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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사마소: 삼국시대 가장 노련한 모사

by 중은우시 2013. 8. 17.

이치아(李治亞)

 

삼국시대 후기, 조위의 사마의는 위나라를 대체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자 했다. 그의 두 아들도 노모심산했다. 사마의가 죽은 후, 조위의 대권은 점차 사마씨에게 잠식된다. 사마사(司馬師)가 죽은 후, 사마소는 더더욱 용상에 앉고 싶어했다. 그러나 서쪽에는 촉한이 있고, 동쪽에는 동오가 있다. 국내에서도 사마소는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조위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병법을 잘 알았다. 예를 들면, 등애(鄧艾)와 종회(鍾會)가 그들이다. 어떻게 하여야 내부를 안정시키고 외부도 처리할 것인가? 이것을 위하여 사마소는 온갖 머리를 다 짜냈다. 그리고 얼마후에 방법을 찾는다.

 

아래에는 간단히 등애와 종회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먼저 등애를 애기해보자.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고, 병법에 능했으며, 내정에도 업적이 많았다. 위나라에서 종합적인 능력으로 가장 강한 장수였다. 출신은 좋지 않았다. 어려서 소를 길렀다. 그러나 항상 군사를 연구하기를 좋아했고, 고산대천을 만나면, 그곳의 지형을 관찰하고 군영을 둘 장소를 생각하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조소를 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얼마후, 태위 사마의가 그를 인정한다. 그리하여 남안태수를 맡는다. 나중에 공로로 연주목의 직책을 맡는다. 어떤 지방에서는 농업생산을 중시하지 않고, 교유하고 청탁을 즐기고, 화려하나 실질은 없는 것을 보고는 상소를 올려 건의한다: "국가에서 시급한 것은 오로지 농업과 전쟁이다. 국가가 부유해야 병력이 강해지고, 병력이 강해져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농사는 전투승리의 근본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먹을 것이 충분해야 병력도 충분해진다(足食足兵)"라고 했다. 먹는 것이 병사보다 앞이다. 위에서 작위를 두어 권하지 않으면, 아래에서는 재부를 모으는 공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지금 실적을 평가하여 상을 주는데, 곡식을 모으고 백성을 부유하게 한 것을 따진다면, 교유의 길은 막히로 부화(浮華)의 기풍도 없어질 것이다."

 

종회도 인물이다. 그는 명문의 후예이고, 유명한 미남이다. 부친은 조정의 고위관직을 지냈고, 지위가 태위에까지 이른다. 종회는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장량과 같은 인물로 칭해진다. 모두 그에게 왕좌지쟤(王佐之才)가 있다고 말했다. 나중에 황문시랑, 동무정후가 된다.

 

사마소가 군신들에게 촉한을 멸하도록 지시한다. 등애에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적도(지금의 감숙성 임조)로 진군하게 하여 촉한의 대장군 강유를 묘중(지금의 감숙성 주곡 서북)에 주둔한 주력을 견제하도록 만든다. 옹주자사 제갈서는 3만여명을 이끌고, 무도(지금의 감숙성 성현 서북)으로 진군하여 강유의 퇴로를 차단한다; 종회는 주력 10여만명을 이끌고, 빈틈을 타서 한중을 취한다. 그후에 성도로 곧바로 진격한다. 정위 위관을 진서군사마, 지절감등애,종회군사로 삼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사마소는 비록 등애, 종회로 하여금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지만, 위관을 보내어 그들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불측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하여.

