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각조(胡覺照)
필자는 <출사표에서 한 것은 황제꿈이다>라는 글에서 이미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근거를 나열한 바 있다: (1) 남정에서 성도로 돌아올 때, 이미 '오석'을 받았다. 즉, 금부월 1병, 곡개 1구, 전후우보거 각 1부, 취고수 각 1대, 호분용사 육십명. 이것은 대신이 받을 대우가 아니다. (2) 제갈량은 촉국은사 두미(杜微)와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늘날은 조비에게 골치거리가 아주 많은 시기를 이용하여, 국문을 닫아걸고, 농경을 장려하여 민중들이 휴식을 하면서 힘을 기르고 양식과 돈을 축적하게 해야 한다. 동시에 장병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정비하여, 상대방에게 중대한 좌절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 때가 되어 다시 출병하여 토벌하면 장병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 민중도 고통을 겪지 않고, 중국은 통일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일하게 정확한 치국방략이었다. 그러나 얼마후, 북방에 서촉에 유리한 형세가 조성되지도 않았는데, 제갈량은 돌연 병력을 일으켜 북벌을 시작한다. 이에 대한 유일하게 합리적인 해석은 기습을 통하여 요행스럽게 성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를 소멸시킬 수는 없지만, 공훈은 세울 수 있다. 황제는 '오석'보다 높은 상사를 내려야 한다. 뛰어난 전공은 제갈량에게 더 많은 영예를 가져다 줄 것이며, 이는 황권으로 넘어가는 과도의 기초가 될 것이다. (3) 이엄은 제갈량에게 이런 편지를 쓴 바 있다. "신하의 도리에 얽매이지 말고' '구석(九錫) 받도록 권한다. '구석'은 주나라때부터 나타난 제도이다. 왕망이 구석을 받아 황권을 찬탈한 이후, 구석은 중신이 황위를 넘보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아주 불안정한 과도상태이다. 조조는 구석을 받아서 한적(漢賊)으로 욕을 얻어목고 있고, 주변에 여러가지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엄이 감히 이를 건의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런 흔적이 분명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최소한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을 할 분위기와 환경이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다. (4) 제갈량은 이엄에게 보낸 회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겸손의 말을 몇 마디 한 후에, "위나라를 소멸시키고, 황제 조예를 죽이고, 유선을 고도로 모셔간 후에 나는 여러분과 함께 승진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십석인들 못받겠는가. 하물며 구석이다. 구석만 해도 황위찬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석은 무엇인가? 당연히 직접 황위를 차지하여 대체하는 것이다. '찬위'는 정치에서 가장 기밀스러운 부분이다. 신중하게 해야 하는 일이고 가볍게 외부에 누설시켜서는 안된다. 한나라법률에 모역죄는 삼족을 멸하는 죄이다. 어떻게 "석이라도 받을 텐데 하물며 구석이야"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제갈량이 '십석'을 얘기한 것은 사양의 뜻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해석자의 선한 바램일 뿐이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5) 초주는 촉국의 현자이다. 그는 말을 더듬는다. 제갈량이 그와 애기할 때, 좌우가 모두 웃었다. 누군가 초주를 비웃은 자들을 처벌해야한다고 말했을 때, 제갈량은 이렇게 말한다: "고(孤)도 참을 수가 없었는데, 좌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전제사회에서 오로지 황제만이 칭고도과(稱孤道寡, 고, 과인이라고 부르다)할 수 있다. 삼국역사상 황제의 명호를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조, 손권(황제를 칭하기 전에)과 제갈량등 소수인만이 스스로를 '고'라고 칭했다. 동탁, 원소등도 스스로를 '고'라고 칭하지는 못했다. 나머지 삼공의 직위나 후작의 봉호를 가진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렇다. 고를 칭한다는 것은 황권을 멸시하고 황위를 노린다는 것을 표시한다.
