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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왕도(王導): 중국고대의 황상황(皇上皇)

by 중은우시 2011. 12. 28.

글: 월초(越楚)

 

유우석(劉禹錫)은 일찌기 이런 시를 지었다:

 

구시왕사당전연(舊時王謝堂前燕)

비입심상백성가(飛入尋常百姓家)

 

옛날에 왕씨,사씨같은 고관대작의 집앞에 둥지를 틀던 제비가

지금은 보통 백성들의 집으로 날아든다.

 

여기서 "사(謝)"는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이고, "왕(王)"은 바로 동진의 조야에 권력을 휘둘렀던 왕도(王導)이다.

 

중국역사상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신하들의 이름은 줄줄이 열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한의 곽광, 왕망, 동한말의 동탁, 조조, 그리고 위나라의 사마씨, 명나라의 위충현, 청나라의 도르곤등이 있다.

 

그러나, 이 왕도는 동진왕조를 만들어낸 개국공신일 뿐아니라, 원제(元帝), 명제(明帝), 성제(成帝)의 세 황제를 좌지우지하며 이십여년간 조정의 권력을 독단하였다. 그렇게 사마씨(司馬氏) 조손 3대와 "왕여마, 공천하(王與馬, 共天下,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하였으니, 중국고대의 진정한 '황상황(皇上皇,. 황제 위의 황제)'라 할 수 있다.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서진(西晋) 말기, 사마의(司馬懿)의 증손인 사마예(司馬睿)는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에 나와서 주둔했는데, 현지의 선비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당시 안동사마(安東司馬)의 직에 있던 왕도는 책략을 써서, 남방의 사족(士族)들이 사마예를 따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북방에서 남으로 이주해온 사족들의 추대를 받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 황실을 재건하는 대업을 도모한다.

 

사마예는 완전히 왕도에 의존하여 정국을 유지했고, 일찌기 왕도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대는 나의 소하(蕭何)이다"

 

백관들은 왕도를 존칭하여, "중보(仲父)"라고 불렀다.

 

서진이 멸망한 후, 왕도는 무리를 이끌고 317년 사마예를 진왕(晋王)으로 추대한다. 얼마후 진왕을 황제를 칭하니, 바로 원제이며, 역사에서 동진이라고 부르는 왕조가 시작된다.

 

사마예는 마음 속으로부터 왕도가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준 것에 감사했다. 그리하여 왕도를 재상에 임명하고,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게 한다. 그리고 왕도의 당형인 왕돈(王敦)에게 도독육주군사(都督六州軍事)를 맡겨, 군권을 장악하게 한다. 나머지 중요한 관직도 대부분 왕도의 가족이 담당했다.

 

동진정권의 초창기는 실제로 왕도와 사마예가 공동으로 집권한 시기이다. 무대위에서 연기하는 것은 황제이지만, 무대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왕도이다.

 

그런 고로, 사마예는 등극대전때, 여러번 왕도에게 자신과 함께 어좌(御座)에 앉아 함께 군신의 하례를 받자고 청하였다. 왕도는 그러한 명을 강하게 사절한다.

 

당시에 유행한 말이 바로, "왕여마, 공천하"였다.

 

왕도는 진나라황실에 대하여 충성심이 강하였다. 서진이 멸망했을 때, 왕돈등 왕씨일족에서는 천하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황제로 앉히고자 했다. 그러나, 왕도가 나서서 고집하는 바람에 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제 사마의는 황위가 안정되자, 마음 속으로 "왕여마, 공천하"에 대하여 불만을 품게 된다. 하물며, '왕'이 '마'보다 앞에 놓여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원제는 유외(劉隗), 조협(協)을 심복으로 기용하며, 점차 왕도를 멀리한다. 그 의도는 왕도의 세력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왕도는 영욕과 진퇴를 잘 처리하여, 일처리마다 양보하며, 유외와 정무를 나누어서 맡았고, 스스로 양보했다. 그러나 그의 심고기오(心高氣傲)의 족형인 왕돈은 난을 일으키게 된다. 무창에서 거병하여, 유외를 격파하고 건강으로 진입하여 조협도 주살한다.

