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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풍속

단오절과 관련있는 6명의 중국고대인물

by 중은우시 2012. 6. 18.

글: 이자지(李子遲)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단오절은 2006년 중국의 제1차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이 되고, 2009년에는 세계 비물질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역사상 단오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들은 누구일가? 그리고 기념할 가치는 있을까?

 

첫째는 자연히 초나라의 애국대시인이자, '중국문학의 아버지'인 굴원(屈原)이다. 몇년전 매체에서 단오절 기원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는데, 결국 표준답안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많은 연구자들은 단오절을 사람들이 굴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쟁과정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가능성을 보았다. 굴원은 유엔이 확인한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계문화명인중 한 명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오절을 주로 굴원을 기념하는 명절이라고 생각한다. 굴원은 진나라의 침입에 초나라왕이 무능하여 자신이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게 되자, 현실에 절망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밝히고자 했다. 그래서 오월 오일(원래 초나라의 전통명절이다), 유배된 호남의 멱라강변에서 큰 돌을 끌어안고 물 속으로 몸을 던져 자결한다. 후세인들은 이 날을 단오절로 기렸고, 이 날에 용주(龍舟)시합을 벌이고, 종자(粽子)를 먹고, 애엽(艾葉)을 걸었으며, 웅황주(雄黃酒)를 마셔서 굴원을 기념했다. 당나라때 문수(文秀)의 <단오>라는 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절분단오자수신(節分端午自誰信), 만고전문위굴원(萬古傳聞爲屈原), 감소초강공묘묘(堪笑楚江空渺渺), 부능세득직신원(不能洗得直臣寃)". 이 동방의 풍속은 나중에 이웃나라인 한국, 일본, 버마, 월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등 여러 나라에 전해졌다. 지금 이 날은 중국의 '시인절'로 확정되었다.

 

둘째는 춘추말기 오나라의 대부이자 군사가인 오자서(伍子胥)이다.오자서는 원래 초나라 사람이었다. 부친과 형님이 모두 초나라왕에게 피살된다. 그는 그래서 초나라를 버리고 오나라로 망명한다. 그리고 오나라를 도와서 초나라를 친다. 다섯번 싸워서 초나라 수도로 진입한다. 당시 초나라왕은 이미 죽었다. 오자서는 무덤에서 시신을 파내어 채찍찔을 300대 하여 부친과 형님의 원수를 갚았다. 오왕 합려가 죽은 후, 아들 부차가 즉위한다. 오나라군대는 사기가 높았고, 백전백승이었다. 월나라도 대파한다. 월왕 구천이 화친을 청하자 부차는 이를 응락한다. 오자서는 월나라를 철저히 없애버리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부차는 듣지 않는다. 오나라의 대신인 백비는 월나라의 뇌물을 받아 오자서를 모함하고, 결국 부차는 오자서에게 검을 내려 자결하게 한다. 오자서는 원래 충신이자 양신이었고,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결하여 생을 마친다. 부차가 사람들 시켜 시신을 가죽에 싸도록 했고, 오월오일에 강에 던진다. 오자서는 원한을 품고 강에 빠진 후에 "도신(濤神)"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물에 물결을 일으킨다. 이것이 유명한 전당조(錢塘潮)이다. 그것은 바로 오자서의 억울한 혼을 상징하는 것이다. 소주(일찌기 오나라의 수도) 사람들은 이 충신을 기념하기 위하여,강의 이름을 서강(胥江)이라고 고쳐부른다. 그리하여, 후세에 단호절은 오자서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알려졌다. 소주의 단오에 오자서를 기념하는 것은 중국단오습속중 하나이고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들옥되었다.

