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마진일
삼국시대는 여러 영웅들이 나타났고, 상호간에 일기토는 아주 볼만했다. 백중지간이라 하더라도 승부는 난다. 조조는 중원을 짓밟으며 십수년간 풍운을 일으킨다. 그 뜻은 강동을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적벽에서 크게 당하기는 했지만. 관우는 천하를 노리고, 기세등등하게 병력을 몰아 북벌을 시도하나, 결국 맥성에서 패배하여 죽고 만다. 제갈량은 사천에 칩거하며, 기산으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가정에서 결국 실패를 맛본다. 이렇게 보자면, 삼국시대를 종횡한 사람중에 패전을 겪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악진이다.
좋다. 우리는 먼저 <삼국지>에서 악진의 자랑스러운 전적을 보자: "안중으로 장수를 정벌하다", "여포를 하비에서 포위하다", "유비를 패에서 공격하여 격파하다", "원소를 관도에서 공격하다", "따로 황건적을 공격하여, 격파하다", "원담을 남피에서 공격하고, 먼저 오르다." 이를 보면 악진은 군대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수십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거의 패전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의 손에 패배한 장수들 중에는 여포, 원소, 유비같은 백전노장에 인기높은 우상들도 있다. 더욱 뛰어난 점은 악진은 전투에서 지휘를 잘했을 뿐아니라, 일대일의 적나라한 진검승부에서도 전혀 약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힘을 다해 싸워서, 원소의 장수 순우경을 참하다." "원담, 원상을 여양에서 공격하여, 그 대장 엄경을 참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악진에 의하여 참해진 순우경은 일찌기 조조의 조정동료이고 나중에 안량, 문추와 함께 하북명장으로 나란히 칭해졌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악진의 전공이 탁월했기 때문에 조조가 논공행상할 때, 그에게 상당히 높은 영예를 준다. <삼국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조(조조)는 무공으로 건립했는데, 당시의 좋은 장수는 다섯 명이 우선된다." 조조가 당시에 훈작을 내린 오자양장은 바로 가장 중시한 우금, 교변으로 유명한 장합, 효용으로 유명한 악진, 과감하고 침온한 장료, 엄근한 것으로 유명한 서황이다. 이 명단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악진의 당시 군내에서의 서열은 장료, 서황보다 앞섰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이처럼 무게있는 인생이력서를 지닌 삼국의 일류명장이 개인인기의 측면에서는 장료등보다 훨씬 아래라는 것이다. 여러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를 2,3류장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당연히, 악진이 조용히 '전락'하게 된 것은 <삼국연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고대에 여론선전은 현재처럼 발달하지 않았다. 당시에 몇 안되는 종이매체작품인 <삼국연의>는 당연히 중요했고, 군중들에게 다가갔고, 그래서 더 많은 판매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시 악진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 몇몇 명장들의 인간관계를 보도록 하자.
장료: 무성 관우가 위영에 있을 때 친밀한 전우이고. 일찌기 합비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지닌 동오의 거두 손권을 격파한 적이 있다.
서황: 마찬가지로 무성 관우가 위영에 있을 때 친밀한 전우이고, 일찌기 형주에서 관우와 멋진 싸움을 벌인 바 있다.
장합: 일찌기 장비와 한중 탕석산에서 '격정사사"로 오십일간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과감하게 사마의를 대신하여 오명을 뒤집어 쓴다. 그는 제갈량 북벌의 희생물이 된다.
우금: 변절의 오명을 뒤집어 쓰고 관우에게 투항한다.
이를 보면, 관우, 손권, 제갈량등은 모두 삼국시대의 핵심인물이다. 원래 아주 많은 군중기초를 지니고 있다. 그들과 싸우거나 갈등이 있던 인물은 당연히 쓸모가 있다. 그게 스캔들로 얼룩진 우금이라 하더라도 반면인물로 책에서 써먹을 데가 있는 것이다. 악진을 보면, 일처리를 법도에 맞게 하였고, 비록 여포, 원소등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실적이 있지만, 결국 소뮤모의 조우전이었거나 부장으로 참전한 것이었다. 광환은 당연히 약간 손색이 있다. 예를 들어 몸이 작은 조조는 마지막에 역천절국의 후흑급 정치깡패가 된다. 심지어 계속 이름을 떨쳤던 봉추 방통은 용모가 뛰어나지 않아 마지막에 낙봉파에서 목숨을 잃을 때, 그다지 동정을 받지도 못한다. 오히려 제갈량과 사천에 들어가는 공을 다투기 위하여 모험주의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삼국시대의 저명한 멋쟁이인 조자룡은 정사에서 유비의 시위장수에 불과했고, 전공도 별로 뛰어나지 않지만, 각중 문자장난을 통하여, 수십개의 개인 일대일싸움의 사례가 날조되고, 마지막에는 촉한오호장이 된다(관련사료를 보면, 관우는 전장군, 장비는 우장군, 마초는 좌장군, 황충은 후장군이고, 조운은 그 반열에 들지 못한다)
악진의 용모는 우리가 <삼국지>에서 답안을 찾아볼 수 있다. "용모가 단소하고, 태조가 있는 곳에서 장하리로 되었다." "용모가 단소하다"는 것을 보면 악진의 용모가 출중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못생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키도 작고 추하다" 악진의 출신도 미비하다. "장하리가 되었다"는 것도 하층인물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못생기고 하층기질을 가진 인물은 자연히 나관중의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주관적인 감정으로 악진의 공적은 모조리 말살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손권이 갑옷을 버리고 도망치게 만든 합비전투에 대하여 <삼국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악진은 장료, 이전과 함께 합비에 주둔하고, 공격하는데 여러 공을 세웠고, 오백호를 받았다." 이를 보면, 이 승전은 악진, 장료, 이전 세 사람이 힘을 합친 결과이다. 나관중의 손에는 마지막에 "장료가 소요진에서 위세를 떨쳤다"로 바뀐다. 모든 공로를 장료 한 사람에게 몰아주었다.(아마도 그는 관우의 친한 친구였으므로, 그랬을 것이다). 악진은 아무런 이유없이 전투를 겁내는 인물로 그려진다(원래 악진은 담량이 크기로 유명했다). 이렇게 보자면, 고대의 여론의 목소리는 나관중 동지가 선택적으로 고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삼국시대 불패의 명장은 이상한 사람으로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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