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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진후주(陳後主)와 장려화(張麗華): 홍안화수(紅顔禍水)인가?

by 중은우시 2013. 3. 13.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세상사람들은 모두 남조(南朝) 진(陳)나라의 귀비(貴妃) 장려화는 진나라를 망하게 만든 홍안화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후주가 만든 궁정가무곡인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는 망국지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당시인 두목(杜牧)은 유명한 <박진회>라는 시를 쓴다:

 

연롱한수월롱사(煙籠寒水月籠沙) 아지랭이는 차가운 강물을 감싸고 달빛은 모래를 감싸네

야박진회근주가(夜泊秦淮近酒家) 야밤에 진회하에 배를 대니 가까운 곳에 술집이 있다. 

상녀부지망국한(商女不知亡國恨) 술집아가씨들은 나라가 망한 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격강유창후정화(隔江猶唱後庭花) 강건너에서 여전히 옥수후정화를 부르고 있데

 

두목은 바로 진나라의 마지막 국왕인 진숙보(陳叔寶)와 귀비 장려화가 취생몽사하며 황음한 짓을 벌이다가 나라가 망한 이야기를 써서 당나라 관료사회의 부패와 황음을 풍자했다. 시에 나오는 후정화는 바로 진후주가 장귀비등 여러 후궁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놀 때, 만든 가무곡으로 망국지곡이라고도 칭하는 <옥수후정화>이다.

 

진숙보는 자가 문수(文秀)이고, 아명은 황노(黃奴)이다. 그는 남북조시기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왕조의 마지막 국군(國君)이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그를 진후주라고 칭한다. 4백년후, "문군능유기다수(問君能有幾多愁), 흡사일강춘수향동류(恰似一江春水向東流)"라고 쓴 바 있는 남당(南唐)의 이후주(李後主)의 망국처지와 극히 비슷하다. 남조의 위징(魏徵)은 진숙보에 대하여 나중에 널리 알려지고 또한 나중에 망국지군의 표본이 될만한 역사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후주는 구중궁궐에서 태어나고, 여인들의 손에 자랐다(生深宮之中, 長婦人之手). 국가는 절망적인 상태인데, 농사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지 못한다(不知稼穡艱難)....." 과연 장려화와 옥수후정화로 국가가 패망했을까? <진서>, <남사>, <자치통감>등 사서에는 모두 상세한 고증과 기록이 있다.

 

선제 태건14년(기원582년) 정월, 진선제 진욱(陳頊)이 병사하고, 태자 진숙보가 즉위한다. 즉위초기, 시흥왕 진숙릉이 반란을 일으키고, 진숙보를 벤다. 상처를 입은 후 새 황제 진숙보는 승향각(承香閣)에서 상처를 치료한다. 당시 모든 비빈은 황후 심무화(沈華)까지도 각에 들어가 병을 돌볼 수 없었다. 오로지 귀비 장려화만이 각에 들어가서 모실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태후(柳太后)가 여전히 극량전(極梁殿, 황후의 처소)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전혀 받지 못했던 심황후는 그저 구현전(求賢殿)에 따로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지덕2년(584년), 진숙보는 광소전앞에 임춘, 결기, 망선의 세 각을 추가한다. 삼각은 모두 높이가 수십장에 이르고, 수십칸에 이른다. 창문이나 벽, 난간등도 모두 침향목으로 만들었고, 금옥으로 장식했으며, 구슬과 비취를 박아넣었다. 바깥에는 주렴을 두르고, 안에는 보석침상과 보석휘장을 설치했다. 모든 복식과 물건은 진기한 보물들이었다. 이는 고금에 없었던 정도였다. 매번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면 향기가 몇리에 걸쳐 맡을 수 있었고, 햇볕이 내리쬐면 후정은 빛이 넘쳤다. 각의 아래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기화요초를 심어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진후주는 스스로 임춘각에 머물며, 장귀비가 결기각에 거주했다. 공귀빈(龔貴嬪), 공귀빈(孔貴嬪)의 두 귀빈이 망선각에 거주했다. 각과 각 사이에는 복도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왕미인, 이미인, 장숙원, 설숙원, 원소의, 하첩여, 강수용등의 미인들이 모두 총애를 받았다. 모두 돌아가면서 진후주의 새거소로 불려갔다.

 

복야 강총(江總)은 비록 재보(宰輔)이지만, 정무를 돌보지 않고 매일 도관상서 공범, 산기상시 왕차등 문사 10여명과 각에 들어가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서로 놀리고 존비의 서열은 전혀 없었다. 이를 '압객(狎客)'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궁인 원대사(袁大舍)등은 글을 잘 알았고, 시가를 쓸 수 있었다. 진후주가 '여학사'로 칭하며 매번 연회를 열면여러 총희비빈, 여학사 및 여러 압객이 모여들었다. 술잔이 날아가며 취하면 시사를 지어서 서로 화답했다. 후주는 사부를 잘 지었다. 그리고 그중 특별히 잘 지은 시사를 골라서 곡을 붙였다. 자색이 아름다운 궁녀 천여명을 골라서, 연습하고 노래부르게 했다. 후세에 전해지는 곡으로는 <옥수후정화>, <임춘락>등이 있다. 대부분은 장려화, 공귀빈의 자색을 칭찬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두 구절은 "망월야야만(望月夜夜滿), 경수조조신(瓊樹朝朝新)". 임금과 신하가 매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아침부터 밤까지 보냈고 이것이 일상이 된다.

