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각조(胡覺照)
2007년에 제갈량의 황제꿈에 대하여 얘기한 이래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오히려 이들에게 묻고 싶다.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하면 왜 안된단 말인가?
전제사회에, 최고통치자가 백성들을 우롱하였고, 대대손손 '하늘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위에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정신의 속박을 받아왔으며, 온 나라가 모두 황가의 땅이자 재물이 되었고, 민중은 활가의 노예가 되었다; 황제를 위하여 살고 죽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역무도였고, 과형에 처해졌다. 삼천삼백삼십칠도를 밎고 3일간의 시간을 들여 죽인다. 이런 잔혹하고 야만적인 제도하에서,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면 당연히 십악불사(十惡不赦), 죄볼용주(罪不容誅)이다.
황제는 나라를 가장 사랑한다. 이것은 그의 목숨과 관련있기 때문이다. 그의 권력지위, 영화부귀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애국은 바로 그 자신 및 황실가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백성의 애국은 내재적인 동력이 결핍되었다. 자연히 애와 불애를 얘기할 필요도 없다. 내재적인 동력이 없지만 사랑해야 한다. 여기에는 뛰어난 우민의 기량이 필요하다. 이미 획득한 사회공권력과 공권력과 상응하는 부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한편으로 불만있고 반항하는 자들에게 피비린내나는 도살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위로부터 아래까지 충군애국의 이데올로기를 심어준다. 그리고, 충신(忠臣), 의복(義僕), 효자(孝子), 절부(節婦)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전제제도의 사회질서를 유지보호한다.
서진의 사마염은 황후 양염(楊艶)과 비인 양지당(楊芷堂) 자매를 사랑한다. 그래서 양염의 백치아들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가 나중의 진혜제이다. 백치가 좋은 황제로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서진의 권력자들은 충신이 나타나서 황제를 보좌해주기를 희망했다. 제갈량은 집정9년동안 찬탈한 기록이 없다. 자연히 서진의 조정에서 가장 바라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제갈량이라는 충신이미지를 수립시키고 후세인들이 본받도록 한다. <삼국지. 제갈량전>을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진수의 붓끝에서제갈량은 심각하게 끌어올려져서, 전기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는 사실로 지지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극력 칭송하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다른 인물의 전기의 서술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결점에 대하여는 거의 적지 않았다. 겨우 "치융(治戎)을 잘했으나, 기모(奇謀)는 약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수의 전략보다 뛰어났다."라든지 "매해 사람들을 동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여..."라고 적었다. 이를 제외하면 제갈량은 거의 완벽한 인물이다. 바로 이것때문에, 후세인들은 진수가 제갈량의 결점을 썼다고 공격한다.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곤형(머리를 삭발하는 형)을 받은 것을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삼국지. 제갈량전>의 탄생배경을 확실히 알고, 역대 통치계급이 충신, 의복, 효자, 절부이미지를 수립하려는 흉악한 의도를 확실히 안다면, 진실된 제갈량에 접근하는 사상적 기초를 갖춘 것이다.
충신은 악취를 풍기는 썩은 개념이다. 현대에 사람들은 마침내 확실히 알았다. 국가는 황제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황권은 사회공권력일 뿐이다. 전체 사회로부터 약탈해간 장물일 뿐이다. 당연히 전체국민에게 속해야 한다. 민중이 국가의 주인이다. 민중은 사회공복이 필요하다. 말그대로, 아무런 잡것이 포함되지 않은 공복이다. 양두구육의 개고기가 아니라. 현재도 충신, 의복, 효자, 절부의 이미지를 내세운다면 마음속에 흉악한 생각을 품은 간사한 무리가 아니라면, 시대의 낙오자이다. 전제사회의 환관의 지꺼기이다.
제갈량이 황제가 되려고 생각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없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실현하려는 욕망이 있다. 할거국면이 이미 형성되었으면, 유씨가 황제가 되었다면, 제갈씨라고 하여 황제가 못될 이유가 있는가? 탕무혁명이 발생했을 때, 당시와 후세의 문인들은, "천하라는 것은 천하인의 천하이다. 덕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고 변호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인식한 것이 아니다. 제갈씨는 자신을 닫초에 관중, 낙의와 같은 등급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위,권세의 변화와 더불어, 자신의 인생목표를 새로 정립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모든 개국황제가 처음에 사회에 나갔을 때부터 바로 황제를 목표로 삼았던가? 아니다. 모두 형세의 발전과 더불어, 지위,권력이 올라가면서, 욕망도 부단히 팽창한 결과이다. 사람이 욕망이 없다면 걸어다니는 고기일 뿐이다. 사회가 발전, 진보할 수도 없다. 전제사회에서, 황포는 단지 하나뿐이다. 황포를 걸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다. 왜 계속 왕조가 교체되는가? 전왕조의 부패타락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되고싶어하기 때문이다. 진승이 말하지 않았는가?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
곳곳에 붙어있는 광고간판을 보라: 황가호텔, 어화원식부, 황후반점, 왕자주가등등. 또 어떤 사람들은 낯간지러운 광고를 내놓기도 한다: "목당향을 먹으면, 황제도 되고 싶지 않다."등등. 왜 이렇게 많은 황실과 관련된 광고가 나올까? 이는 너무나 많은 중국인들이 머리 속에는 제왕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왕생활을 흠모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상층구조가 출현하지 않았고, 민주제도가 건립되지 않았는데, 제갈량이 왜 황제가 되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인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삼국연의>의 영향을 받아, 제갈량과 유선의 관계를 이상화했다. 자고이래로 군신관계는 아주 미묘하고, 변수도 너무 많다. 잔을 주고 받는 동안에 혈육아 튀는 사례도 부지기수이다. 그래서 역대이래로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한나라때의 예의규정에 따르면, 장수가 궁을 나설 때, 반드시 두 명의 칼을 찬 무사가 양쪽 팔을 붙잡고 끌어낸다. 만일 황제가 지시만 하면, 이 장수의 휘하에 얼마나 많은 병사가 있든지간에, 그리고 얼마나 황제와 분정항례할 힘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순식간에 절대열세로 바뀌게 되고 한 칼에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것이다. 조조가 한헌제를 도와 허창에서 등극하게 한 후, 한번은 황제를 접견하고 궁을 나설 때, 이런 '예우'를 받았다. 그때 조조는 놀라서 등에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얼굴은 흙색이 된다. 이때부터 승상부를 업군으로 올기고, 다시는 황제를 보러 가지 않는다. 명령이 잇더라도 멀리 피했다. 그후 동승, 복완의 두 차례에 걸친 조조를 겨냥한 정변이 모두 미수에 그친다.
제갈량이 탁고의 중임을 받아,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사실상 이미 유선과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 그는 당연히 이해관계를 잘 알았다. 승상부를 천리나 떨어진 한중 면현에 둔 것은 화를 피하려는 고려때문이다. 제갈량은 조조로부터 배운 것이다. 북벌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만일 정말 북벌을 준비한다면, 성도에 거주하는 것이 더욱 편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상정무를 처리하기도 편리했을 것이다. 사살상 천리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권력중심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제갈량이 주도면밀하게 생각하지 못해서 생긴 헛점은 아니다.
오늘 날에 이르러 독재자들이 충신이미지를 수호하는 것을 따를 이유는 없다. 유선과 제갈량간에 어느 한 편을 편들 이유도 없다. 역사를 읽는 목적은 사람의 지혜를 밝히기 위함이다. 역사를 읽는 것은 역사에서 유익한 경험과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다. 대전제는 역사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것이다. 엄이도령(掩耳盜鈴)은 역사를 학습하는데 가져야할 태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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