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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융중대>는 그다지 고명하지 않다.

by 중은우시 2013. 3. 13.

글: 서염(徐焰) 

 

"삼고빈번천하계(三顧頻煩天下計), 양조개제노신심(兩朝開濟老臣心)"

 

사람들은 제갈량을 언급하면, 왕왕 그가 유비를 도와 군사전략 <융중대>를 작성하여 "뛰아는 재주를 천하가 다 알고 있다(高才天下知)"고 알고 있다. <삼국연의>의 작자인 나관중은 그를 심지어 "만고의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만일 역사를 제대로 살펴보면, <융중대>에서 확정한 목표는 삼국할거가 아니라, 천하통일임을 알 수 있다. 이 전략의도는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사서를 숙독했던 마오쩌둥은 이렇게 평가했다: "그 첫 잘못은 융중대에서 시작한다. 천리나 떨어진 곳에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유비는 군대를 사천과 형주로 나누었다. 이는 양쪽에서 작전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를 어겼다. 이것이 바로 실패의 근원이다.

 

기원207년, 신야(新野)에 갇혀 있던 유비는 세번이나 찾아가서 제갈량을 감동시킨다. 나이 겨우 26살인 이 은사는 유비에게 계책을 바친다. 먼저 형주를 빼앗아 기반을 마련하고 다시 사천을 빼앗는 것이다. 다시 양로로 나누어 북진하여 천하를 다투는 발전방향이다. 이 천하대세를 갈파한 <융중대>는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길이 없었던 유비에게 구름이 걷히고 태양을 본 것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 계책을 실행한다. 그러나 실제로, 유비가 한때 성공한 것이 <융중대>때문이었지만, 유비가 결국 실패한 것도 <융중대> 때문이다.

 

<융중대>는 확실히 고명한 점이 있다. 고금의 전략가들은 이에 대하여 컨센서스가 이루어져 있다. 제갈량은 실력이 약소한 유비가 북방의 강적 조조와 직접 맞부딛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강동의 '지두사(地頭蛇)'인 손오가 양대에 걸쳐 마련한 근거지로도 진격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3단계' 전략방침은 주도면밀하지 못했다. 그중 첫번째로 형주를 탈취한 것은 피강격허(避强擊虛)의 원칙을 어겼다.

 

형주는 강한평원에 있고 하류가 교차한다. 조조의 군대와 동오가 모두 서로 다투는 곳이었다. 적벽지전에서 승리한 후, 유비는 형주를 통제한다. 관우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219년, 유비는 주력군을 이끌고 조조을 격파하고 한중을 탈취한다. 관우도 양양으로 진격하여 호응한다. 그 결과 군사력이 아주 약한 관우는 조조, 손권 양군의 협공을 받아 맥성으로 패주한다. 이때 유비의 주력은 한중에 있었다. 형주와는 천리나 떨어져 있었다. 적시에 지원할 도리가 없었다. 관우는 목숨도 잃고 땅도 빼앗긴다. 제갈량이 생각한 양로북벌은 바로 머리와 꼬리가 서로를 돌보지 못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3년후, 유비는 형주로 반격한다. 700리의 험관을 뚫었고, 전군은 극도의 피로에 지친다. 그리하여 결국 대패하고, 촉한의 쇠락은 이제 만회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오늘날의 전략연구원이 유비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다면, 당연히 근거지를 한중으로 선택하지 형주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한중은 신야에서 멀지 않고, 통치자 장로는 '오두미교'를 행하여 평민재산을 박탈하여 교의 재산으로 귀속시키고 화폐를 취소했다. 병이 나면 주술로 치료했고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이는 사교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전루력도 아주 약했다. 유비가 군대를 이끌고 점령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 남으로 사천을 칠 수 있다. 북으로는 농서를 차지할 수 있다. 그외에 제갈량이 막 초려에서 나왔을 때, 조조는 주력을 남하시켜 형주를 다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손권과 치열하게 싸울 것이었고, 유비에 유리했다. 아쉽게도 이 기회를 붙잡지 못한다. <융중대>가 나온 12년후 유비가 한중을 차지한다. 조조의 군대는 7,8년전에 이미 관중, 서경을 장악했다.  만일 유비가 먼저 서북을 통제했다면 강대한 기병을 건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하통일의 목표가 실현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제갈량은 이런 계책을 내놓지 못했다. 아마도 고대에는 정보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서, 서북, 서남의 형세를 잘 몰라서일 것이다.

 

중국고대를 살펴보면, 하나의 기본규율이 있다. 남북분열시에 북이 강하고 남이 약한 것이다. 동서로 분열되면 서가 강하고 동이 약하다. 그 근본원인은 동부와 남부는 말을 기르기 곤란하고, 기병이 없으면 육상전투에서 우세를 차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중에 제갈량이 북벌할 때, 위와 촉의 실력차이가 크게 된다. 사천의 산지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평원에서 위나라군대의 철기를 격파하기 어려웠다. 이 현상은 '국궁진췌"하겠다는 정신을 극도로 발휘하였으나 결국 '영웅의 눈물이 옷소매를 오랫동안 적시게' 만들었다. 전략적인 착오는 전투에서의 승리로 보완할 수 없었다. <융중대> 전략의 잘못도, 맹목적으로 혐자를 칭송하는 아름다운 문구로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