 

장귀비의 이름은 장려화이다. 원래 군인집안 출신인데, 집안이 가난하여, 처음에 공귀빈의 시녀가 된다. 후주가 태자로 있을 때 눈에 들어 총애를 받는다. 얼마후 나중에 태자가 되는 진심(陳深)을 낳는다. 후주가 즉위하자 귀비가 된다. 장려화는 머리카락이 칠척이나 되었으며, 검기가 칠흑과 같고, 밝기는 물건을 비출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의 얼굴은 아침 아지랑이 같았다(面若朝霞). 피부는 백설과 같고, 눈은 추수와 같고, 눈썹은 먼 산과 같으며, 매번 바라볼 때는 빛이 눈에서 넘쳐났고 좌우에 비추었다. 자주 결기각 위에 기대고 있으면 선녀가 인간세상에 하강한 것같았다. 귀비는 성격이 총명하고 약삭바랐다. 말재주가 있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다른 사람의 안색을 잘 살폈다. 후주는 황음하고 주색을 좋아하여 자주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백관들이 아뢴 것에 대하여는 자주 환관 채탈아, 이희도를 통하여 전했다. 후주는 특히 부드러운 탑(榻)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귀비가 그를 안아서 무릎에 눕히고 함께 가부를 결정했다. 이, 채는 올린 글을 다 기억하지 못하곤 했는데, 귀비는 하나하나 차례대로 대답했고, 하나도 빠트리는 일이 없었다. 귀비는 궁녀와 내시들을 회유하는데도 능했다. 태감이든 궁녀이든 모두 귀비가 너그럽고 덕이 있고, 현명하다고 칭찬했다. 후주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후궁중 가장 윗사람이 된다. 처음에 귀비는 그저 후궁의 일만 장악했으나, 나중에는 정치에까지 간여한다. 귀비에게 부탁하면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강남조정에서 장귀비가 있다는 것만 알지, 진숙보가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진나라의 상하에 문관무관은 해체되고, 선비와 서민들도 마음이 떠난다. 나라가 망하는게 멀지 않았다.

 

정명2년(588년) 겨울, 십월, 야심만만하게 화하를 통일하려는 수나라의 주인 양견은 진숙보가 강남에 끼친 해악을 20대죄상으로 열거하면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칙서를 내려 강남에 격문을 내린다. 천명에 순응하여, 백성을 위하여 죄인을 벌하고, 진나라를 토벌하여 백성을 구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진왕 양광을 행군원수로 명한다. 좌복야 고영은 원수부장사가 된다. 우복야 왕소는 사마로 삼는다. 육로대군 합계 51만병마를 보내 진나라를 토벌한다. 수나라군대가 호호탕탕하게 강을 따라 내려올 때, 진숙보는 장강의 천험으로 수나라병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대로 대비하질 않는다. 매일 여전히 압객, 비빈들과 술을 마시고 놀았고,  시가를 계속 지었다. 수나라군대는 파죽지세였다.금방 진나라의 도성인 건강(지금의 남경)성밖까지 밀고 온다. 이때 건강성내에는 갑사 10여만명이 있었다. 가련하게도 진숙보는 겁이 많았다. 군대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주야로 울기만 했다. 표기대장군 소마하가 전투를 청하자, 허가하지 않는다. 며칠을 끈 다음 다시 군대를 출전시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정명3년(589년) 봄, 정월, 수군은 건강성을 공격해 들어간다. 수나라장수 한금호는 황궁의 후당 경양전의 우물에서, 우물아래에 숨어있던 진후주와 함께 묶여있던 장귀비, 공귀빈을 함께 끌어올린다. 진후주는 이런 사상 가장 바보같은 방식으로 수나라군대의 포로가 된다. 이때부터, 화하를 3백년간 어지럽혔던 난국이 끝나게 된다.

 

진왕 양광은 일찌감치 장려화의 미모를 들었다. 급히 진왕부의 기실 고덕홍(高德弘, 고영의 아들)을 파견하여 먼저 입성한 고영에게 알린다. 반드시 장려화를 남겨두라고. "고영이 말한다. '예전에 태공(상나라를 멸망시킨 강자아 즉 강태공)는 얼굴을 가리고 달기를 참했다. 지금 어찌 장려화를 남겨둘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는 청계(淸溪)에서 참한다. 고덕홍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양광은 얼굴색이 변한다 그리고 말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덕이 없으면 보답이 없다고 하더니, 나는 반드시 고공에게 보답하겠다.; 그래서 고영을 미워하게 된다." 장려화의 죽음은 가장 자주 보는 것이고, 망국의 책임을 원래 군왕에 의존하던 약한 여자에게 미루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어찌 알았으랴. 만일 진후주가 없었더라면, 장귀비가 어찌 있겠는가? 만일 사치음란이 없었다면, 어찌 옥수후정화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때이후 자려화는 세상사람들이 모두 아는 홍안화수의 전형이 된다. 그리고 옥수후정화는 망국의 곡의 전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