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수선(高壽仙)
오래전부터 중국과 서방은 서로 약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유럽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중국에 대하여 언급한 사람은 기원전4세기에 살았던 고대그리스인 크테시아스(Ktesias)이다. 그는 중국을 "세레스(Seres)"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사국(絲國)'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유럽을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서한의 사학자인 사마천이다. 그는 장건등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여헌(黎軒, 로마제국)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했다. 그후 육로 해로가 개척되면서, 중국과 서방간의 교류와 이해는 더욱 깊어진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명나라이전까지는 서로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깊이가 없었다.
명나라 후기부터 많은 선교사, 상인,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며, 중국서양관계는 대규모의 실질적 접촉과 교류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그중 선교사의 활동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에 장기간 거주했고, '지식선교'의 방침을 지켰다. 중국인들에게 서방의 문화를 극력 소개하였는데, 특히 중국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근대과학지식이었다. 그 내용은 수학, 천문학, 지리학, 측회학, 기계제조학등 여러 방면에 걸친다. 동시에 그들은 역사가 유구한 중국문화를 유럽에 소개한다. 그 내용은 철학, 문학, 역사가 위주였고, 제지, 인쇄, 농업, 의약, 건축등의 과학지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방선교사가 중국에 온 원래의 목적은 이 오래된 땅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중국과 서양간에 상호이해와 인식의 교량을 놓은 것이다.
명청시대에 중국에 온 선교사는 그 수가 아주 많다. 지명도나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이탈리아적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利瑪竇)를 따를 자가 없다. 만력10년(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후, 만력38년(1610년) 북경에서 병사할 때까지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28년간 생활했다. 그는 사귀는 사람이 많았다. 위로는 왕공귀족부터, 아래로는 백성서민까지. 당시 중국각계의 유명인사는 거의 망라된다. 중국인들이 서방의 풍속습관과 신기한 사물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첫 문을 열어제킨 사람이다. 그는 근면하게 일을 했고, 글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중문으로 단독 혹은 공동으로 근 20여종의 저술을 남긴다. <<천주실의>> <<기인십편>> <<기하원본>> <<혼개통헌도설>> <<동문산지>> <<측량법의>> <<환용교의>> <<건곤체의>> <<교우론>> <<사자기적>>등이 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서방의 지식과 이념을 전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중국초기의 유럽관을 형성하는데, 마테오 리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전과 비교하여, 명나라말기의 중국인들은 유럽인에 대하여 인식과 이해가 깊이나 넓이에 있어서훨씬 넘어섰다. 당시 문헌에 유럽을 언급하는 글이 이전보다 훨씬 많이 등장한다. 파비 신부에게 보낸 서신에서 마테오 리치는 "현재 중국인은 많은 책에서 우리 유럽의 여러가지를 언급한다. 비록 그중 과장되어 사실과 다른 기재도 적지 않지만...." 이러한 기록들중 열에 일고여덟은 마테오리치에서 연유한 것이다. 정치입장, 학술관점, 접촉다소, 이해심도등 요인의 영향을 받아, 당시 중국인들의 유럽에 대한 견해는 비교적 잡다했다. 찬양하는 자도 있고, 질책하는 자도 있으며, 방관하는 자도 있었다. 경건하게 믿는 자도 있고, 거절하는 자도 있으며, 의심과 믿음이 반반인 자도 있었다. 천주교 교의에 대한 태도를 보면, 어떤 사람은 부활을 유학정신의 재현이라고 칭송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유학의 윤상을 부정한다고 멸시하기도 했다. 주류의 입장은 선교사와 접촉이 비교적 많은 개명한 사대부의 마음 속에는 유럽의 이미지가 긍정적이었고, 더 이상 야만적인 이국이 아니라 문명의 낙원이었다.
