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경제/중국의 부동산

베이징의 집값은 왜 10년간 10배나 뛰었는가?

by 중은우시 2013. 3. 13.

글: 소동(蘇東)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베이징의 집값이 항상 비쌌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1999년-2003년 사이에 베이징의 상품방판매가격은 한 때 확실히 하락한 적이 있다. 이전에는 1998년을 전후하여 베이징의 집값은 한 때 걸핏하면 평방미터당 8000위안-9000위안까지 하였다. 그러나, 2002년을 전후하여 텐통위안(天通苑), 휘롱관(回龍觀)의 많은 신규주택들은 구매자가 아무런 꽌시가 없더라도, 평방미터당 2000여위안이면 살 수 있었다. 심지어 2003년에 차오양구 청년로 일대의 신규주택 집값은 평방미터당 3,4000위안에 불과했다. 이런 집값을 싸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같은 기간, 전형적인 2급도시인 칭다오시지역의 집값은 보펴편적으로 평방미터당 5000위안가량(마찬가지로 과거 근 10년간 베이징의 집값은 6-10배가 뛰었는데, 칭다오의 집값은 겨우 2배가 올랐을 뿐이다.)

 

왜 그 당시 베이징의 집값이 쌌는가?

 

왜냐하면 당시 베이징의 토지공급량이 특별히 많았고, 신규주택의 수량이 특별히 많았기 때문이다. 즉, 주택공급량이 많았다.

 

베이징의 토지와 주택공급량이 최대였던 시기는 2000년전후이다. 비록 그 해의 주택공급량에 대한 데이타를 찾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 시기의 베이징 주택건설규모가 가장 컸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공급규모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도시가 계속 주도심지구 주변으로 확장하는 외에 새로 휘롱관, 텐통위안, 왕징, 통저우등 몇개의 당시에는 아직도 먼 교외지역이었던 곳을 완전히 참신한 주택지구로 변모시켰다. 그 4,5년의 시간동안, 베이징은 방대한 수량의 신규주택을 건설했다. 지금까지 당시에 대량으로 건축한 주택들은 베이징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이것이 그 시기에 베이징의 집값이 계속 내려가고, 집값이 특별히 쌌던 원인이다.

 

실제로, 베이징의 집값이 새로 대폭 상승한 것은 2005년을 전후해서이다.

 

당연히 이런 인상을 조성한 원인은 그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다. 2002년을 전후하여, 토지통제문제로, 베이징의 토지공급은 점차 주머니를 조이기 시작했다. 2년이 지나자 주택시장에서 이런 돌연한 공급감소의 결과는 신속히 나타난다. 시장에서 주택공급량이 격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04년을 전후한 때부터 베이징의 집값이 제1라운드의 급격한 상승기를 맞이하게 만든다.

 

베이징의 토지공급은 왜 줄이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여러가지 깊은 원인이 있다.

 

첫째, 국토자원부서는 엄격한 토지정책을 내놓았다. 엄격히 토지의 양도심사허가를 제한하고, 매년 매 도시에서 건설용지로 쓸 총량을 규제했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각지방정부는 토지양도에서 더욱 조심하게 된다. 더 이상 수요에 따라 대량으로 부지를 공급해주지 않았다.

 

국토자원부서의 토지통제행동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1997년이다. 항저우시는 토지준비센터를 성립시킨다. 그후 항저우의 전체 시토지는 국토관리부서가 통일적으로 독점적으로 통제했다. 엄격한 토지입찰경매제도를 실행했고, 일체의 수의계약양도행위를 금지시켰다. 2001년 11월, 항저우는 국토자원부서에서 전국 국유토지자본운영의 시범도시중 하나로 확정되고, 그후 항저우의 경험은 전국으로 확대보급된다.