<제갈량의 황제꿈은 이루기 힘들다>라는 글에서 비록 논술의 중점은 바뀌었지만, 세심한 독자라면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측면에서 제갈량이 유선을 대체하려 했다는 의도를 보충하기로 한다. (1) 익주, 탁주출신을 대표하는 이엄, 유염, 위연등을 탄압하고, 형주출신의 방파체계를 적극적으로 건립한다. 장완, 비위, 동윤, 곽유지, 양의, 마속, 향총, 강유등이 신속히 승진하는데, 이는 방파활동의 산물이다. 유비의 신 삼두마차를 개조하려는 설계이다. (2) 북벌이 아니면 제갈량은 성도의 승상부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그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다. 황제가 암중에 손을 쓸 우려가 있는 것이다. 전제정치는 모두 비밀정치이다. 음모정치이다. 표면적으로 군신일체로 상호칭송하지만, 그래서 그 아래에서의 권력투쟁과 암산을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선발제인(先發制人, 먼저 손을 써서 상대방으 제압한다)을 신봉한다. 대신은 다른 사람을 제압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제압당하든지 모두 여론에서는 불리한 위치에 놓은다. 관료사회를 오래 겪은 제갈량은 관료사회의 험악함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조조가 대본영을 버리고 업성으로 가고 그때부터 허창의 제도에 들어가지 않은 이야기를 본떠서, 승상부를 성도에서 천리나 떨어진 한중 면현에 둔다. 이때부터는 성도의 땅을 밟지 않는다. (3) 전제사회는 최대의 흑사회(조폭집단)이다. 민중은 흑사회의 착취,유린대상이다. 상대세력은 바로 흑사회가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이 최대의 흑사회중 누가 군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누가 우두머리인지가 정해진다. 군권을 가지지 못한 황제는 명목상의 황제이다. 그는 사람을 속이는 간판일 뿐이다. 북벌이 없다면, 제갈량은 병권을 이엄에게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제갈량이 가장 원치 않는 결과이다.
<출사표>에서 제갈량은 비록 "선제의 탁고의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우려하며 그 뜻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여 선제의 영명함에 손상이 갈까봐 걱정했다......신이 선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폐하에 충성하는 것이 직분이다." 비록 스스로의 공로를 언급한 후에 임금에 충성한다는 말을 하기는 했다. 실로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잘 썼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은 일찌감치 황제위를 대체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선에 대한 태도가 미묘했다. 개괄해보면 개략 다섯가지로 정리된다:
(1) 포위연금(包圍軟禁)
북벌전에 제걀량은 이미 성도에 형주출신의 고관 장완, 동윤, 비위, 곽유지, 향총등 심복을 배치하여, 유선을 엄밀하게 통제하기 시작한다. <출사표>에서 다시 한번 이 안배를 강조하고 당부한다. 즉, "내 생각에, 궁중의 모든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불문하고 모조리 곽유지, 비위, 동윤등의 동의를 받은 후에 시행할 수 있다. 군대의 모든 사항은 모두 향총의 동의를 받은 후에 시행한다." 여기서 제갈량은 성도의 승상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빠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승상부는 이미 심복인 장완과 장예(張裔, 이 사람은 비록 익주출신이지만 제갈량은 그에게 구명지은이 있다)가 주재한다. 황제가 더 물을 필요가 없다. 유선은 이미 국정에 간여할 권한이 없을 뿐아니라, 궁문을 나설 수조차 없었다. 제갈량의 사후인 건흥14년이 되어서야 도강언에 한번 간다.