유럽으 이미지를 수립하는 방면에서, 마테오리치의 박학다식과 개인매력이 큰 역할을 했다. <<마테오리치중국예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연회에서, 마테오 리치와 불교고승 설랑대사간에 논증이 벌어지는데, 마테오 리치가 승리하면서, 예부상서 왕충명등의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원래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원래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야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내각대학사 심일관을 방문할 때, 마테오 리치는 그에게 서방의 풍속을 소개한다. 심일관은 서방의 혼인은 두 사람간에만 이루어지고, 황실도 그러하다는 것을 듣고는 연회에 참석한 다른 대신들에게 말하였다: "혼인이 이처럼 성결한 국가에서 다른 일들은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들은 모든 것이 제대로 규범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사대부들은 이를 통하여 직간접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유럽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하게 된다. 사조제는 <<오잡저>>에서 "천주국은 불국보다 더 서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문리에 통하고 우아하기가 중국과 다름이 없다." 서광계는 <<변학소고>>에서 천주교는 왕화(王化)를 도울 수 있다고 말하며, 유럽을 이상국처럼 묘사한다. "서양 인근 삼십여국은 이 종교를 봉행한다. 천수백년이래 지금까지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서로 도우고, 위와 아래가 서로 평안하며, 길에는 도둑이 없고, 밤에도 문을 걸어잠그지 않는다. 오랫동안 평안하게 통치된 것이 이런 정도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유럽관'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아니라, 유럽에서 초기에 '중국관'을 형성하게 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일기유고가 정리되어 출판된 후, '중서교류사의 새시대'를 여는 중요한 저작이 된다. 일부 서양학자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마테오 리치 일기>>는 유럽문학, 과학, 철학, 종교 및 생활측면에 영향을 주었는데, 17세기 다른 여하한 역사저작보다 그 영향이 컸다." "이 책은 처음으로 유업에 중국의 도덕과 종교사상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이 책을 통하여 중국성인 공자와 중국문화의 정수인 유가경전을 알게 되었다." 마테오리치의 중국에 대한 묘사는 상당한 기간동안 유럽인들의 중국에 대한 상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다.
<<마테오 리치 일기>>가 출판되기 전에, 유럽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들에게 고도로 이상화되고 신기한 색체의 이국이미지를 그려주었다. 마테오 리치 일기는 어느 정도 이 기조를 유지했다. 그는 중국문명을 크게 찬양하였고, '우리의 신성한 천주교 사상'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위대함이 세계에서 그 짝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서술한 이상은 중국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테오 리치가 마르코 폴로를 뛰어넘은 점은 어떤 것인가? 그는 중국 사회를 깊이있고, 자세하게 관찰했고, 가급적 객관적으로 중국의 여러 상황을 소개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유럽인들이 중국을 더욱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고귀한 소재를 제공했다. 비록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모두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마테오 리치는 중국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에는 중국붐(Chinoiserie)이 일어나는데, 적지 않은 정치가와 사상가들은 중국을 유럽사회를 개조하는 모델로 삼았다. 이 붐이 나타난 것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원인이 있다. 마테오 리치와 그 후계자들의 저작과 서산이 지식배경과 이념기반이 되었다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감스러운 점은 중국과 서방이 서로를 좋아하던 식대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세기말, 유럽의 중국붐은 신속히 식어간다. 2세기정도 중국문화에 대한 추앙을 지나, 유럽인들은 가혹한 태도와 증오의 눈길로 중국을 대하게 된다. 이렇게 '요마화된 중국'의 배후에는 식민자들의 탐욕과 야심이 숨어 있다. 서방의 오만과 편견은 특히 19세기 중엽이래 함선과 대포를 가지고 중국을 잠식하고 침략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중국에서의 서방인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나빠진다. 이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아직도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마테오리치가 북경에서 서거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그가 중국과 서방의 교류사에 끼친 거대한 공헌을 생각하며, 중국과 서방이 서로를 좋아하던 그 시기를 회고하면서, 중국과 서방이 모두 얻는 점이 있으면 좋겠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류오국(淸流誤國) - 대예의(大禮儀) (0) | 2012.08.15 |
---|---|
명나라와 서역(西域)의 관계 (0) | 2012.02.01 |
임진왜란: 명, 청, 조선의 관계변화 (0) | 2010.12.10 |
명나라멸망후 숭정제의 자녀들은 어디로 갔는가? (0) | 2010.11.29 |
명나라는 지나친 언론자유로 멸망했는가? (0) | 2010.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