 

원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안동장군으로 있던 때의 절(節)을 왕도에 수여하고, 왕도로 하여금 나서서 왕돈의 철병을 권하도록 부탁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다시 왕도가 통제하게 된다.

 

원제는 왕도의 세력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명목만 천자이지, 자신의 명령은 궁문 밖에는 미치지 않았다. 그는 우울함이 병이 되어, 6년간 명목상의 황제로 지내다가 결국 병사한다.

 

명제 사마소(司馬紹)가 황제위를 이은 후, 왕도는 사도(司徒)로서 조정을 보좌한다. 원제 사마예는 원래 태자였던 사마소를 내쫓고자 했다. 그러나, 왕도가 밤낮으로 강권하여, 사마소는 태자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왕도는 명제에게는 대은인인 셈이다.

 

그후, 왕돈은 병든 몸으로 군대를 이끌고 건강으로 와서 명제의 황제위를 빼앗으려 한다. 명제는 왕도에게 절장(節杖)을 하사하여 군대를 이끌고 왕돈의 난을 평정하도록 한다. 명제는 왕도를 태보(太保) 겸 사도로 승진시키고, "검리상전(劍履上殿), 입조불추(入朝不趨), 찬배불명(贊拜不名)"의 예우를 해준다.

 

명제는 재위 겨우 3년만에, 급병으로 사망한다. 왕도는 유조를 받들어, 유주 성제(成帝)를 보좌한다. 왕도는 우개(羽蓋)를 수여받고, 악대를 데리고 다니며, 검을 찬 20명이 호위하는 특수한 예우를 받는다.

 

성제 사마연(司馬衍)은 4살때 즉위하며, 어렸을 때는 매번 왕도를 만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군신간의 예가 완전히 전도된 것이다.

 

성제는 매번 왕도에게 조서를 쓸 때면, 매번 "황공하게도 말씀드립니다(惶恐言)"라는 말을 덧붙였다. 중서성에서 왕도에게 글을 올릴 때에고, "경문(敬問, 공경하여 묻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일종의 제도로 굳어지게 된다.

 

그후, 매번 원정대전때 왕도가 조당에 들어오면, 성제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당시에 큰 가뭄이 들어서, 백성들이 기아에 시달리게 되어, 왕도는 사직한다. 성제는 졸지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급히 조서를 내려서 왕도의 사직을 불허하고, 시중 이하 관리를 집단적으로 왕도의 집으로 보내어 왕도에게 마음을 돌리도록 권유한다.

 

왕도가 병이 깊어 조정에 나올 수 없을 때, 성제는 친히 군신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왕도에게 여(輿)를 타고 조정에 나올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이를 보면 왕도에 대한 존경이 극도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 해는 왕도가 조정의 창고를 살펴보다가, 창고가 비어있고, 겨우 수천의 단속(端綀, 베)만이 있고,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조정은 돈이 없었다. 왕도는 조정의 고관대작들에게 속포단의(綀布單衣)를 입도록 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입었다.

 

선비들도 속속 이를 따라하게 된다. 그리하여 속의 가격이 졸지에 급등한다. 왕도는 주무관리에게 명하여 창고의 속을 내다 팔도록 한다. 그리하여 창고의 단속을 비싼 가격에 내다팔 수 있었다.

 

동진의 조야가 왕도를 얼마나 존경하고 숭배했는지는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도는 64세때 병으로 사망한다. 성제는 조당에서 3일간 애도하고, 대홍로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왕도의 장례를 처리하게 한다. 한나라때 박륙후와 안평헌왕의 규격으로 하며, 장례에 쓸 차마의금(車馬衣衾)을 하사한다. 하관때는 구유상거(九遊喪車)등을 하사한다. 앞뒤로 우개(羽蓋)를 세우고, 악대가 북과 피리를 연주하고, 무관 100명이 검을 들고 따른다. 시호를 '문헌(文獻)'이라 하고 진나라황실의 태뢰(太牢)에 제사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