다. 부친 하후연이 지하에서 이를 들었다면 아마도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다시 한번 죽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국의 옛말중에 맞는 말이 있다. 시원스럽게 죽는 것은 구차하게 사는 것만 못하다. 조위에 남아 있으면 사마의의 도하귀(刀下鬼)가 될 것이고, 사마의는 아마도 온갖 지저분한 죄명을 날조하여 그가 죽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하후패는 몰래 촉한으로 향한다. 그러나 중도에 일을 잃고, 양식도 다 먹었다. 그리하여 말을 죽여서 먹었다. 말이 없으니 이제 어떻게 갈 것인가. 발도 돌길에 이미 망가졌고, 돌덩이 위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촉한의 정찰병을 만났고, 하후연은 그들에게 말한다. 자신은 당당한 조위의 정촉장군이며, 촉한의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맞이해주기 바란다고.

 

하후패는 운이 좋았다. 장비의 처가 하후패의 당매이다. 지금 장비는 죽었지만, 당매는 살아있었다. 그리고 당매의 딸이 현재 촉한황제 유선의 황후이다. 유선은 하후패가 왔다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한다. 한편으로 황후의 친척이고, 다른 한편으로 조위의 대장이 투항하러 왔으니, 촉한이 천하인의 마음 속에서 정통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하후패는 촉한에서 그다지 잘 지내지 못했다. 촉한의 권신들은 대부분 하후패를 자신들과 다른 류로 보았다. 유선은 시종 하후패를 도와주었고, 그에게 실권은 없지만 자리도 마련해주었다. 촉한이 멸망하기 전 7,8년때 하후패는 병으로 사망한다.

 

하후패가 도망치자, 하후패의 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마의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비록 하후패에게 반국의 대죄가 있었지만, 하후연의 체면을 보아서, 하후패의 자녀들에게 심하게 추궁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대우는 낮아졌고, 온가족이 구석진 요동 낙랑군으로 쫓겨나게 된다. 하후패가 촉한에 있던 수십년동안 수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 처자식들을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하후패가 호의호식하고 있을 때, 처자식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한 사람이 구차하게 살면서 온가족에 재앙이 내렸고,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이를 갈았다.

 

셋째는 하후칭이다. 여러 형제들 중에서 그가 가장 하후연의 풍모를 닮았다. 하후칭은 어려서부터 행군포진을 좋아했고, 어린이들을 이끌고 모의전투를 벌이는데 제대로 하였다. 만일 누군가 명령을 어기면, 하후칭은 그를 때리는데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하후연은 이 아들을 아주 좋아했고 한번은 일부러 병법서를 꺼내서 아들에게 주면서 <항우전>을 보게 했다. 아들이 병법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리고 군사적인 충동과 열정을 이성적으로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하후칭은 자료를 전부 한켠에 몰아놓고는, 아주 화가나서 말했다고 한다. "할 수 있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을 배워서 뭘하겠는가?" 하후연은 마음 속으로 이 아들이 대단하다고 여긴다. 16세가 되었을 때, 하후연은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길에서 호랑이를 한마리 만난다. 하후칭은 즉시 앞으로 나가서 쫓아갔다. 하후연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뒤따르게 한다. 그러나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나 호랑이가 하후칭에게 덤벼들 때, 하후칭은 활을 꺼내어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죽여버린다.

 

이 일은 즉시 소문이 났다. 조조도 이 말을 듣는다. 조조는 하후칭의 손을 끌어당기며 기뻐했다: "아..오늘에서야 마침내 너를 얻었구나." 조조는 자신의 아들 조비에게 말한다. 하후칭과 잘 교류하며, 형제이 예로 대하지, 군신의 예로 대하지 말라고. 형제들은 모두 하후칭을 자랑스러워했다. 하후칭은 세상에 나온 후 실적이 괜찮았고, 활도 잘 다루었다. 무예도 좋았고, 말재주도 좋아서,청년들 중에는 군계일학이었고, 첫손에 꼽았다. 아쉽게도 하늘이 기재를 질투했는지, 18살때 하후칭은 죽고 만다.

 

넷째는 하후위이다. 하후위는 자주 청년들을 도와주었고, 명성이 괜찮았다. 일찌기 형주자사, 연주자사를 역임하고, 49살때 병사한다. 하후위의 일족은 잘 살았다. 아들, 손자대에도 적지 않은 인물들이 태수, 자사등의 관직을 지낸다. 그리고 서진 황실과도 인척관계가 된다.

 

다섯째는 하후영이다. 하후영은 신동이다. 7살때 글을 썼고, 책을 볼 때 한번 보면 다 외웠다고 한다. 조비가 하후영의 재주를 전해듣고는 일부러 큰 연회를 열어, 100여명의 당시 명사들을 초청한다. 연회에 참가한 명사들은 모두 명함을 하나씩 준비했고, 그 위에 자신의 성명, 고향, 관직을 쓰게 했다. 하후영은 한번 본 후에 모두 기억했다. 어떤 사람은 못믿었고, 하후연은 그 자리에서 보여준다. 그 자리에 있던 100여명의 성명, 고향, 관직을 모두 말해버린다.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일시에 조야가 들썩인다. 조비도 하후영이 기특하다고 여겼다. 하후연이 전사했을 때,하후영은 진영에 있었다. 부하가 하후영에게 도망치라고 하자, 하후영은 따르지 않았다. 하후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부친이 현재 전사했는데, 내가 아들로서 어찌 혼자 삶을 구하겠는가?" 그리하여 13세의 하후영은 칼을 꺼내들고 촉한의 대군으로 돌진해갔다. 일대의 기재는 이렇게 전란중에 죽고 만다.

 

여섯재는 하후혜이다. 일곱째는 하후화이다. 이 두 형제는 모두 늦게 태어났고, 관직에 올랐을 때는 하후씨의 가장 휘황한 시대를 지났을 때이다. 사마씨가 권력을 잡은 후, 조정에서 조위세력은 탄압을 심하게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부득이 현학을 공부하고, 정치를 멀리했다. 두 형제는 글이 모두 뛰어났고, 말재주도 있었다. 관직에는 그다지 마음이 없었다. 하루종일 친구들과 노장을 얘기하였다. 하후혜는 연국국상, 낙안태수를 지냈고, 하후화는 하남윤을 지냈다. 관직이 그다지 높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낮지도 않았다.

 

하후연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