 

이는 전국도시토지공급량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가장 중요한 하나의 정책이었다. 그 이후,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토지공급은 엄격한 감독과 통제를 받게 된다. 느슨한 토지공급정책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이후, 중국의 많은 도시의 집값은 계속 인상되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둘째, 원래의 부동산개발기업은 시급정부부서에서 토지를 받는 외에, 기타 경로를 통하여도 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주하는 공장지구, 철거이주하는 주택지구도 모두 개발상의 중요한 토지공급원이 된다. 초기에, 체제상 일부 현,진급 기관의 토지통제는 비교적 느슨했다. 그래서 많은 현, 진의 기구는 자신의 이러한 자주권을 이용하여 대량의 토지를 공급해주었다. 다만, 그후 나온 토지양도를 규범화하는 정책은 점차 이런 채널을 막아버린다. 이는 최종적으로 토지공급량이 감소되게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베이징에서 2002년을 전후하여, 서우촹(首創)집단은 아시아선수촌북쪽 원위허에 2500무의 토지에 상청국제화원을 건설한다: 주장지산은 통저우공업구에 3000무의 주장국제신청을 건설한다. 완커지산은 징통 헤이좡후에 5000무의 신규주택단지를 걸설한다. 모두 베이징시 산하의 구,현에서 받은 토지들이다. 이는 그 몇년동안 베이징의 주택개발량을 특히 많게 만들었고,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원인이다.

 

셋째, 2000년이전에, 국내에서는 개발구를 건설하는 붐이 일었다. 많은 지방에서는 개발구를 만들었는데, 그후 개발구라는 명의하여 대량의 토지를 공급했고, 건설용지로 이용했다. 그러나, 2001년을 전후하여 많은 매체에서는 대량으로 '개발구난립'현상을 성토하기 시작했고, 대량의 개발구가 취소된다. 남은 곳은 비록 취소되지는 않았지만, 개발구의 면적은 많이 축소되게 된다.

 

만일 개발구가 비준설립되면, 정책적으로 대량의 합법적인 건설토지를 출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을 이용할 수 없게 된 후, 직접 주택건설토지의 공급이 대량으로 감소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넷째, 이전에 각도시는 건축의 밀도에 대하여 특별히 엄격한 규정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택건설단위는 일반적으로 건축을 아주 밀집하게 지었다(이 점에 관하여, 중국 대다수 도시의 구도심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2000-2003년에 한편으로 정부의 창도와 요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일부 부동산업체가 고품질주택을 건설한다는 경영전략하에, 저밀도주택이 한때 상품주택건설의 주류가 된다. 이이하여 동일한 토지의 주택건설률이 하락하게 되고, 이는 그 이년동안 집값이 급상승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당시 많은 부동산업계 인사 및 관련정부부서는 구미 및 싱가포르등지를 고찰하고, 이들 '선진국가'의 주택욕적률 수준이 일반적으로 아주 낮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법칙을 어기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주택의 용적율을 낮추게 된다. 개발상에 있어서, 많은 개발상들이 그때 속속 저밀도주택을 만들 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낮은 용적율로 주택을 건설하는 것은 고급주택의 상징이었다.

 

많은 매체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 "사람의 거주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도시와 교외가 결합된 부분의 10대 교외거주집단의 계획을 강화해야 한다. 적절히 건축밀도를 통제하여야 한다...이미 완공된 왕징거주지구는 밀도가 너무 높다. 고층아파트가 난립해서 거주환경이 나쁘다. 당초 계획때 장기적인 안목이 결핍되어 있었다. 이후 교훈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관련 정부부서는 이렇게 말했다. "용적률이 1.3을 초과한 부동산프로젝트는 일률적으로 허가하지 않는다. 이런 엄격한 통제를 통하여 전체 거주환경이 제고된다."

 

베이징의 토지공급 긴축과 더불어, 직접적으로 신규주택건설이 감소한다.

 

이와 동시에, 베이징의 인구는 크게 증가한다. 원인은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지금까지도 계속 쏟라져 들어오는 외래인구이다.

 

우리는 모두 볼 수 있다. 매년 대량의 대학졸업생들이 베이징으로 와서 꿈을 찾는다. 갈수록 많은 외지인들이 이 거대한 도시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는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다. 중국은 시장경제환경하에서, 자원이 경제규칙에 따라 배분되고, 합리적으로 사용하게된 필연적인 결과이다.

 

다만 주택공급은 이들 외래인구의 유입속도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강경한 수요가 이끌면서, 베이징의 집값은 계속 신기록을 갱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