(2) 보정불귀(輔政不歸)
가천하(家天下)의 봉건사회에 군주가 유약하고 세상일을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 그중 절대다수는 고명대신(顧命大臣)이 정권을 장악한다. 즉 보정(輔政)이다. 보정대신은 실제로 군주의 지위에서 일을 대신 처리하고, 군주가 비준하고 옥새를 찍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이다. 중국역사상의 주공(周公), 곽광(霍光)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보정은 엄격한 기간이 있다. 즉 황제가 만 18세가 되면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보정대신은 신하의 지위로 물러난다. 유선이 등극했을 때 17세였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다음 해에 유선이 친정하도록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유선이 '국사를 처리하는데 미숙하다'는 이유로, 건안12년 가을 그가 오장원에서 죽을 때, 즉 유선이 29살이 될 때까지, 제갈량은 시종 권력을 유선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정무를 장완, 동윤, 비위등에게 대신 처리하게 하여 자신이 한중 혹은 전방에서 원격조정하도록 하면서 유선이 친정하지 못하도록 한 원인은 무엇일가? 유선이 '국사를 처리하는데 미숙하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재능, 경험은 친히 수행하고나서야 성장하는 것이다. 익숙해지는 것도 경험이 있어야 한다. 경험하지 못하면 어떻게 익숙해지는가?
(3) 전기우익(剪其羽翼)
황권이 통치집단내부에서 공고히 되려면, 날개가 튼튼해야 한다. 유비가 설계한 신삼두마차의 깊은 의미는 탁주출신, 형주출신, 익주출신의 세 출신관리들이 상호 제약하고 상호 협력하도록 하면서, 그들을 제갈량, 이엄의 영도하에, 아들 유선의 날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익주출신 대표인물인 이엄에게 부여된 "내외군사를 통할'하는 병권을 박탈해버린다. 탁주출신의 대표인물인 유염(劉琰)은 '병력 천여명을 이끌고 제갈량을 따라다닐 뿐"인 별볼일 없는 인물로 전락한다. 제1차북별에서 익주출신의 또 다른 대표인물이자 노장이며 국구(國舅)인 오일(吳壹)도 버림받아 기용되지 못한다. 그리고 탁주출신의 대표인물이자 명장이며 공신인 위연의 건의를 무시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거슬려 마속을 '독전부(督前部)'하게 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형주출신인물들을 배양하는 외에 점차 유선의 날개를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4) 최훼신심(摧毁信心)
처음에 <출사표>를 읽으면 사람들은 왕왕 제갈량이 유선을 잘 보살피고 있다고 느낀다. 더더구나 그의 충군의 정에 감동한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이 표에는 선제를 언급하는 곳이 13군데나 된다. 유비라는 유령을 빌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끌어올리는 외에 부친을 빌어 아들을 압박하고, 유비를 빌어 유선을 질책한다. 몸도 이미 제갈량에게 연금되어 있고, 자신은 또한 혼나고 있다. 이런 황제가 친정을 할 자신감을 가지겠는가? 그저 걸핏하면 잘못을 지적당하니, 그저 말하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유선의 "정치는 (제)갈씨에게 있고, 제사는 과인에게 있다"는 명언이 있지만,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탄식일 뿐이다. 그가 이 명언을 말할 때, 아부(亞父)라고 부르지 않고, 승상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냥 '갈씨'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강렬한 불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씨'라는 것은 아주 공경스럽지 않은 경멸어이다. 투항후 "여기서 즐거우니 촉이 생각나지 않는다"(此間樂, 不思蜀)고 한 것은 오히려 구속에서 벗어난 심정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5) 양포죄약(揚布罪惡)
유염의 죽음 및 시신을 길거리에 전시한 것은 음미할만한 일이다. 건흥12년 정월, 유염의 처인 호씨(胡氏)는 입궁하여 태후에게 축하인사를 한다. <삼국지.유염전>의 기록에 따르면, "태후는 호씨를 일부러 남게 하여 한 달이 지나도록 궁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염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의 처는 젊고 예뻤다. 그래서 1달여동안 궁을 나오지 않은 원인을 유선과 간통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병사를 시켜 호씨를 구타한다. 어떤 병졸은 신발바닥으로 그녀의 얼굴까지 때렸다. 다 때린 후에 친정으로 쫓아보낸다. 호씨는 유염을 관청에 고발하고, 관청에서는 "병졸이 처를 때릴 수 없고, 얼굴을 신발바닥으로 쳐서는 안되었다'는 죄명으로 유염을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유염을 사형시킨 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길거리에 놓여져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이 사료는 3가지 점에서 자세히 따져보아야 한다. 