 

셋째는 춘추말기의 월왕 구천(句踐)이다. 그는 최초에 용주시함을 통하여 수군을 조련했기 때문이다. 월나라는 먼저 오나라에 패배한다. 구천은 와신상담하여 힘을 길렀고, 복수를 꾀했다. 그는 밤낮으로 수군을 조련했으며, 결국 오나라를 이긴다. 그리하여 새로운 춘초오패의 한 명이 된다.구천이 수군을 조련할 때 용주를 젓도록 했고, 강위에 수척의 용주를 나란히 세워서 앞으로 젓게 하여 1등을 뽑았다. 배에 탄 수군들이 단결하고 서로 잘 협력해서 노를 저어야 했고, 이는 나중에 전투에서 그대로 응용되었다. 이것은 구천이 창안한 것이다. 후세에 중국인들은 단오절이 되면 용주경기를 중요한 항목중 하나로 삼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단오절은 구천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넷째는 동한시대 절강(浙江) 상우(上虞)의 14살된 아가씨 조아(曹娥)이다. 그녀는 후세인들에게 효녀로 기억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 부근이 순강(舜江)에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돌연 홍수가 나서,부친은 거대한 물에 휩쓸려 간다. 슬픔에 빠진 조아는 한편으로 상심으로 곡을 하며 한편으로 강을 따라 부친의 시신을 찾았다. 칠일 밤낮을 찾은 후에 그녀는 강위에 큰 파도에 검은 무엇인가를 휩쓸리는 것을 보고, 조아는 부친이 급류에 휘말려 드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강물 속으로 부친을 구하러 뛰어들어, 익사하고 만다. 삼일 후 그녀의 시신이 강안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이 강을 조아강으로 고치고, 강가에 효녀낭낭묘를 지어서 그녀를 기념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조아가 강에 몸을 던진 날이 바로 오월오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단오절이 효녀 조아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유명한 <조아비(曹娥碑)>로 입증된다.

 

다섯째는 동한말기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광서(廣西)의 관리 진림(陳臨)이다. 진림은 원래 광동 사람이다. 한순제때 광서 창오태수(蒼梧太守)가 된다. 백성들을 잘 교화시키고 비교적 개명한 정책을 썼다. 그래서 민중들이 많은 혜택을 본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현지에 유복자가 있었는데, 성인이 된 후에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원수를 죽여 관청에 체포되어 사형을 받는다. 진림은 죄수에게 후손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의 처를 옥중으로 가서 그를 돌보며 동거하게 해준다. 그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 비로소 그의 사형을 집행한다. 그래서 진림은 창오인민들의 존경을 받는다. "창오부군은광대(蒼梧府群恩廣大)...득덕참고현천보뢰(得德參古賢天報賚)"라는 노래까지 전해진다. 옛날 광주부는 오월오일이 진림의 제사일이었다. 매년 그를 위하여 사당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의 자손도 번성하여 영남의 진씨들은 그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다. 단오절은 진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여섯째는 유명한 주처(周處)이다. 주처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중국인이면 다 아는 이야기이다. 그는 삼국시대 동오의 말기 서진의 초기에 걸쳐 살았던 강소(江蘇) 의흥(宜興) 사람이다. 동오의 명장, 파양태수 주방(周魴)의 아들이기도 하다. 주처는 어릴 때는 하고싶은대로 하고 다녀 고향의 골치거리였고 모두 그를 아주 싫어했으며, 등 뒤에서 욕을 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개과천선한다. 그리고 명인 육기, 육운 형제에게 가서 가르침을 구한다. 나중에 새 사람이 되어 그의 공덕은 부친보다 뛰어났고 "주처제삼해(周處除三害)"의 이야기를 남긴다. 오나라가 망한 후에는 서진에서 관리를 지낸다. 신평태수, 광한태수, 초내사, 산기상시, 어사중승등의 직을 지낸다. 일에 근면하고 강직하며 아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권세가들의 미움을 사서 서북으로 보내어져 강족, 저족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러다가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묵어>30편 및 <풍토기>는 지방풍속을 기술했다. 지금 사람들이 단오, 칠석, 중양등의 풍속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책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날 단오절을 지내면서 그를 기억해야 하고 그를 기념해야 한다.