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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사후 유선(劉禪)은 어떻게 30년이나 황제로 있었을까?

by 중은우시 2012. 8. 15.

글: 복녕객(福寧客)

 

역대이래로 역사의 사건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이것은 원래 정상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최근 어떤 학자가 수호전의 108명은 모두 토비강도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많은 공격을 받는다. 기실 송황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공자는 상갓집 개이다. 이백은 무뢰배이다. 각도를 바꾸어 역사를 읽고, 고정적인 사고방식을 바꾸어 보아야 한다. 그다지 놀랄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시대의 변화는 누구도 막지 못한다. 여기서는 유선에 대하여 얘기해보고자 한다.

 

유선의 아명은 아두(阿斗)이다. 삼국시대 유비의 장남이다. 223년 유비가 병사하며 유선이 즉위한다. 역사상 유후주(劉後主)라고 부른다. 그는 촉국을 41년간이나 통치하였다. 유선의 기나긴 정치생애에서 '귀인'이 적지 않았다. 먼저 국궁진췌의 제갈량이 있고, 나중에는 장완(蔣琬), 비위(費褘), 강유(姜維)등이 보좌했다. 나관중으로부터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유선의 이미지는 아무런 공적도 없는 못난 군주중 하나이다. 심한 사람은 '망국의 혼군, 상방의 용인(亡國之昏君, 喪邦之庸人)"이라고까지 말한다.

 

유선은 정말 '일으켜줄 수 없는 아두'인가? 이처럼 멍청한 자가 어찌 41년간이나 황제위에 있을 수 있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 유선은 비록 웅재대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군주는 아니었다. 후주들 중에서 유선은 가장 무능한 자가 아니다. 남당 후주가 만일 몇 마디 사를 쓰지 못했더라면 그는 아두의 절반에도 못미쳤을 것이다. 유비, 제갈량과 같은 큰 스타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환경하에서 유선은 빛이 있더라도 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선이 촉국을 41년이나 통치했다는 것은 그의 남다른 뛰어남을 보여준다.

 

중국역사를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중국의 역대황제는 거의 모두 폭정을 하거나, 정치가 부패하거나, 환관이 농단하거나, 전쟁이 끊이지 않거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유선은 그들을 본받지 않았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가 임종전에 유선에게 당부한다: "너는 승상과 일을 하고, 그를 부친처럼 모셔라." 제갈량이 살아있을 대, 유선은 공명을 부친처럼 모셨고, 모든 일을 위임했고 간섭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모두 '승상의 뜻대로 처리하라'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마음 속에는 제갈량이 궁병독무(窮兵黩武)하여 계속 북벌을 고집하는 것에 대하여는 나름대로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 말하지 않았다. 유비의 가르침과 웃어른에 대한 존중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엄격하게 집행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부 지도층을 단결시킨 것이다. 내분을 일으키지 않고 지도층집단의 안정을 유지했다. 그 혜택은 결국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이중텐(易中天)은 품삼국(品三國)에서, '일으켜 줄 수 없는 아두'는 기실 아주 총명했다고 인정했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 유선은 즉시 승상제도를 페지한다. 장완에게 행정을 주관하도록 명하고, 비위에게 군사를 주관하도록 명한다. 원래 제갈량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둘로 나눈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장완이 죽은 후, 유선은 아예 스스로 국정을 처리한다. 이중텐이 보기에, 이것은 저능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왜 제갈량이 죽은 후 촉한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글을 올려 각지에 제갈량의 묘를 지어 제사지내게 해달라고 하여도, 유선이 계속 응락하지 않은 원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선의 생활이 사치향락에 빠졌을 때, 학자 주초와 노신 동윤이 글을 올려 삼가할 것을 권한다. 유선은 기껏해야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다. 화를 내며 사람들을 마구 죽이지 않았다. 후주 유선은 아마도 중국 역대제왕중에서 대신들에게 칼을 가장 적게 든 황제일 것이다. 이점은 보기 드문 일이다. 그리고 환관 황호가 있다. 그래도 무슨 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제갈량이 사망한 후, 유선은 여전히 촉국을 30년간이나 통치했다. 황권을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유지하면서 크게 혼란이 없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유선은 역사에서 평하는 것처럼 그렇게 못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63년, 위나라의 삼로대병이 병림성하(兵臨城下) 했을 때, 유선은 투항을 선택한다. 유선은 나약했고,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다. 그러나 도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유선의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이 전쟁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위나라에 투항한 기간동안, 유선은 세상사람들의 조소를 받는 "낙불사촉(樂不思蜀)"이 전고를 남긴다. 일대군왕으로서, 내 생각에 유선이 아무리 불민하더라도 이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유선은 높은 수준의 위장을 통하여 진나라의 사마소의 경계심을 무장해제시킨 것이다. 명철보신으로 살신지화를 당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완석이 아니다. 가상의 배후에는 유선이 멀리 서촉에 있는 부친의 망령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많이 촉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까? 그 슬픔을 누가 알아줄 수 있을 것인가? 위나라에 투항해서 8년을 지낸 후, 유선은 65세에 사망한다.

 

삼국시대에 유선이 이끈 촉나라는 계속 약세였다. 그러나 41년동안, 유선은 사람을 잘 쓰고, 정권을 안정시키고, 현실을 중시하고 체면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은 전쟁의 도탄을 겪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일으켜줄 수 없는 아두'가 할 수 있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