첫째, 호씨가 1달여동안 황궁에 머물며 나오지 않은 원인이다. "태후가 특별히 남아있으라고 명령했다"고 하였는데, 태후가 그녀를 오랫동안 머물게 할 정당한 이유는 없고, 남겨두고 돌려보내지 않을 필요도 없다. 가능성중 아주 큰 것은 유선과 호씨의 사이에 애매한 관계가 있어 서로 떨어지려 하지 않았는데, 이 스캔들이 발생한 후, 태후가 나서서 아들을 위하여 변명거리를 만들어주며, 자신이 그 책임을 진 것이다. 둘째, 호씨는 원래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해야할 인물이다. 그런데 당당하게 전남편 유염을 관청에 고발하다니, 그 담량은 어디서 온 것일까? 황제와 간통한 것은 간통이 아니라,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분석한 것은 이런 류의 일의 경위를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촉국의 민중은 '1달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모두 이런 추측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소문 특히 황궁에 관련된 도색소문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추측을 지나치게 하면 했지 절대로 줄여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유염을 '기시(棄市)'한 것은 음미할 만하다. 봉건사회에는 '위존자휘(爲尊者諱, 윗사람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다. 이 일은 황제 유선에 관련된 일이다. 그저 큰 일은 작은 일로, 작은 일은 없던 일로 해버려야 한다. 절대로 시끄럽게 떠들며 해결할 일이 아니다. 유염과 같은 큰 인물을 처리하는데, '관청'이 절대로 혼자서 결정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반드시 제갈량의 승인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병졸이 처를 때릴 수 없고, 얼굴을 신발바닥으로 쳐서는 안되었다"는 것은 원래 사형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저 처를 때렸을 뿐이고,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다. 봉건사회에 남존여비관념이 뿌리깊은데, 고관이 처첩을 때려서 살해하더라도 대부분 죄가 되지 않았고, 더더구나 사형을 받을 죄는 되지 않았다. 제갈량이 아무리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더라도, 법정의 여러번에 걸친 보복살인을 추궁하지 않았다. 주보의 반란의 흔적이 나타났을 때도 이 일을 추궁한 방행부일문 5명의 책임을 물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변통에 능한 인물이다. 유담을 죽인 것은 이를 기화로 자신의 반대세력을 없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시하고 시신을 수습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기시의 본 뜻은 범죄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일벌백계하려는 것이다. 제갈량은 여권주의자가 아니다. 그저 이 일은 유선의 멍청함, 황당함, 호색함, 음란함의 추행을 널리 알리려는 것일 뿐이다. 진수(陳壽)는 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삼국지.유염전>에서 놀라서 한 마지 한다. "(유염)을 놀랍게도 기시했다." 여기서 '놀랍게도(竟)'라는 말은 제갈량의 법치라고 내건 간판에 구멍이 하나 뚫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세에 기시의 동기에서의 의문정을 자세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점이다.
본문에서는 제갈량이 유선에 대한 태도를 자세히 연구하였다. 이는 유선을 편들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흑사회에서 누가 우두머리가 될 것이냐의 싸움일 뿐이다. 여기서 붐녕히 할 것은 제갈량이 우두머리의 지위를 차지 하기 위하여 이미 심각한 인격분열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을 입이 따르지 않고, 입은 마음을 따르지 않으며, 행동은 말을 돌보지 않고, 말은 행동을 돌보지 않는다. 그러나 수천년의 전제사회에서, 비밀정치의 음모특징은 정치인물들이 이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모두 화려하고 허위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알릴 수 없는 정치적 목적을 감출 줄 알았다. <출사표>는 바로 음모정치의 전형이다. 봉건사회의 제왕장상들은 대부분 인격분열증을 겪는다. 특히 제갈량과 <출사표>를 분석하면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은 이를 눈치재지 못하고 그저 제갈량을 신격화 미화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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