 

과연 등애와 종회는 모두 항룡복호의 고수들이다. 당연히 촉국의 장위도 아주 대단한 고수이다. 전투가 치열한 단계에 접어들자, 종회는 퇴각할 생각을 한다. 중요한 때, 등애가 군대를 이끌고 음평에서 경곡도를 따라 전진한다. 남으로 검각에서 이백여리를 나온다. 종회는 부장 전장등을 파견하여 뒤따른다. 등애는 군대를 이끌고 샛길을 올라 산길을 열고 도로와 다리를 만든다. 칠백여리의 사람이 살지 않는 험한 곳을 지난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다. 그래서 아주 험준했다. 도중에, 양식운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여러번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부대가 마각산을 나서자 도로가 끊긴다. 일시에 나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등애는 솔선수범하여 담요를 둘러싸고는 언덕을 굴러내려간다. 등애는 군대를 이끌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강유에 도착하여 수비장수 마막의 항복을 받아낸다. 마막이 투항하자, 등애는 그 기회를 틈타 면죽을 점령한다. 촉장 제갈첨 및 상서 장준등을 참한다. 그 제갈첨은 원래 제갈량의 후손이다. 일시에 등애의 명성은 신격화된다.

 

얼마후, 등애는 승기를 틈타 진격한다. 사기를 올려 낙현을 함락시킨다(지금의 사천 광한 북쪽), 그리고 성도를 압박한다. 촉의 후주 유선은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대세가 기울었다고 보고, 투항파의 권유하에 사람을 보내어 황제의 인수를 바친다. 그리고 등애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을 청한다. 유선의 투항은 등애는 득의양양하여 망자존재(妄自尊大)의 지경에 이른다. 그는 함부로 동한의 장군 등우의 이전 방식을 쫓아, 천자의 명의로 관리를 대거 임명한다. 그는 유선을 행표기장군, 촉태자를 봉거도위, 여러 왕은 부마도위로 임명한다; 촉의 여러 신하들에 대하여는 그 지위고하에 따라, 그들을 조정관리로 임명하거나 그들에게 자신의 속하로서의 직무를 맡게 한다. 이것은 또 다른 장군인 그의 상사 종회의 불만을 산다. 그래서 암중으로 사마소에 글을 올린다. 등애에게 모반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은 조서를 내려 감군 위관으로 하여금 등애 부자를 체포하게 한다. 이때 사마소가 더더욱 방비한 것은 종회였다. 심복인 가충으로 하여금 1만의 보,기병을 이끌고 촉으로 들어가서 낙성을 점령하게 한다. 그후 친히 10만대군을 이끌고 장안에 진주한다. 이리하여 종회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종회는 비록 위나라군대의 모든 장령을 붙잡고 있고, 사마소를 폐출시킨다는 소위 태후유조(太后遺詔)돟 내보인다. 촉나라의 투항한 장수 강유는 종회를 종용하여 여러 장수를 죽이게 한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 종회를 죽이고 촉한을 회복하려 한다. 종회가 망설이는 바람에 소식이 누설된다. 십팔일 정오, 호군 호열의 아들 호연이 무리를 이끌고 북을 치며 나온다. 각영의 관병은 본부장령을 구하기 위하여 함께 호응하여 물밀듯이 촉궁으로 쇄도한다. 그리고 궁내에 구금되어 있던 장수들이 나와서 부하들과 회합한다. 쌍방은 궁성내외에서 격전을 벌인다. 강유, 종회 및 부하 수백명을 참수하고, 촉태자 유선과 강유의 처를 죽인다. 위나라군대는 대거 약탈하고, 나중에 감군 위관이 국면을 안정시키고 수습한다. 그는 등애모함에 참여하였으므로, 호군 전속으로 하여금 등애부자를 쫓아가서 면죽에서 죽이게 한다(지금의 사천성 덕양). 등애의 낙양에 있던 나머지 아들들도 주살된다. 등애의 처와 손자도 서역으로 유배를 간다.

 

이제 두 명의 촉을 멸하는 과정에서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은 인성이 추악함으로 서로 공격하거나 혹은 망자존대하다가 찰나간에 부귀영화가 허망하게 되어 버린다. 더더욱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은 노모심산의 사마소이다. 그는 모든 것을 통찰했고, 두 사람을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놀았다. 그들에게 공을 세우게 한 다음 그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삼국시대의 가장 노련한 모사라 할 만하다. 부친 사마의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