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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과 방통은 누가 더 총명한가?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이치아(李治亞) 

 

삼국연의는 지혜에 관한 책이다. 책에서는 여러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그렸다. 그중 족지다모(足智多謀)의 사람도 아주 많다. 비교적 유명한 사람은 와룡이라 불리는 제갈량과 봉추라 불리는 방통이다. 당시에 복룡봉추중 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유비가 제갈량과 방통을 모두 얻었을 때 자신감이 충만하여 천하를 병합하겠다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상 유비가 방통, 제갈량을 모두 얻은 후에도 여전히 천하통일을 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유비가 보기에 방통과 제갈량의 두 사람은 고하의 구분이 있었다:

 

첫째, 제갈량은 자신을 잘 선전했고, 명성을 추구했다; 방통은 묵묵히 말이 없었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제갈량은 융중에 은거할 때 매번 자신을 관중, 낙의에 비유했다. 그러나 방통은 말이 거의 없었고,  자신의 장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둘째, 제갈량은 천성적으로 미남이며 스스로 추녀를 택하였고, 이로써 명성을 크게 떨친다. 당시 명사의 반열에 오른다; 방통은 일찌기 동오의 육적, 고소등과 인물을 평가하면서 스스로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복의 요체를 람하는데 나는 일일지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제갈량은 부친이 일찌기 사망하여 숙부인 제갈현에 얹혀 살았다. 그러므로 독서하고 경전하면서 명망을 얻었다. 비록 스스로는 "난세에 생명을 구차하게 부지할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기실 그는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방통은 어려서 순박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마휘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방통은 아마도 그냥 조용히 지냈을 것이다. 당시 사마휘는 천하의 명사인데 낮과 밤을 같이 이야기 나눈다. 사마휘는 그를 이인으로 여겨서 남주사지 관면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점점 이름을 떨친다.

 

넷째, 제갈량은 자기선전을 많이 하고, 거기에 장인인 황승언의 추천이 있어, 유비가 아주 앙모했고 삼고초려하게 된다; 방통은 비록 제갈량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찌만, 자신을 마케팅하는데 능하지 못하여 유비나 손권이 모두 그를 별로라고 여긴다.

 

다섯째, 제갈량은 유비를 계속 시험한다. 유비가 한번 또 한번 오게 하면서 유비의 참을성을 시험했다; 방통은 손에 제갈량과 노숙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꺼내놓지 않았다. 나중에 유비에 의하여 뇌양현령에 임명하지만 여전히 그를 별로 대우해주지 않는다. 이는 소잡는 칼로 쥐를 잡는 격이다.

 

여섯째, 제갈량은 유비에 투신한 후, 계속 양초운송을 맡았다. 그의 직책은 소하(蕭何)와 유사하다. 그러나 방통은 뇌양현령에서 장비의 추천을 받은 후, 유비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게 된다. 서천을 공격하면서 여러번 좋은 계책을 내놓는다. 그의 역할은 유후 장량(張良)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유비는 제갈량에 대하여는 마음 속으로 약간의 거리낌이 있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부친처럼 제갈량을 대하라고 유언한다. 그는 부친이라면 절대로 아들의 권력을 찬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이다. 이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이엄으로 하여금 제갈량을 절제하게 한다. 제갈량은 유비가 살아있을 때는 개부(開府)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황제 유선에 대하여 여러번 질책하는 내용을 담았다. 실로 이는 신하로서 할 도리는 아니다. 어른이 아이를 훈게하는 듯하다. 방통이 죽을 때, 유비는 아주 슬퍼한다. 유비는 방통을 관내후로 추존하고, 시호를 정후(靖侯)라 한다. 그리고 그의 부친을 의랑(儀郞)으로 삼고 나중에 간의대부로 승진시킨다. 이를 보면 제갈량은 비록 지혜의 대명사이기는 하지만 방통과 비교하자면 조금 손색이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